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학적 성서해석은 성서에 대한 관념적/신학적 일변도의 해석을 반대한다. 삶과 관계없는 앎이 있을 수 없듯, 실제 세계의 구체적 경험과 무관한 신앙체계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은 '복음'과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사회적 조건이란 이를테면,
부와 빈곤, 사회계층과 사고유형, 역할과 요인, 구조와 기능, 가륻ㅇ과 통합, 사회변화와 적응 등 제반의 사회요소들을 말한다.
예수의 복음은 팔레스티나라는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정황안에서 발생하였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로 엮어진 복음서들도 특정사회안에서 특정한 사회적조건 아래 살아가던 어떤 사람(저자)에 의하여 특정한 사람들(독자)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바오로의 편지 등 신약의 다른 모든 문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회학적 성서해석은 텍스트(본문)와 콘텍스트(사회적환경)의 관계에 관심을 둔다. 신약성서의 특정한 문서로서의 텍스트는 저자와 독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속한 외부세계(사회)의 사회적 조건을 콘텍스트로 하여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이 당시 갈릴래아의 사회적조건과 무관할 수 없듯이 신약성서 각 책들도 그 문서들의 저자 및 독자가 속한 크고 작은 사회 단위 및 그들의 사회적 조건들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요약 발췌)
2.
예수의 선포를 우리는 몇 가지 주요 부분에서 복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많은 그리고 독립적인 예수전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과 로기온자료(Q) 마태와 누가의 특수자료(이것들은 마태와 누가만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뜻한다.)가 그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페리코페'(이것은 각 문단 및 전승 조각을 의미한다)에서 잠재적 독립 전승들을 소유하고 있다. 이 전승들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문학형태, 모티브 그리고 말씀 등은 역사적 예수의 영향일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결과들을, 우리는 계속 늘어가는 당시의 역사적 콘텍스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토대로 검토할 수 있다.
(1) 영향타당성의 기준에 따라,
그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역사적예수의 영향으로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진정성을 갖는다. 독립적인 예수 전승들 사이의 일치점들과 전승들안에 전해진 원시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삶에 모순되는, 반경향적인 유물들이 역사적인 것이다.
(2) 콘텍스트 타당성의 기준에 따라,
하나의 개별적현상으로 당시 역사적 콘텍스트 안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것이 진정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1세기 초반에 갈릴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원시그리스도교의 상상이라기 보다는 유대역사의 생산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교양을 위한 신약성서 요약 발췌)
3.
다음은 김규항 선생님의 예수전 내용중에서 일부요약이다.
텍스트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콘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는 명문이다.
"예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 취급 못 받는 인민들이었다. 예수는 어떤 교조나 논리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바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했고 행동했다. 그들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다시 말해서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하느님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이 예수의 적이다. 여기엔 눈곱만큼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구름 위에, 관념 속에 건설하려 한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그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려고 했다. 그 변화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당연히 정치적 갈등과 불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결국 이 유명한 경구는 (…) 매일처럼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가슴 아픈 위로다."
4.
새기운이 새로운기독교운동을 하며 콘텍스트를 설명하는 까닭은 그 역할을 기존의 제도권 목회자들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래버리면 더 이상 평신도들이 목사들에게 충성하지 않으며 교회재정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순전히 밥그릇의 문제로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목회현장에서는 봉인되고, 그 결과물은 근본도 없는 근본주의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나아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암세포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 이래서는 안된다, 교회개혁 하자,
목소리를 높이는 목회자들이 꽤 있지만 그들의 발언은 어느 정도 한계를 갖는다.
밥그릇 테두리에서 쫒겨나서 광야로 나간 신세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이 몸담고 있는 제도권 자체가 정직해질 수 없는 토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느 목사가 신학대학교 4년 신학대원 2년 엠디비과정이 끝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치자, 본인은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생계문제로 자식은 고등학교만 보내야 할 형편이라면 어떻게 용기있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
차라리 신학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거나 도중에라도 자퇴하고 다른 길을 찾아서 일반인으로 사는 삶이 본인도 편하고 가치있는 길이지, 세월과 돈과 노력을 다 투자해서 보상받지 못하는 위롭고 고단한 삶을 몇 사람이나 원할까?
때문에 제도권 목회자들의 개혁 자체가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한계를 갖는 이유는 명확하며,
기독교바닥 자체가 워낙에 광신도들과 평신도들의 삶이 어떻게 일그러들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 야망가들이 득실거리는 형편이니, 양심적이고 싶더라도 운신에 제한을 받는 것이다.
텍스트만 가지고 숭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콘텍스트와 연계해서 예수의 삶과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새기운이 하는 새로운기독교운동은 기독교계에서 누군가는 꼭 했어야 할 양심의 소리를 전달하는 작업이다.
예수와 삶과 사상을 쫓아서 현장성을 중시해서 노동운동에 매진하며,
이땅의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새기운의 역할이지만,
니케아공의회 이후 형편없이 망가진 기독교의 근간을 다시 세우려고 평신도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
새기운이 기복신앙이 찌들어서 나만 잘 살면 그만인 이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라,
너와 내가 상생하는 공동체주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기운 조직국장 최승현>
새기운 - 새로운 기독교를 여는 운동(http://cafe.daum.net/VoiceOfNew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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