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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 앞에서
박 필 상
천년도 더 저쪽의 그윽하고 깊은 말씀
오늘 이 옛터에서 귀 기울여 들으려네
그때 그 바람 소리도 옷깃 여며 들으려네.
그러나 어찌하랴 무심히 돌아앉아
먼 구름 보내시며 묵언만 남기시네
보지도 듣지도 말고 마음 귀만 열라시네.
<해설>
*** 박 시인은 지금 부산 불교문인협회 이사로 활동할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도이다. 모르긴 하거니와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사바(裟婆)의 티끌을 별빛으로 승화하기 위하여 수 없는 밤을 고뇌(苦惱) 속에서 보냈으리라. 필자 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박 시인의 생활과 정신 세계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 을 불교 세계가 그의 문학에 어떻게 얼마만큼 투영되어 있는 가를 살펴보았으 나, 눈이 어두운 소치인지 이 시집에서는 그리 드러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위의 작품은 경주 박물관 앞에 달아 놓은 '성덕왕 신종'을 제재로 하고 있다. /천년도 더 저쪽의/ 그윽하고 깊은 말씀/과, /그때 그/ 바람 소리도/ 옷깃 여 며/ 듣기 위하여 '에밀레'의 슬픈 전설 앞에 선다. 그러나 그는 /무심히 돌아 앉아/ 묵언(默言)만 남기/신다. 필자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어차피 해탈의 경 지가 말씀에 있지 않을 바에야 구태여 들으려고 마음졸일 필요가 있을 것인 가? 중요한 것은 /마음 귀/를 여는 일 아닐까. 기독교에서 "세밀하게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면 의심 없는 믿음과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려야 함과 상통하는 경지가 아닐까. 경주로 갈 사람은 이 작품 을 읽어야 한다. 특히 에밀레종을 보러 갈 사람은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야 한 다. 가서 마음 귀가 열리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한 차원을 낮추어 천년 전의 그 바람 소리를 듣기까지에도 이르지 못하더라도, 생각 없이 종각 한 바퀴 돌면서 허튼 소리나 내뱉고 돌아서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 버 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 리 강 룡(시조시인, 구미여고교장)
<박필상 제4시조집 '아련한 그리움 하나'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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