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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13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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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햔사 탑과 닮은 월정사 9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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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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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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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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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9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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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유 묘지명-나주박물관
▢ 묘향산 보현사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40호로 지정된 절로 31본산제도(本山制度)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21개 군의 절을 관장했던 본산 중 하나였다. 수행처로서의 지리적 여건뿐 아니라, 조선시대 구국(救國)의 선봉장이던 서산대사(西山大師)입적처(入寂處)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절은 968년(광종 19)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1028년(현종 19)연주산에 들어가 살았던 탐밀(探密)과 그의 제자 굉확(宏廓)이 모여드는 학승(學僧)을 수용하기 위해 절 동남쪽 100여 보 되는 장소에 243칸의 정사(精舍)를 이룩함에 따라 보현사는 묘향산을 대표하는 절이 되었다.
절을 크게 일으킨 탐밀과 굉확이 입적한 뒤에도 제자들이 절을 증축하였으며, 1067년(문종 21)에 왕이 사전을 하사하였다. 1160년(의종 14) 10월 12일 왕이 절에 행차하여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30근의 은병(銀甁) 10개를 만들게 하였는데, 각각에 다섯 가지 향(香)과 다섯 가지 약을 담아서 불전(佛前)에 바쳤다고 한다.
이후 여러 번 중창이 있었는데 1096년(숙종 1)에는 달보(達寶)가 재창하였고,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3창하였으며, 1449년(세종 31)에는 해정(海正)이 4창하였다. 1634년(인조 12) 화재로 건물이 불타자 명조(明照)와 각성(覺性)이 중창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9월 실화(失火)로 모두 불타버리자 4년 동안에 걸쳐 남파(南坡)·향악(香岳) 등이 여섯 번째로 중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 외에도 1216년(고종 3) 9월 여진족이 묘향사에 들어와서 절을 불태움에 따라 중창하게 되었는데, 이는 1218년 거란을 토벌했던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보현사는 한창 중수 중이었는데 그 규모는 300여 칸에 달한 것이라 한다.
1818년(순조 18)에 절에 머물던 한월(漢月)에 의하여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석가여래상과 양대보살상(兩大菩薩像)·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의 채색이 모두 퇴색되어, 미타존상(彌陀尊像)과 대웅전의 석가여래상·양대보살상을 개금(改金)하고 십육나한상에 개채(改彩)하였으며, 1912년12월23일 보현사는 ‘선교양종대본산묘향산보현사(禪敎兩宗大本山妙香山普賢寺)’라는 공식 이름 아래 30본산 중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당시 당우는 대웅전·명부전(冥府殿)·심검당(尋劒堂)·수월당(水月堂)·명월당(明月堂)·진상전(眞常殿)·동림헌(東林軒)·만수각(萬壽閣)·관음전·대장전(大藏殿)·영산전(靈山殿)·극락전·사리각(舍利閣)·수충사(酬忠祠)·팔도십육종도규정문(八道十六宗都糾正門)팔만대장경보존고 등이 있었고 이 가운데 수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국승장 휴정(休靜)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유물은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7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구층탑과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44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탑 등이 있다. 또 석가여래사리부도비(釋迦如來舍利浮屠碑)에는 사리봉안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신라 자장(慈藏)에 의하여 통도사(通度寺)에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사리가 1592년 왜병의 침입으로 해를 입게 되자 사명당(四溟堂)이 금강산으로 사리를 이안해왔다. 이에 휴정은 금강산이 바다 가까이에 있어 적국과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1함(函)은 묘향산에 봉안하고, 1함은 통도사로 되돌려 보냈다. 그 이유눈 적이 노리는 것이 사리보다 금은보화에 있고 또 자장의 뜻이 본래 통도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불사리(佛舍利)는 통도사와 보현사에 분안(分安)되었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 때 전국사찰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의승(義僧)의 궐기를 독려했던 초대 승군대장 휴정의 사리부도와 묘향산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보현사에서 입적한 원준(圓俊)의 석종(石鐘),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언기(彦機)의 석종과 비문,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영암대사석종비(靈巖大師石鐘碑)·월저대사비(月渚大師碑)등이 있다.
보현사 말사는 일제강점기에 112개가 있었는데 산내말사(山內末寺)는 안심사(安心寺)·내원암(內院庵)·보윤암(普潤庵)·화장암(華藏庵)·법왕대(法王臺)·상원암(上院庵)·축성전(祝聖殿)·불영대(佛影臺)·내보현암(內普賢庵)·불지암(佛智庵)·보발암(寶鉢庵)·금강굴(金剛窟)·삼성대(三聖臺)·설령대(雪靈臺)·하비로암(下毘盧庵)·보월사(寶月寺)·남정암(南靜庵)·계조암(繼祖庵)·일출암(日出庵)·백운암(白雲庵)·신흥암(新興庵)·은봉암(隱峯庵)등
24개가 있었다.
또 보현사의 산외말사(山外末寺)로는 양화사(陽和寺, 泰川郡)가 있으며, 양화사의 산내말사는 상운암(上雲庵)·화장암(華藏庵)·원적암(圓寂庵)·내원암(內院庵)·축성전(祝聖殿)등이 있다. (daum백과)
○ 묘향산 보현사지비(普賢寺之碑)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연혁 및 위상에 대하여 기록한 석비로 비에 의하면 보현사는 화엄종 승려로서 묘향산에 은거하였던 탐밀(探密)과 조카이자 제자인 굉확(宏廓)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이후 그 문도들에 의해 계승된 사찰이다. 탐밀은 25세에 출가하여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수학한 후 1028년(현종 19)에 묘향산에 들어와 수행하였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승려들이 많아지자 1042년(靖宗 8)에 대규모의 사찰을 창건하고 보현사라고 명명하였다.
탐밀이 입적한 이후에도 보현사는 문도들에 의해 계승 발전하였고, 국가에서 이를 인정하여 1067년(문종 21)에 토지를 내리고 탐밀의 문도들이 사찰의 주지를 계승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기록은 이와 같은 국가의 결정이 후대에 잊혀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탐밀의 문도들이 국왕에게 요청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를 입증하듯 탐밀의 제자들의 명단이 후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비문은 김부식(金富軾 : 1075~1151)이 찬술하고, 문공유(文公裕 : ? ~1159)가 글씨를 썼으며, 비문 상단의 제액(題額)은 인종이 직접 쓴 것(1142-인종 20)이다. 비는 현재 묘향산 보현사에 남아있는데 일부 내용은 마멸되어 읽을 수 없다. (이상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의 설명글)
○ 문공유(文公裕)
남평에서 남. 15세에 남성시에 급제
1122년 합문지후에 제수되었으나 장인 韓安仁의 죄에 모함을 받고 연루되어 양산으로 유배되었다 숙정 후 복직됨
1129(인종7년) 금나라 임금 생신축하 사신으로 갔다옴
1132년 시어사시서경 집무중 묘청을 탄핵하다 좌천, 묘청 일당이 지은 대궐에 편액을 쓰라는 왕명을 거역하였으나, 묘청의 난 평정 이후에 충의를 알게 됨
1156년 검교태자태보 중대부지문하성사(中大夫知門下省事)를 제수 받고, 식읍 3백호를 받음. 서예에 능했으며 서풍은 당과 송나라에도 미쳤고 해서(楷書)전성기 인데도 체양(북송의 대가)서풍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행서로 쓴 묘향산 보현사 창사 비문(김부식 지음)은 현재도 남아있다.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