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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 칼벵의 섭리론 2
제 4 장 섭리론
1. 정의
섭리란 단어는 섭리(攝理)란 중국어이며, 영어 providence를 가르킨다. providence는 라틴어 providentia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그 뜻은 "선지, foreknowledge"이다. 단어 자체의 뜻만으로 보면,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이 세상에의 능동적인 개입보다는 그분의 선지식(prior knowledge)과 예비(provision)를 가리킨다".79) 이 말이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될 때, 또 다른 의미가 첨가되는데, 즉 예견되고 예비된 것을 추진한다는 뜻이다.80) 그래서 통상적인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선지를 모두 가리킨다. 섭리가 선지(fore-knowledge)인가 지도(over-see)인가, 어느 것의 비중이 더 큰 지는 여러 가지 입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두 개념이 혼합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때로 혼동을 자아낸다. 영어 단어 providence의 용법도, 두 가지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81)
섭리란 용어가 신학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그 이해를 돕기로 하자. 먼저 성경상의 용어를 살피자. 섭리란 단어는 히브리어에는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헬라어에는 προνοια, προνοεω가 대응어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용법에 의하면, 이 두 단어는 신학적인 섭리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82) 성경상으로는 "돌보다, 어떤 것을 준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리고 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인간과 물질에 관련된 내용이다.
섭리라는 교리가 기독교에 도입된 주된 근거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내용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그 창조된 세계를 유지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구약에 섭리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나, 하나님의 통치 사상이 강력하게 나타나고, 사실 구약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생각 속에서 그 목적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인간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인 영적 삶이 강조됨에 따라, 섭리의 영적 측면이 강조되고, 관심이 협소해지는 느낌이 있으나, 그런 영적 삶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이해되었다.83)
여하튼, 성경은 신의 통치를 강하게 증거하고 있고, 그것은 섭리라는 교리를 통해 기독교 신학에 자리를 잡는다. 섭리의 교리가 본격적으로 신학화된 것은 변증가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세계의 질서에 대한 개념은 비단 기독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주장은 상이하지만, 섭리에 대한 생각이 타종교나 사상에도 있었고, 특히 당시 대중화된 스토아주의에서 섭리사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견해에 의해 특히 대변된 스토아주의의 섭리론에 의하면, "만물은 각기 맡은 기능이 있고, 따라서 영광스런 우주에 기여한다"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이 사상은 기독교 내에서도 섭리의 교리가 발전될 것을 촉구했다.84)
당시 이 사상은 스토아에 의해 크게 발전했을 뿐 아니라, 보편화하여서,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교리지침서에 사용될 정도였다. 그의 [(대)교리지침서](Oratio Catechetica)는 오리겐의 [제일원리](de Principiis) 이후 철학적 근거에서 조직신학적인 신학을 구축하려고 했던 최초의 노력이었다. 그의 [(대)교리지침서]에서,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다.
"즉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존재하지 않던 바를 발견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이 존재하게 된 만물을 지탱하시며, 앞으로 있게 될 모든 것을 선지(foresees)하신다."85)
또한 어거스틴 같은 대 교부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특수섭리(special providence)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간사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이에 비해, 스토아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섭리는 "물질 및 인간 세계의 질서의 불변하는 선성(goodness)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인간은 항상 그 선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가능성을 선용하여,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다."86) 변증가들은 당시 스토아주의의 섭리론을 수용하여, 무신론이라는 오해를 변호하면서, 기독교에도 세계 질서를 수호하는 신이 있음을 입증했으나, 그런 반면에 스토아주의의 비역사적인 신괌과 다분히 우주론적인 색채를 아울러 지니게 되는 부담을 떠 안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지나치게 우주론(cosmology)과 신론을 결부시키는 바람에, 영적이고 개인적으로 역사하며 인간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이뤄나가는 기본적인 성서적 신관을 훼손시켰다."
섭리론에 내재된 이런 갈등은, 그후 섭리가 한편으로 구원과 연관되어 구속론의 색채를 강하게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신학적으로 이해되는 양상을 나타내, 양자의 관계가 늘 신학적으로 문제시되었다. 섭리는 선지(fore-see)인가, 지도(over-see)인가? 앞에서도 살핀 것같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로는 선지를 뜻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지도의 의미가 중요하다. 전자가 강조될 때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접근을 하게 되고, 후자가 강조될 때 성서적 접근을 하게 된다. 철학적 접근에서는 신의 전지, 전능 문제 등이 중시되고, 인간의 자유문제가 거론되고,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라는 2중원인의 문제가 대두된다. 성서적 접근에서는 신의 통치,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구속, 신적인 돌봄 등이 중시된다. 여기에 초역사적, 역사적인 접근과, 자연신학적 신관, 성서적 신관의 갈등이 관련된다.87) 교의학적 용어를 빌면, 전자는 존재론적 접근이고, 후자는 창조론적 접근이다.
그러나 섭리는 성경적인 섭리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영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섭리가 철학적, 신학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섭리의 중요성이 신자의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관련된 만큼, 섭리의 논의에서 실천적, 경험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섭리는 수행 양상에 따라, 보존, 협력, 통치 등으로 구분된다. 원래 협력(concursus)은 인간의 활동의 여지를 설명하기 위해, 정통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분에 교훈적 지침을 제공하는데 사용 될 수도 있다.
섭리론은 여타의 신학적 주제와는 관계에 있어, 가령 신론, 구원론, 예정론 등과의 관계에 있어, 각 신학자의 강조점과 신학체계에 따라 그 위치가 결정되며, 그로 말미암아 섭리 자체에 대한 이해도 좌우된다.
하나님 못지 않게 악도 인간에게 중요하다. 구약에서도 악의 문제만큼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신학적 질문이 제기되었다. 섭리를 믿을수록 악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특히 집단적인 악을 경험한 현대, 또 어느때보다도 악과 고통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진 현대인에게 섭리와 악의 관계는 중요하다.
섭리와 관련된 성도의 신앙생활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이 섭리와 기도의 관계도, 섭리에 대한 접근방법에 따라 상이하게 이해된다. 하나님을 역사를 주관하시고 각 사람을 돌보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역사적, 성서적 접근에 의하면, 기도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는 바로 그 하나님의 돌보심(care)을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철학적인 섭리 이해에 따라 섭리를 주로 선지로 보는 입장에서는 기도가 불가능하다. 철학과 신학을 접맥코자 애썼던 교부 오리겐은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내다보신바는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에 기도가 소용없고, 또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는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에 역시 기도가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기도의 가능성에 대해서 결코 의심하거나 의문시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시할 뿐 아니라 성도의 본분으로 명령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도와 섭리와의 관계와도 같다.88) 섭리와 기도의 긴장을 증거하는 성서적 접근과, 기도의 이해에 있어서 일종의 신학적 숙명론에 빠지는 철학적 접근의 관계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2. 창조와 돌봄
칼빈은 창조와 섭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능력이 창조시 뿐 아니라 세계의 계속적인 상태에도 빛나고 있음을 알기에 " 불신자와 구분된다고 한다.89) 또한 섭리를 인식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90)
칼빈은 육적인 지각(carnal sense)으로 겨우 창조에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나, 신자는 신앙으로 창조를 넘어서 피조물 하나 하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지한다고 말한다.
육적 지각은 일단 창조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직면하면 거기서 멈추고, 기껏해야 그런 작업을 하신 조물주의 지혜와 선함을 측량하고 명살 할뿐이다. …게다가, 그런 운동력이 기인하는 어떤 일반적인 보존하고 통치하는 능력활동을 명상한다. (중략)
그러나 신앙은 보다 심오하게 꿰뚫어봐야만 한다. 즉, 그분을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발견한 뒤, 나아가 그분이 또한 통치자요 보존자라는 결론을 지어야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천체와 보편적인 움직임에 의한 그 몇몇 부분들을 운행하실 뿐 아니라, 그가 만드신 모든 것, 심지어 참새까지도 지탱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시는 것임을.91)
칼빈은 또한 철학적 사고로도 세계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운행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으나, 성서에서만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섭리하는 역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여, 철학적 사고보다 성서의 계시에 의존한다. 즉,
참으로 그들(철학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움직이고 산다는 바울의 진술(행17:28)에 순복하지만, 아직 그가 추천하는 은혜의 진지한 느낌에서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을 전혀 맛보지 못했는데,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오직 이 둘봄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92)
그래서 섭리론은 운명이나 우연을 거부한다.93)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스리는 것도, 단순히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매사는 구분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봄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가을, 이런식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 가운데서도 인간은 매우 크고도 상이한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어, 매해, 매달, 매이리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a new, a special providence of God)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즉각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94)
즉, 그는 일단 창조되고 나면, 자연이 스스로 운행된다는 이신론적 자연관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물은 그분 아래 있다. "하나님은 순간적인 창조주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은 한가로이 세상을 관찰하는 분이 아니시라, 지켜보시며 능동적으로 활동에 개입하시는 분이시다.95) 이런 의미에서 그는 전능한데, 그는 전능한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전능이다.96) 따라서 섭리는 "하나님의 눈 뿐 아니라 손에도 해당된다".97) 섭리는 행위 안에(in actu)있게 된다. 따라서 그의 섭리는 통치적 성격이 강하다.
칼빈은 통치를 중시하면서, 특히 개인에 대한 돌봄을 중시한다. 이를 위해 성경상의 증거로 뒷받침한다. 그래서 특수섭리(special providence)보다 특별한 돌봄(special care)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리고 섭리가 특히 인간에 관련되었음을 밝힌다. "세계가 특별히 인간을 위해서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통치에서도 이런 목적을 살펴보아야만 한다.98)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심판과 축복을 행하시며, 만사가 그의 뜻 안에서 이뤄진다. "인류의 역사는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운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통치하신다.99)
그러나 칼빈이 하나님께서 매사를 특별히 돌보신다고 해서 보편섭리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보편 섭리가 그의 특별한 관심을 벗어나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이다.100) 그는 그의 하나님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에서도 이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섭리의 지식은 우리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돌봄의 날개 아래 모든 피조물을 각각 덮고 계시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그것을 묵상하지 않는 한 모호하고 혼동된 것이다.101)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그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만물의 가장 높고 첫 번째 가는 원인"이라고 말할 때도, 그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제일 원인과는 상당한 차를 나타내는 것이다.
3. 섭리의 악(惡)의 문제
악은 독자적인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탐구한다. "하나님은, 인간 혹은 사탄이 어떠한 음모를 꾸며도 열쇠를 쥐시고는 그들의 노력을 당신의 심판을 수행하게끔 만드신다."102)
악에 대한,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기독교 강요'의 국가론에도 반영된다. 하나님은 섭리에 있어서 신자를 각별히 돌본다고 해서 보편섭리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밝혔다. 하나님은 세계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서 악도 사용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상기하지. 그런 악을 고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며, 오직 남아있는 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니, 그의 장중 안에 왕의마음과 왕국의 흥망이 있다. (중략) 여기에 그의 선함과, 그의 능력과, 그의 섭리가 계시된다. 왜냐하면 그는 때때로 그의 종들 중에서 공개적인 복수자를 일으키시며 그들에게 악한 정부를 벌하고 자기 백성을 구하도록 명령하시며 힘을 주신다. 때로는 다른 목적, 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의 분노를 이 목적을 위해 쓰신다. 따라서 모세를 통해 바로의 학정에서 부당하게 어려움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셨다. … 따라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불경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스런 고집을 때로는 앗시리아 족속, 때로는 바벨론 족속을 통해 치시고 때렸다.103)
하나님은 선을 통해 악을 징벌하시기도 하고, 악을 통해 악을 징벌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후자의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인도되고, 그의 사역을 잘 깨닫지도 못한 채 수행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마음속으로는 오직 못된 행동만 꾀했을 뿐이었다.104)
그리고 하나님께서 설사 악을 통해 역사하셔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이기에 걱정될 것이 없고,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서 책망을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악인이 스스로 욕망을 막아가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05)
4. 섭리의 실제적인 적용
칼빈이 섭리론을 적응시키는 것을 살펴보자. 세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관련된다. 둘째, 하나님은 매개를 이용해서도 역사하시고, 없이도 역사하신다. 셋째, 전 인류를 보살피시되 특히 교회를 돌보신다.106)
칼빈은 그의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에서, 인간의 과거와 미래가 섭리와 관련하여 지니는 의의를 상술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미래를 직면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역사를 섭리적 차원으로 이끄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여기서 신자의 적극적인 삶의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미래에 관련해서는 매사가 아직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경우의 사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명령받지 않은 것처럼 자기의 임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혹은 (좀더 적절히 말한다면), 그는 모든 우연이 하나님의 분명하고 확실한 섭리와 조화될 것에 거리낌없이 준비되어야만 하는 것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준행하는 모든 일에 성공할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의 손의 활동에 축복을 약속하신다. 모든 성도는 이 약속에 의해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인, 한 마디로 말해서, 올바로 이해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손을 묶지 않고 오히려 일하도록 풀어주듯이,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고, 그 열성을 강화하고 견고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섭리 사상은 성도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혼자서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섭리의 뒷받침을 인지하고 더욱 담대하게 행할 수 있게 만든다.
칼빈의 섭리론의 적용에서는 5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교회적이다. 둘째, 신자의 책임을 강조한다. 신자는 섭리를 믿을 때 무책임하고 맹목적이기보다 신중함이 요청된다.107)
특히 신자의 책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로서 사회와 국가를 운용한다."108) 그런데 "하나님은 불가사의하고 파악 불가능한 그런 방법으로 … 인간의 자유의지가 저촉되지 않도록 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충동을 지배하신다."109) 하나님은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변증법이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책임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위험하다는 소외를 들은 길을 들어서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도적을 피해야 한다. (병이 들어서) 살려면 의사를 부르고 약을 먹어야 한다. 건강을 잃지 않으려면 음식을 삼가야 하고, 쓰러져가는 집에는 살아서는 안 된다.110)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의 주어진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죄는 용서될 수 없다. "그가 계명을 어기는 것은 순종이 아닌 고집과 범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11) 넷째, 목회적이다. 그는 섭리가 신자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강조한다.112) 신자는 섭리를 묵상토록 권고를 받으며, 섭리사상 때문에 기쁠때나 슬플때나 위로중에 신앙을 지킬 수 있고, 담대하게 삶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순경이나 역경 중에 도울 것을 믿기에 기도하게 되고, 그로써 희망이 생기고, 위험 중에도 용기와 확신을 갖게 된다. 다섯째, 하나님의 "후회"라는 개념을 적응(accomodation) 원리로 설명한다.113)
제 5 장 예정론과 섭리론의 관계
칼빈은 섭리론에서 예지적인 것보다는 신의 주권을 강조하고, 예정론에서도 예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연결짓는다. 그 뜻은 인간의 공적과 무관하고, 또 인간의 공적의 예지와 상관없이 이뤄지고 실행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될 만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선택될 만한 자를 만드신다"114)고한다. 그리고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칼빈의 섭리론은 성부가 신자에게 대해 보이는 관심이 중요했다면,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역할이 강조된다.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신자로 하여금 예정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초점이요 접촉점이다.
칼빈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의 주권인데, 이것이 섭리와 예정 모두에 결부된다. 특히 섭리에서는 세계의 모든 사건이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나, 우연의 차원이 아니라, 섭리와 연관됨을 제시했다. 그리고 신자는 이 세상이 신의 행동의 장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며, 그의 행동을 축복받게 되고, 그의 도덕적인 행위는 동시에 예정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칼빈의 섭리론과 예정론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신자의 적극적인 측면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섭리사상은 숙명론이나 우연을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적극적인 삶을 조장해 주는 것이다.
1. 예정론의 성질
칼빈은 성서의 말씀에 복종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예정론을 전개시켰다. 칼빈은 이 교리를 사변적으로 생각해서 안되며115) 다만 성서의 증언에 충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116) 이러한 입장엣 칼빈의 해명을 들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첫째, 예정론은 복음적 은혜론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예정론만이 구원의 확실성에 산 효과적인 형식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은 참으로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의 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다만 선택의 확실성으로만 현실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만 날마다 자기 부정 속에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크리스챤의 일상생활에 무한한 위로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예정론을 성령론 속에서 다루고 있다. 성령의 일, 신앙, 의인, 성화, 크리스챤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다음에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은 신앙과 삶, 희망 그리고 크리스챤인 내가 다 성령의 행동과 확증 속에 있다는 기쁜 신앙고백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에서 인간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 신앙의 확실성의 유일한 근거, 그리고 크리스챤의 십자가지는 자기 부정의 윤리적인 삶의 창조적인 힘의 원천을 찾으려고 했던 그의 신앙고백이다.
1) 은혜로운 선택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다. 하나님 고유의 사역인 선택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실현될 인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신 최종적인 목적은 선택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들을 영광에 이르게 한 다음 자비를 보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선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는 하지만 주로 성부와 성자의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요6:37∼39).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호 안에 두시고 안전한 성(城)에 우리를 보호하신다"1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 역시 선택을 주도하는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중재자로 나타내셨지만 그도 역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118)고 주장하였다. 이는 바로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은 누구인지 앎이라"고 한데서 볼 수 있듯이 '나의 택한 자'라는 표현을 써서 성자 자신이 스스로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칼빈이 선택자들을 성자 안에서 선택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택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이다. 칼빈은 "우리는 신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원한 섭리에 의하여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신다"119)고 하였고,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나서 영원하시고 만고불변하신 계획에 의해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선택하였다"120)고 주장함으로써 유기(遺棄)와 선택 모두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선택의 유일한 근거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고 하였다. 창세기 23장을 언급하면서 "야곱과 에서는 똑같은 부모에게서 출생한 형제이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두 사람의 차이점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받아 들이셨으나 에서는 거절하였다"121)고 말한다. 에서와 야곱의 외형상의 차이는 없지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유기된 에서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된 야곱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바울은 에베소서 1장 5절에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라고 선포한다. 칼빈도 이것을 접어두고 다른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의도 외에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은 악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122)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ν α?τω)와 '그의 사랑 안에서'(α?τω ?ν ??απη)만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화(聖化)된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설교 그리고 복음 전파가 선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칼빈은 선택과 신앙과의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가 피해야 할 잘못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로 여겨서 인간의 동의에 의해서만 선택이 유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다면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계획보다 앞장세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123) 성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124)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하신다(엡2:8∼9). 선택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두 번째 오해는 선택이 신앙에 의존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125)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며 소용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분명히 반대한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의 선택은 증명될 수 있는데,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곧 선택의 증거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이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면, 믿음은 이러한 선택교리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126)
이처럼 칼빈의 예정교리는, 선택된 자의 입장에서는 은혜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에 그러한 것이지 인간에게서 어떠한 것도 전제하지 않음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구원은 곧 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기계적인 숙명론도 아니요, 개인 운명을 알아내는 암호 낭독도 아니요, 다만 선택과 저주가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선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지시하고 강조하는 지침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예정된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그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 은혜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의 말을 여기에서 인용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127)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때 그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를 생각하셨다고 하면 선택은 은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128)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선택을 은혜라고 볼 때, 예정은 무조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둘러싸인 자들이기에, 스스로는 구원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어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구원을 인간들 사이에 실현하셨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 삼아준 사람들은 그가 저희를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신 것이다. 이는 저희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의거하지 않고는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택함을 받았다면 우리의 영원의 확증은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또 성자와 분리하여 추상적으로 생각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정을 생각할 때 반드시 의거하여야 할 거울은 그리스도다."129)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의 근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립된 두 가지 언약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언약과 둘째 언약은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는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으로서, 아담에게 실시되었으나 아담이 이 언약의 이상을 달성하지 못하고 타락하였다. 후자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언약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죄과를 인류가 담당한 것처럼, 우리의 죄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해 주시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된다. 칼빈은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이니 저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보셨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아온 까닭이다. 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단순히 신앙으로만 되는 것이다."130)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은혜라고 하는 말은 그 고유한 의미에 있어서, 무가치한 자 즉 죄인에게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과분한 사랑의 호의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받을 자의 골로가 있고 없음을 관계치 않고 베풀어주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할 때에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조금이라도 가미시킨다면,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변질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확실하며, 인간의 권위에 의하여 흐려지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하다."131)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자유로우시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민족보다도 우수하다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이것이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원인을 발견할 수 없는 특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고 구태여 묻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왜 자기들이 소와 말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인가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개로 만드실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들이 그들의 지위에 대하여 그것이 정당치 못한 차별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반항하는 일을 인정할 것인가? 분명히 그들이 아무런 공로도 없이 인간의 특권을 얻은 사실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 척도에 따라서 자신의 은혜를 다양하게 분배하신 것뿐인 것이다."132)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공상하는 선택의 모든 근거를 뒤엎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하여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는 이 유일한 원천 즉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들에게 주시기로 원하신 은혜를 개인적으로 마련해 두신 보고에서 흘러나오게 하신다."
고 했다.133)
만약 하나님의 예정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라는 단서가 붙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정이라는 말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곧 은혜인 것이다.
2) 공의로서의 유기(遺棄)
절대적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이 영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다른 어떤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유기라고 한다.
선택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내어버림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선택된 자라고 할 때에는 선택되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적 영원한 선택을 알기 전에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에서 온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134)고 함으로써, 영원한 선택을 안다면 영원한 유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됨을 언급했다.
아울러 칼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한 것이 그의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하듯이(창25:13, 말1:2, 롬9:11)에서 선택되지 못하고 유기된 것도 같은 이치라는 것을 바울의 글을 인용하여 "야곱과 에서의 사건에서 두 사람이 아직 선악을 나타내기 전에 벌써 한사람은 선택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은 버림을 당했다".135)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근거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시에 유기의 근거로써 칼빈은 바울의 로마서9장18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하케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을 베푸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버리시는 것도 동일하게 그의 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논술하였다.136) 예를 들면, 정원사가 화단에서 화초를 돌볼 때 어떤 것을 잘 가꾸어 주지만 다른 것은 뽑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로마서 9장 20-21절을 인용하였는데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 하면서 선택과 유기에 관한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 안에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137)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신의 주권적 의지의 표현이며 인류의 역사의 목적으로써 이해했다. 역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앞에 드러내 준다, 그분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그분이 선지(先知)로도 역시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기초하고 있다. 선택 섭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이며, 유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와 선택받은 자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며 오직 우리가 확신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귐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이다.138)
인간을 선택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며(엡1:7), 그분의 영광을 드높게 하려는 것이다. 칼빈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잠16:4)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선전하시고자 바로를 높이 드셨다"(출9:16)고 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의(義)'가 포함되어 있는데, 인간은 그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의 제한된 지혜로는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시키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를 타락시키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139)
칼빈은 이어서 악인이 멸망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인간의 복과 화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인간의 생사가 그분에게 달려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기교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요소에 관해서는 "유기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전하여 졌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믿지 않은 이유는 그들 마음의 악함과 완고함에 기인된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들을 저주하시므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하시는, 의롭기는 하지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이미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으신 그의 예정에도 기인된다고 말할 수 있다.140)고 하였다.
칼빈은 선택과 유기를 다같이 언급하였지만 유기와 선택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선택과 유기의 궁극적인 이유라고 할 때, 양자가 모두 동일한 의미이거나 단순히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비동일성(非同一性)은 칼빈이 사용한 용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선택과 유기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으로 묘사된 반면에, 선택은 '은혜로우신'이라는 말로 묘사되고 유기는 '의로우신'이라는 수식어로 함께 자주 나타나고 있다.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유기에 있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선택의 근거는 되지만 유기에 있어서는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 인간의 원죄와 범죄도 역시 유기의 이유는 되지만, 인간의 의지나 행위는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선택과 유기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또다른 측면은 유기보다 선택교리에 더욱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선택과 유기의 동일한 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 양자의 궁극적인 이유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동일하게 그 기초가 아님은 마찬가지이며, 각기 다른 방법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서 계획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각기 상이한 측면과 동일한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유기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여 나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칼빈은 양자가 모두 '하나님의 뜻'에 기인하고 있으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보았다.
3)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
이제는 칼빈의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잠깐 고찰해 보겠다. 칼빈이 하나님의 은혜 수여의 결정적인 방도를 예정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칼빈이 이미 예정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방도로 여겼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이 없이는 은혜가 은혜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울의 말(롬11:5,6)을 통하여 천명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가 자기 안에 작정해 둔 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은혜는 은혜되지 못한다."141)
그렇다면 은혜가 은혜되는데 있어서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유이다. 자유가 없을 때, 은혜는 은혜가 되지 못한다. 자유가 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일종의 보상 혹은 거래나 강요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준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조건에 대하여 보상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가 없기를 바란다. 즉 은혜를 거래 혹은 보상으로 받으려고 한다. 이런 인간적인 바램으로부터 발아한 것이 바로 '공로에 의한 구원' 사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 자체가 이미 인간의 무자유와 피동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은혜의 수여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자유하다는 것이다. 아무런 자의에 따라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아니 아무도 스스로는 은혜받을 수 있는 정황에 놓여 있지 않다. 즉, 그 어떤 공로일지라도 은혜수여 곧 구원에는 하등의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무자유를 폭로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확언해 주는 것이 바로 예정이다. 예정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동시에 인간의 무자유가 확립될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되지 못한다. 예정 신앙 없이는 공로에 의한 구원사상의 싹이 자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의 자아 주장을 없게 하는 효과적인 독약"142)이 바로 예정 교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은총론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며 어떠한 장소에 등장하다 해도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143)이기도 하다.
칼빈은 자신의 예정론에서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하니님을 선택하고 구별하는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고 개인들을,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하나님이다.144) 하나님은 선택할 뿐만 아니라 유기하는 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마엘, 에서 그리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기시킨 하나님이다.145) 칼빈은 이와같이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 어떤 법칙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강조한다.146)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는 그의 은혜가 어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는 때가 있고, 조건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때가 있다는 극단적 대조를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실을 칼빈은 성서를 통하여 여러 차례 확증한다. 그는 예정론을 주장하는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그의 영원 불변한 계획에 의하여 그가 오래 전에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한 자들과 다른 한편 멸망에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 선택된 자에 관한 이 계획은 자유롭게 주어지는 그의 은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가치와는 전연 관계없다고 우리는 단언한다."147)
칼빈은 또한 예정론을 반대하던 피기우스(Albert Pighius) 등의 반대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변호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어떤 자는 선택하시고, 다른 어떤 자들은 무시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전한다. 그러나 사실 자체가 명백한 것이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밖에는 가르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자유로우시다고 하는 것이다."148)
칼빈은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를 결정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공로에 의하지 않고 모태 안에서 벌써 천사의 머리,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이 세상의 의(義)와 구원이 되었다. …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선택의 가장 맑은 거울을 교회의 참된 머리이신 그 분 안에서 발견하다. … 그리스도는 의로운 생애를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후에 다른 사람들도 그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값없이 이 명예로운 은혜들을 받으신 것이다."149)
이제 칼빈은 '각 사람의 선택'을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등장시킨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150)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될 만한 자격이 추호라도 없다. 더 명백히 말하면, 아무도 스스로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정황에 놓여 있지 않다. 이처럼 "하늘 아버지는 인간에게서는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을 자신의 아들에게로 돌린 것이다."151)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주려고 했으나 인간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함으로 자기의 독생자인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아서 은혜를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안에는 그와 같이 탁월한 은혜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152)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와 인간의 무자유를 동시에 강조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