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응수의 말대로 그의 집은 안채를 중심으로 서쪽은 사랑채이고, 동쪽은 별채이고, 대문께는 행랑채로 그야말로 명문가의 한식 정통 가옥이었다.
병연은 안응수의 안내로 동편에 있는 별채로 들었다.
별채는 안채의 부엌과 마주한 곳이 광이고 마당 쪽으로 두칸이 넘는 방이 글방이고 광과 글방사이에 방이 있어 이곳이 병연이 문객으로 머물게 될 방이었다.
안응수는 하인을 시켜 병연이 머무를 방에 불을 켜게 하고 침구를 깔도록 명했다.
이윽고 방에 불이 켜지자 그의 안내로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에 드실지는 몰라도 이 방이 이명 씨가 쓰실 방입니다."
"과분합니다."
병연의 말에 안응수는 만족해하며,
"원로에 피로하실 텐데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내일이면 오늘 모였던 친구들이 이곳으로 모일 터이니 우리 함께 열심히 학문에 심취해 봅시다."
안응수는 병연의 잠자리를 확인해주고 안채로 건너갔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훤하게 밝아왔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나닜는 창문을 열었다.
담 밖으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고, 멀리 북쪽으로 삼각산(三角山)이 능선을 이루며 서쪽으로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이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둘러 있어 그 아름다운 경관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병연이 잠시 넋을 잃고 산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인기척에 문이 열리며 하인 하나가 보따리를 들고 들어와 병연의 앞에 놓았다.
"주인 노마님이 선비님 입으시라고 드리는 의복이옵니다. 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하인이 옷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가자 병연은 옷을 들추어 보았다.
비단으로 지은 바지와 저고리였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고 온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값진 옷이라 촉감이 부드러웠다.
잠시 후 안응수가 안채에서 건너왔다.
그는 새옷으로 갈아입은 병연을 보고,
"잠자리는 편했소이까?"
"네. 편히 잘 잤습니다. 이렇게 옷까지 배려해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병연은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웬걸요. 자, 우리 옆방에 있는 글방으로 가보실까요?"
안응수는 앞장서 밖으로 나와 길게 놓인 툇마루를 걸어가 쌍 문으로 된 문을 열고 글방으로 들어갔다.
글방은 두 칸 넓이의 큰 방이었다.
방 중간 벽 쪽으로 놓인 책장 속에는 많은 서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중국 팔대시가의 시집은 물론 시인묵객들이 쓴 글과 육조(六曹)에 관한 서적이 있는가 하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서책들이 많아 책밖에 모르던 병연에겐 커다란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병연은 정신없이 서책들을 둘러보고 나서 안응수를 바라보았다.
"참. 선생님 댁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네. 좀 전에 아버님께서 기침하셔서 지금 사랑방에 계십니다."
병연은 안응수의 뒤를 따라 나서서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 서편에 있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사랑방에는 환갑정도 돼 보이는 안응수의 부친께서 위엄 있게 앉아서 뒤따라 들어오는 병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연은 정중히 그의 앞에 다가서서 허리를 굽혀 큰 절을 올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름이 무엇인고?"
"김란 이라고 하옵니다."
"김란! 그래. 관향은 무엇인고?"
안응수 부친은 김 씨라는 말에 놀라면서 본관을 묻는다.
"경주 김 씨라 하옵니다."
병연은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경주 김씨라고 둘러 대었다.
이에 안응수 부친은 안동 김씨가 아님을 알고 적이 안심이 되는 듯 말을 이었다.
"조부님은 계신가?"
"네. 할아버님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 가셨고, 아버님은 제가 갓 난 애기 때 돌아 가셔서 기억에도 없사옵니다."
"어허. 그랬군."
안응수 부친은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