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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
8~12장 |
13~28장 |
중 심 지 |
예루살렘 |
유대, 사마리아 |
안디옥, 땅 끝까지 |
중심지도자 |
베드로 |
베드로/바울 |
바울 |
기타 인물 |
12사도(특히, 요한), 스데반 |
빌립, 고넬료 |
바나바, 실라, 디모데, 아볼로 |
선교 대상 |
유대인 |
이방인에게 옮겨짐 |
온 세상 만민 |
연 대 |
A.D. 30~36 |
A.D. 37~46 |
A.D. 47~66 |
1:1,2 누가복음의 내용: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
1:8 사도행전의 총주제: 사실 본절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의 재천명으로서, 이 같은 일들의 주체가 바로 ‘성령님’이시며, 이 성령님을 통해 ‘권능’을 받은 주의 증인들을 통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확장되어 갈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2:1 오순절과 성령강림일의 일치: 원래 오순절은 처음 익은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절로서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 날에 해당합니다(민9:11).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처형당하셨으며(고전5:7),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후(120문도가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쓴 지 10일 만에)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의 첫 열매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구약의 유월절, 오순절 등의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각각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행2:1)
2:4 성령충만과 성령세례: 성령 충만은 구원에 이르는 단회적인 ‘성령세례’(또는 불 세례)와는 구별됩니다. 즉 ‘성령충만’이 믿는 자 각자가 마음속 깊이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때 매일의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연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은사인 반면, ‘성령세례’는 회개 중생할 때 1회적으로 임하는 체험입니다.
성령세례 |
각 개인에게 단회적(반복적이지 않음)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사로, 이는 곧 중생(거듭남)을 의미함.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 이후에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함.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12:13) |
성령충만 |
믿는 자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반복하여 받는 성령의 특별한 은혜. 이는 구원받은 백성의 영적생활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역사하는 은사로써 ‘생활’(성화)과 ‘봉사’의 두 목적을 가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엡5:18) -현재시제로 계속적인 의미, 성령 충만은 매순간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 |
2:4,11 신약의 오순절 사건과 구약의 바벨탑 사건: 이날 120문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행2:4) ‘하나님의 큰 일’(행2:11)을 말했는데, 이 때의 언어는 소위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아닌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등의 각 언어’(행2:11), 즉 외국어였습니다.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부어주신 꿈과 환상, 예언 등에 사로잡힌 채 말입니다(욜2:28 이하). 한편, 본 사건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약의 바벨탑 사건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의 바벨탑사건 (창11:1~9) |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써 인류를 온 지면으로 흩어버리는 계기가 됨 |
신약의 오순절사건 (행2:1~13) |
복음의 언어로 세계 각국들을 하나로 묶는 분수령이 됨 복음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 |
2:30 다윗도 선지자: 다윗도 선지자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행2:29,30)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부활 등을 미리 보고 예언한 점을 근거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0~32)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지은 많은 시편들 역시 곧 그가 선지자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저작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브라함 역시 선지자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참고로, 히브리 성경의 분류법에 의하면 (보통 선지서로 분류하고 있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를 ‘후기예언서’로, (역사서로 분류되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전기예언서’로 각각 분류되고 있어, 훨씬 더 많은 성경 인물이 선지자로 분류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14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것처럼 주목하지 마세요: 종종 사람들은 이적과 신유 등을 한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리 된 것처럼 주목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그 역시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5)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약5:17)
그렇다면 우리는 누굴 주목해야 합니까? 이 같은 역사를 이루신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도, 여전히 이적과 신유 등을 몇몇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리 된 것 인양 생각하고, 또한 그들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5:3 성령충만과 사탄충만: 성령충만의 반대개념은 무엇일까요? 사탄충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을 얼마 감추었느냐.”(3절) 그는 어떻게 하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까? 자꾸 사탄에게 그 틈을 내어주다가 결국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한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그 소유를 팔아서 전부를 바치지 않아서가 아닌 그 값 중 일부를 감춘 채 마치 전부 바친 것 인양 속이려 들었다는 점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 바나바의 희생적 봉헌과 (이로 인한 교회의) 칭찬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행4:36,37).
5:34 바리새인 가말리엘: 그는 유명한 힐렐(hillel)의 손자로서 오랫동안 율법 문제의 고문격으로 공회에 몸을 담았으며 한때는 산헤드린의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습니다(행22:3).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집니다.
6:1-7 붉어진 구제문제, 그리고 일곱 집사를 택함: 경건한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들이 말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근교에 자기 유골이 묻히도록 예루살렘에 왔었으며, 그중 기독교로 개종한 과부들은 오랜 떠돌이 생활 중에 자기들을 돌보아 줄 친척이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구제에 의존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지만 그들의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 모두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기에는 재정상에 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외에도 예루살렘에는 극빈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하여 구제의 일을 전담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 뽑힌 일곱 집사는 모두 헬라어 이름을 가진 자들로서 ‘헬라파 유대인’의 무리 가운데서 뽑힌 자들이었구요.
7:54~8:2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복음의 확산: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은 선교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안디옥으로, 교회의 성격이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이전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으로, 사실 스데반과 야고보 사도의 순교, 베드로의 투옥 전까지만 해도 복음은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으며, 스데반 집사 순교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8:4~6) /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행11:19~21)
이는 모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가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8:4~40 (전도자) 빌립 집사의 활약: 본문의 빌립은 사도 빌립이 아닌, 행6:5에 열거된 7 집사들 중 두 번째로 언급된 자로서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의 사역은 스데반의 사역과 더불어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교량적 위치에 놓이며, ‘예루살렘’과 ‘땅 끝’을 잇는 전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에 대해 말씀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스데반과 같고, 전도의 열성에 있어서는 마치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랙함).
한편,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하는 등 사마리아 복음 운동을 주도했으며,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이르는 도중에 있는 광야, 즉 텔 엘 하시(Tell-el-Hasy)에서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등 에디오피아 복음운동의 계기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후 빌립은 아소도의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한 후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행8:40). 후일 사도 바울이 3차에 걸친 모든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빌립의 집에 한동안 머물기도 했습니다(행21:8). 한편, 그에게는 딸 넷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처녀로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행21:9).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행21:8,9절)
9:1~31 사울의 회심: 누가는 본서에 바울의 회심에 관한 사건의 내용을 세 번 기록하고 있는데(9장, 22장, 26장), 이는 바울의 활약으로 인해 비로소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등 교회사 내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심히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는 길리기아의 고도(古都) 다소 출신인데, 다소는 주전 1세기경 헬라 철학의 본고장으로 동서양의 합류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헬라 철학과 로마의 세계관이 동방의 신비주의와 조우했던 곳으로서, 이곳에서 자라난 바울 역시 정교한 반어법(고전1~4장 등), 혹은 명확한 논리 체계 등 헬라 교육을 받은 흔적들이 역력합니다.
또한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엄격한 히브리어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 유대인으로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행22:25). 따라서 바울의 극적 회심은 이방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10:1~11:18 고넬료 회심사건과 복음의 확산: 고넬료 회심은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세계로 확산되는 획기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이는 바울의 회심과 더불어 기독교의 세계적 확산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출신이나 성품상으로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운 유대인은 아니었으며 복음의 범세계적인 성격에 관해서도 점점 눈을 떠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인 이방선교의 자세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자기 환상’이라는 특별한 계시로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자 하셨는데, 이 유대주의적인 사고야말로 이방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행10:9~16).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가니라.”(행10:15,16)
참고로, 당시 유대인들은 신명기 7:3,4의 규례, 즉 우상숭배의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신 율법으로서, 가나안 족속과의 혼인 및 교제를 금지한 규례를 오해하여 모든 이방인들과의 일상적인 교제까지도 죄악시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소위 경건하다는 유대인들은 동석을 물론 심지어 이방인들의 산물조차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10:2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특정한 편견과 고정관점 속에 갇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미적미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나다나엘(바돌로매)나 아람 장군 나아만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5~46)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5:10,11)
10:44~46 가이사랴의 오순절 사건: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라는 베드로의 이 말로 보아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서 아마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다시 한 번 재현된 것 같습니다(이방인 선교의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4~46)
11: 19~26 안디옥교회의 태동: 스데반의 순교 사건으로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서 일부가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 구브로와 구레네 몇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 안디옥 교회의 태동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는 이후 전개될 바울의 전도사역이 이곳 안디옥을 거점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20절)
한편, 안디옥 교회의 초대 목회자인 바나바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행4:36). 그는 이방 선교 사역에 남다른 열의를 보인 인물로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질 정도로 헌신적이며(행4:37)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일찍이 발견, 그를 변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행9:27), 거의 10년간 길리기아 다소에서 머물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초청하여 그곳에서 함께 목회함은 물론 이방 선교에 앞장 세웠던 인물입니다.
참고로, 당시의 안디옥은 동서의 다양한 문화가 교차되는 곳으로, 전체 인구 50만 명의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며, 궤변 철학 등의 학문과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 곳일 뿐만 아니라 퇴폐의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아무튼 안디옥은 이방선교의 발상지이자 거점으로, 성도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으로 일컬어진 곳도(11:26), 할례 문제에 대한 논란이 처음으로 야기된 것도 바로 이곳 안디옥이었던 것입니다(행15:1,2; 갈2:11~21).
11:2 할례자들(할례당):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교한 자들로, 모세의 율법에도 충실하여 할례 의식을 비롯하여 기타 정결의식 등을 잘 준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적인 여러 의식을 거치고 준수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나름대로의 강한 우월 의식 및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할례자들)의 이 같은 비난에 대해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만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해 줌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불식시켰던 것입니다(행11:4~17). 참고로, 여기서 ‘설명하여’(헬, 엨세티테토)라는 말은 ‘입 밖으로 끄집어내다 바깥에 두다’의 뜻으로 곧 차례대로 신중히 또한 자세히 말했다는 뜻입니다.
11:18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가 내린 결론: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8절) 즉 예루살렘 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13:1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 바나바와 시므온,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사울 등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한편, 선지자와 교사는 초대 교회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두 직책으로, 선지자의 경우 예언의 능력(행11:27)은 물론,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적인 일도 감당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11:27) /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행15:30)
참고로, 교회의 직분의 종류에 대해서 신약은 목사, 감독, 교사, 장로, 집사 등 기본적인 것들만 제시하고 있습니다(물론 사도와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직분에 불과함).
선지자는 구약시대에서 왕, 제사장과 더불어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3대 직분 중 하나. 이들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 말해주는 역할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리스도 이후 다만 영감이 뛰어난 자들로서 교회 내 어떤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거나 혹은 성경을 해석해 주는 사역을 담당하는 정도에 그 역할이 축소 내지 변경되었던 것입니다(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구별됨). 교회 시대에 와서는 설교자가 선지자의 후신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설교 역시 구약 시대의 예언의 성격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12:28)
직분자의 자세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첫째, 성도를 온전케 해야 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이는 곧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수리하듯 성도들의 연약한 부분들을 찾아서 돕고 잘못되거나 그릇되기 쉬운 것들을 바로잡아 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역들이 끝까지 완성되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온 교회의 구성원들(자신을 포함해서)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주어진 은사와 재능대로, 각각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해야 하는 것이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부러진 뼈를 이끌고서, 찢어진 그물을 가지고서 막무가내로 봉사에 투입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러진 뼈를 맞추는 일이, 찢어진 그물을 수선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 각자의 특별한 직분을 사용해 교회를 성장시키고 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켜나가야 합니다.
13:2 선교여행의 시작: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셨던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절)
‘성령이 이르시되’: 바나바와 사울의 전도 여행이 ‘성령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요컨대 선교란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독자적으로 하는 일이 결코 될 수 없으며, 다만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당연히 성령님이시며, 인간은 단지 그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따로 세우라’: 세계 선교가 이웃과 주변에 대한 지엽적인 전도 방법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며, 별도의 선교사를 파송이 필요함을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주님과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어떻게 하면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구했고, 성령님으로부터 뜻밖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잘 섬길 수 있을까 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8)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당시 유대인들은 대개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예, 게바와 베드로, 도마와 디두모 등), 동족 사이에서는 히브리식의 이름을, 외부에서는 헬라식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누가는 행13:13부터 ‘사울’ 대신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함인 듯합니다.
13:4~26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행선지] 수리아 안디옥 - 구브로 - 밤빌리아 버가 -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더베 - 루스드라 -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 밤빌리아 버가 - 앗달리아 -안디옥 |
1. 구브로(행13:4~12) 두 사도는 첫 행선지로 지중해 동북방에 위치하였으며, 안디옥에서 서남으로 마주 보는 지점에 있었던 ‘구브로 섬’을 택했는데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또 바나바의 출신지이기도 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행4:36) 한편, 첫 행선지 구브로에서는 복음과 무속의 대결이 긴장감 있게 전개되었으나 결국 복음이 승리했다. |
2. 버가(행13:13) 버가에서의 전도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이는 마가 요한과 바울 간의 불화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 |
3. 비시디아 안디옥(행13:14~50)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결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등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다. 한편, 회당에서 성경을 읽는 습관(행13:15)은 바벨론 포로 후부터였으며, 예배를 위하여 낭독자나 설교자를 선택하는 일은 회당장의 임무였다. 그리고 회당 예배 순서는 1)쉐마(신6:4~9)합창 2)공중 기도 3)율법과 선지서 낭독 4)설교 5)축복의 선 순이었다. |
4. 이고니온(행14:1~6) 복음 전파의 결과 유다와 헬라의 많은 무리가 복음을 믿게 되었다. |
5. 루스드라(행14:8~19) 바울은 이곳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으며 이것을 본 루스드라 주민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떠받드려 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이후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해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
6. 더베(행14:20)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
7. 귀환길(행14:26): 되돌아오면서 각 지역의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했다. 루스드라→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밤빌리아→버가→앗달리아→수리아 안디옥 |
13:5 바울의 초기 선교의 중심 ‘유대인의 여러 회당’: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5절) 바울과 바나바는 늘 유대인들로부터 경계와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 대상에서 유대인들을 제외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그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전도 방침 중 하나는 ‘먼저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그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방침은 그의 전도 여행 기간 내내 줄곧 지켜졌습니다. 이는 바울이 인지상정 상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13:5 수행원 마가 요한: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 때 마가 요한을 그 수행원으로 두었으나, 그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후일 그를 동행시키는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어 갈라서기도 했음. 즉,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사이프러스 섬, Cyprus)로 향했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15:36~41).
한편, 여기서 ‘수행원’(수종자, 헬 휘페레텐)의 본래 의미는 ‘배 밑창에서 노 젓는 자’란 뜻으로 오늘날 ‘조수’란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진정한 조력, 동역이란 나의 이름이, 명성이 드러나지 않아도,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자신의 소임을 감당하는 것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동역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의미와 어떤 점이 비슷하고 또 어떤 점이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까?
15장 예루살렘 회의 및 그 결과: 할례 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처음으로 개최된 예루살렘 회의(총회)는 초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즉, 율법 엄수를 주장하는 자들의 폐쇄적인 태도를 물리치고,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자각하여 그들을 한 형제로 영접한다고 하는 내용의 결의를 공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 이와 같은 회의의 결과를 전하게 하였는데, 이중 실라는 안디옥 교회에 남아 (바나바 대신)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합류하게 됩니다.
15:13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 당시 주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존경받았으며, 본 회의의 의장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후일 ‘야고보서’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소위 ‘낙타무릎의 소유자’로 불릴 정도로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노라.”(갈1:1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갈2:9)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약1:1)
15:40~18:22 제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의 인정을 받은 바울 일행은 안디옥으로 돌아와 새로운 전도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의 싹을 뿌렸던 지역들(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방문하면서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15:36,40,41)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9~10)을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바울을 인도하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약 3년간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 등지에 이르는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10)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습니다. 이 같은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마게도냐(마케도니아, Macedonia) 환상일 것입니다.
[행선지] 수리아 안디옥 -길리기아 - 더베, 루스드라 - 브루기아 - 갈라디아 - 무시아 앞 - 비두니아 -드로아 - 빌립보 - 데살로니가 - 베뢰아 - 아덴 - 고린도 - 겐그레아 - 에베소 - 가이사랴 - 안디옥 |
[아시아를 그대로 통과하다] 수리아 -길리기아 - 더베, 루스드라 - 브루기아 - 갈라디아 - 무시아 앞 - 비두니아 -드로아 |
1. 빌립보(행16:12~40) 바울은 이곳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 등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편, 마게도냐 지경의 수도가 데살로니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빌립보를 ‘첫 성’(첫째가는 성)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B.C. 42년경 발발한 빌립보 전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아구스도는 부루터스와 씨저를 무찌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황제는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로 승격시켜 황제 직속에 두었고 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직업 군인들을 빌립보에 이주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빌립보는 바다와 육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상 요충지이자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세계적 명성을 지녔던 의학교육 기관이 소재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혹자는 드로아의 환상 속 마게도냐인이 바로 누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2. 데살로니가(행17:1~9) 3주 동안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의 난동으로 바울 일행은 서둘러 베레아로 이동했다. |
3. 베뢰아(행17:10~15) 역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주의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무리들이 따르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
4. 아덴(행17:16~34) 회당과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했으며,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주의 복음을 전함.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등이 믿었다. |
5. 고린도(행18:1~17) 로마에서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동업을 하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비방하자,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감.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이 주를 믿게 됨.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
6. 겐그레아(행18:18) 바울이 일찍이 서원한 바가 있어 그곳에서 머리를 깎았다. |
7. 에베소(행18:19~21)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함.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떠났다. |
[귀환길] 가이사랴 - 안디옥 |
15:39 ‘심히 다투어’(헬, 파롴쉬스모스): 이 단어의 기본 동사 ‘파롴시노’는 ‘날카롭게 하다’란 뜻으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날카로운 감정의 대립, 즉 다툼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두 사람은 1차 전도여행 당시 중도에서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가 요한을 동행시키는 문제로 서로 심히 다투었으며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영원히 서로를 등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바나바와 마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15:39,40)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갈2: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이 두 사람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복음 증거에 유익을 끼쳤습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사역자(실라, 디모데, 누가 등)가 늘어났고 복음전도 구역도 더욱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역자의 인간적인 여러 실수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15:40; 16:1~3; 16:11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에 동참한 사람들: 실라와 디모데, 누가 등입니다. 먼저,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으로 2차 전도여행 때 바울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모친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도움으로 어려서부터 성경에 익숙하였으며(딤후1:5;3:15),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행14:6~20)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장차 바울의 뒤를 이어 복음 사역에 있어서 큰 몫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한 실라(실루아노, 데전1:1)는 예루살렘교회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선지자이자 로마의 시민권자(행16:37)였습니다. 예루살렘총회의 결의를 전달하고자 유다와 함께 안디옥교회에 올라갔다가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리더라.”(행15:22하)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행15:32~35)
끝으로, 누가(행16:11)는 아마도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에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바울의 주치의로 그와 마지막까지 동행한 인물이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한편, 바울의 빌립보 방문과 관계있는 부분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된 점으로 보아 누가가 빌립보 전도에 어느 정도 일익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 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행16:11)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16:6,7 바울의 선교여행이 성령에 의해서 주도되다: 바울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로마의 대로를 따라 중요한 해안 도시였던 에베소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습니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비두니아 지역으로 북상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역시 제지당했으며 결국 드로아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번번이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전도여행이 바울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번번이 우리 자신의 계획과 생각들에 의해 좌절되고 있습니까?
‘성령’(6절), ‘예수의 영’(7절), ‘하나님’(10절)은 선교의 주체가 바울과 그의 일행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6,7절)
16:13,14,40 루디아: 루디아는 고향 두아디라에서 경건한 유대인의 교육을 받은 듯하며 사업 확장 차 빌립보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빌립보 사역은 그녀의 회심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녀의 집 역시 초기 빌립보 전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16:13,14)
‘강가’(13절): 유대인의 규례 상 규칙적으로 모일 수 있는 남자의 수가 10명만 되면 회당을 구성할 수 있었으나 10명 미만일 경우 강가나 바다 근처에 기도와 회합 장소를 마련하곤 했습니다. 빌립보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 적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16:15): 그녀는 영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감격하는 것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더욱 장성한 신앙인으로 나아가길 힘썼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루디아와 같은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8:23~21:16 제3차 전도여행:
[행선지] 수리아 안디옥 - 갈라디아 - 브루기아 - 에베소 - 마게도냐 - 헬라 - 빌립보 - 드로아 - 앗소 - 미둘레네 - 기오 앞 - 사모 - 밀레도 - 고스 - 로도 - 바다라 - 두로 - 돌레마이 -가이사랴 - 예루살렘 |
1. 에베소 (소아시아의 중심지)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에 잠간 들렀으며, 거기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 바 있습니다(행18:21), 그래서인지 제3차 전도여행 중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에베소 지방의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무려 3년간(주후 53~56년경) 머물면서 교회를 굳건하게 세워나갔으며(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 두란노서원에서 2년) 이 기간 동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고린도전서). 에베소 사람들은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아 요한의 세례만을 믿고 있었으나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자 그들에게도 역시 성령이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로마와 동양을 잇는 항구로서 교통, 문화, 무역의 중심을 이루었던 곳으로 각종 종교와 비신의 집산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권능의 기사를 전함으로써 미신을 타파하고 교회를 굳건하게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
2. 마게도냐와 아가야 재방문(행20:1~6) 바울 일행은 에베소 은장색들의 소동으로 인해 괴로운 심경으로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귀환할 때까지의 약 10개월 동안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재방문했습니다. 이때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마게도냐는 발칸반도의 관문이자 데살로니가를 수도로 한 로마의 속주입니다. 빌립보, 베뢰아 등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아가야(헬라) 역시 고린도를 수도로 한 로마의 속주로 아덴, 겐그레아, 스파르타, 델피 등이 속해 있습니다. 이같이 로마는 그리스를 북쪽의 마게도냐와 남쪽의 아가야 두 속주로 나누어 통치했던 것입니다. |
3. 드로아(행20:7~12) -7일간 머물며 말씀 강론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재방문한 바울은 드로아로 돌아와 머무는 일주일 동안 말씀을 강론했으며 마지막 날은 밤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그만 창틀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다시 그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일명 유두고 소생 사건 말입니다. 바울은 이곳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약 40km 되는 해안도로를 따라 혼자서 도보로 걸어갔습니다. 아마도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혼자 있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것은 문제 해결의 최단 지름길일 것입니다. 이후 다시 앗소에서 일행과 합류해 배로 미둘레네, 기오 앞, 사모를 지나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
4. 밀레도(행20:17~38)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과 행위를 돌아보며 신앙적 교훈을 전했습니다(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45km로 왕복 3일이 걸림). 고별설교라 함은 바울은 ‘성령에 매여’(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데 그가 가는 각 성에서 마다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이 친히 증언했기 때문입니다(행20:22,23).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
5. 두로(행21:1~6)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베니게(페니키아) 두로에 도착해 7일 동안 거기서 머물렀습니다. 두로의 제자들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제자들이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21:4) 한편, 두로(Tyres)는 베니게에 있던 가장 유명한 고대 성읍으로 지중해의 동안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땅에서 멀지 않은 시돈의 남쪽 32㎞ 지점에 있었습니다. 원래는 본토에서 떨어진 암석만으로 된 작은 섬이었으나 BC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여기를 포위했을 때 그가 약 800m에 이르게 바다 속으로 제방을 쌓음으로써 반도처럼 되었다. |
6. 가이사랴(행21:8~14) 바울은 두로에서 육로로 둘레마이에 이르러 하루 동안 머물고 다시 떠나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 ‘전도자 빌립’(7집사 중 한명)의 집에 머무르던 중 선지자 아가보가 도착,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지만, 바울의 예루살렘 행에 대한 결심은 변치 않았습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0,11,13) 한편, 가이사랴는 팔레스타인의 해안 도시로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위치하며 백부장 고넬료와 집사 빌립의 거주지이기도 했습니다(행10:1, 21:8). 얼마 뒤 바울이 예루살렘 소요 중에서 이곳에 이르러 2년간 구금되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행18:22, 21:8, 23:23-33, 24:27, 25:11, 26:1). 가이사랴는 주전 4세기에 시돈의 통치자였던 스트라토가 처음 설립한 도시로 '스트라토의 망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헤롯대왕(주전37년-주전4년)이 이곳에 인공적인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로마황제를 위하여 '가이사랴(Caesare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렀는데 가이사랴는 약 12년간의 공사 끝에 주전 13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헤롯이 이렇게 큰 항구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19:9 두란노서원: 이곳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두란노라는 이름의 부호가 순회 강연자들에게 제공한 강연 장소였거나, 혹은 두란노라는 저명한 철학자, 또는 수사학자가 철학을 강론한 강의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은 일찍이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자들 덕 뿐에(행18:19) 3개월간 유대인의 회당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방하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두란노 서원으로 그 장소를 옮겨 무려 2년간 그곳에서 사역을 진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서방 사본(Western Text)에 의하면 바울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 서원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시간은 대개 무더위를 피해 쉬는 때였습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자신의 생계를 해결함과 동시에 쉬는 시간을 이용,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행20:31,34,35)
22:1~26:32 바울의 계속되는 증언 및 변론
예루살렘 도착(21:17) → 야고보와의 접견(21:8) → 결례 시작(21:26) → 약4,5일간 결례를 지키는 도중 붙잡힘(행21:27) |
1. 백성들 앞에서의 변명(행22:1~21) 자신을 죽이려던 유대 백성들을 향해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만든 다메섹 도상에서의 이적적 체험 등 자신의 부르심을 변명하다. |
2. 공회 앞에서의 증언(행22:30~23:10)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1절) “...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 등의 험악한 반응으로 인해 자신의 변증이 묵살 당하자, 공회원들의 일부는 사두개인,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을 알고, 공회원들 간의 분란을 조성함으로써 그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바울을 죽이려는 간계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기아사랴로 이송되다(23:12~35). |
3.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증언(행24:10~21). 2년간 가이사랴에서의 수감생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변호사 더불로와 함께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자, 이에 바울은 자신이 로마제국에 대해 그 어떤 반란도 기도한 적이 없으며, 혹 잘못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것 밖에는 없으며, 이는 교리상의 문제이지 법정에서 제기될 문제가 아님을 의연히 주장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무죄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임기를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는 속셈과 뇌물에 대한 욕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구금시켰다. 그러나 바울은 약 2년간 가이사라에서 구금된 상태에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복음을 증거 했다. |
4.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증언, 가이사에게 상소함(행25:1~12)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함과 더불어 유대 지도자들은 또다시 바울 살해 음모에 몰두했다. 그들은 사실상 로마 법정에서 바울을 처형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어떻게 해서든지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유도해 내고자 했으나, 총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기아사랴 법정에서 또 다시 재판이 열리게 되었으나 베스도는 바울에게서 이렇다 할 죄목을 찾지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베스도 앞에서도 역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며 그의 무죄함을 입증하기 위해 변명했는데, 누가가 벨릭스 앞에서의 변호(24:10-21)와 중첩시키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5.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의 증언(행26:1~29)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하게 된다. 주님께서 그가 왕 앞에서도 주의 복음을 증거 하게 될 것이라고 앞서 예언하신 바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결국 바울의 기탄없고 진진한 변증적 설교 앞에서 베스도와 아그립바, 거기에 동석한 회중들이 모두 압도되자, 당황한 베스도는 일단 바울을 미친 자로 단정하고서 황급히 심문을 끝마쳤다. 이로써 바울은 2년간에 걸친 구금 생활을 마치고 (비록 죄수의 몸이긴 하지만) 복음을 들고 로마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26:30~32 바울이 로마로 가기까지의 과정
1.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 즉 이방인의 사도(롬11:13)로 택하셨고 그가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 실제로 그는 로마제국 내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이방인들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종국에는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까지 이르러 거기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
2.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로마 선교의 꿈을 피력하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롬15:22~24)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롬15:28)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도중 자신의 마지막 선교계획을 밝힌 대목입니다. 바울의 로마방문이 오래 전부터 계획된 바 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막혔다는 점과 당시 사람들이 땅 끝이라고 생각하던 스페인(서바나, 로마제국의 서쪽 끝) 선교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선교여행을 떠나는 길에 꼭 로마를 들를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참고로 로마서의 기록연대는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 고린도에서 머물던 3개월 기간 내). |
3. 하나님께서 그의 로마행을 확증하고 격려하시다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 증언한 후)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제3차 전도여행까지 무사히 마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후 곧바로 로마 본토로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예루살렘에서의 상황이 절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그의 심경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에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나약하진 바울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격려는 바울로 하여금 이후 2년 어간에 걸친 로마 전도여행에서 비록 많은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불안을 극복하고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
4. 바울이 가이사 앞에 상소하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행25:10~11) 당시 바울의 대적들은 신임 총독의 호의와 미숙함을 이용,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끌어들여 그곳에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바울도 이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줄 알고 로마시민권자로서 차라리 로마 황제에게 항소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지방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요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지방 관청은 그 사람을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직결을 받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또 해당 사건의 전말과 그의 죄목을 기록한 서류를 함께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그 당시 황제는 네로(54~68년)였는데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rus) 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
5. 로마로 가는 도중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다. ‘금식하는 절기’(9절)는 디스리 월(태양력으로 9~10월 경) 10일에 지켜졌던 속죄일을 의미합니다(민29:7~11). 9월 중순 경 이후에 지중해 해역을 항해하는 것은 위험스러웠으며, 11월 11일 이후에는 아예 항해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베게티우스). 바울은 여행의 경험이 풍부했고 더군다나 세 번씩이나 파선의 경험이 있었으므로(고후11:25) 늦가을에 역풍을 무릅쓰고 행선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지 단순히 기우로 경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곱째 달 열흘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의 심령을 괴롭게 하며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니라.”(민29:7)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11:25)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행27:21) 비록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려는 신앙을 지녔으나 맹목적이고 무의지적으로 만사를 하나님께만 맡겨 버리고 자신은 방관만 하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 쓰시되 기계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품이나 의지 및 재능이나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십니다. 한편, ‘유라굴로’(14절)는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와 북동쪽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합니다. 이 바람은 처음의 남풍이 부근 그레데 이다(Ida) 산맥의 영향으로 반대 기류와 충동하면서 갑자가 생기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태풍입니다.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 태풍으로 인해 밤낮 14일간, 그리고 미항에서부터 멜리데 섬까지 약 800km를 표류했던 것입니다. 또한, ‘스르디스’(17절)는 그레데 서남방에 있는 모래톱을 가리킵니다. ‘그레데’(크레타 섬, Creta)는 지중해 동부, 에게 해 남쪽 끝에 있는 섬으로 고대 크레타 문명의 중심입니다. 면적은 8,331㎢이며 현재는 그리스 령입니다. |
6. 풍랑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여러 날 동안 큰 풍랑 속에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아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바울을 위로하셨고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며 그의 사명을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사명자는 주님이 맡겨주신 그 사명을 이룰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맡은 사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또 그 배 위에는 276인 중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바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풍랑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들을 헤쳐 나갈 답을 알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입니다. ‘권하노니 ...안심하라’(22절)는 헬라어로 ‘파라이노...유뒤메인’으로 둘 다 의학 술어로 의사가 환자를 격려할 때 쓰는 말입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15:26하) ‘멜리데’(행28:1)는 한때 카르타고의 점령지였으며, 바울 당시에 그 주민들은 대개 카르타고어를 사용했습니다. |
24:24~28:31 바울의 가이사랴 수감 및 로마로의 이송: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행을 감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을 여러 차례 죽이려 했으나 바울이 로마 선교를 위해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받기를 청함에 따라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로마 전도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선지 및 일정] 예루살렘 -가이사랴에서의 2년여 동안 수감생활-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행 시작 - 시돈 - 무라 - 니도 맞은 편 - 그레데의 미항 -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 - 아드리아 바다 - 멜리데 - 수라구사 - 레기온 - 보디올 -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삼관) - 로마에서 2년 동안 자택연금생활 |
[동행했던 사람들] 누가, 아리스다고 이들은 각각 의사와 시중드는 자의 자격으로 승선자 명단에 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
28:16~31 로마에서의 증거 사역
1. 바울이 로마에서 전하고 강론한 말씀은? 하나님 나라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였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3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30:30~31) 사도 바울이 로마에 이르러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나 복음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의 대적들로부터 어느 정도 연락을 받아 바울에 대한 강한 편견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르며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매인 이유와 항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 등에 관해서 먼저 그들에게 충분히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증거와 권면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두 가지 핵심적인 주제를 띠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지상 사역의 대부분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데에 할당하셨으며 부활 후 40일 동안 머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을 통해 이 땅에 시작되었고 다시 오심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한편, 바울의 투옥과 쇠사슬은 형벌로서가 아니라 재판 때까지의 구류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년이 지난 후에도 아무 고소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바울을 고소하는 내용도 보내오지 않으면서 바울은 자동적으로 놓이게 되었습니다(초대교회의 문헌들에 의하면 바울은 이 시기에 서바나(스페인)에까지 전도여행을 다녀왔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바울은 후에 다시 체포되었고 황제 네로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절) |
2. 바울의 강론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그 결과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로 나뉘어 서로 맞지 않아서 흩어짐(어떤 사본에는 29절 ‘그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쟁론을 하며 물러가더라.’가 있음).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믿지 아니하자 바울은 선교대상을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로 옮기게 됨.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는 바울의 선교 정책은 로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4,25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28절) |
3. 바울이 로마의 자기 셋집에서 몇 년 동안 가르쳤는가? 바울은 2년(이태) 동안 자신의 셋집에서 기회 되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30절) 추측컨대, 바울은 61년 중순경에 로마에 도착, 약 2년 동안 구류 형식으로 파수병과 함께 셋집에 머물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전도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이 이 때 저술되었으며, 이 무렵 디모데(빌1:1;골1:1), 두기고(6:21), 에바브로(빌4:18) 등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그 후 2년이 넘도록 기소되지 않자, 바울은 자동적으로 구류 상태에서 풀려났으며, 석방 후에 에베소와 마게도냐(딤전1:3), 드로아(딤후4:13), 그레데(딛1:5) 그리고 니고볼리(딛3:12) 등으로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이 기간 중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후 67년경 네로의 명령을 참수 당했다고 전해진다. 다시 투옥 된 후 외롭고 황량한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기록한 것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
4. 로마 선교 초기의 바울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절) 누가는 바울의 옥중생활이나 그 이후의 생애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본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이는 누가가 본서를 통해 바울의 전기를 소개하기보다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의 그 과정을 기술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관련 설교모음>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5:34~39)
*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으려니와....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5:39)
본문이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는 초기 기독교에 관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제자들을 통해서 확산되어가고 있는 기독교가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언젠가 무너지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결코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비전’과 그렇지 않고 사람으로부터 나는 ‘야망’에 대하여 뜻 깊은 교훈 역시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주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활약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자, 이를 우려한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을 투옥시켰으나, 주의 사자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어 다시 성전에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등 드라마틱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본문은 유대의 존경받는 교법사 가말리엘이 극도로 흥분한 채 사도들을 없애기에 혈안이 된 대제사장과 그 일파, 즉 사두개인의 당파를 저지시키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8,39절)
즉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한마디로, 이 사상과 소행(기독교)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나,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결코 무너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편의상 우리는 전자를 ‘야망’, 후자를 ‘비전’이라고 명명하기로 합시다. 이 둘을 어찌 구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일 한 꿈이 그것을 품었던 사람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한다면 이는 야망, 그렇지 않고 그 사람과 운명을 달리한다면(훨씬 더 지속된다면) 이는 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무슨 말입니까? 만일 한 꿈이 그것을 품은 사람의 사후에까지 지속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간다면 이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임이 분명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면 이는 사람에게서 난 일장춘몽, 즉 ‘야망’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결코 멈추지 않고 또한 멈출 수도 없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릴 무지개 같은 것들을 쫓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이왕에 사는 인생, 안개와 같이 정함이 없고, 또한 이내 사라질 그런 야망보다는 결코 무너지거나 멈추지 않는 그 비전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시렵니까?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 예수님의 비전은 십자가상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으나, 오히려 2천년의 온갖 박해와 수난 속에서도 멸절되지 않은 것은 물론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 열매 중 일부가 바로 우리들임이 분명하구요.
*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행5:36~37)
끝으로, 우리는 본문 속 드다와 유다의 경우를 통해 다시금 참된 비전의 중요성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드다와 유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먼저, 그들은 생전에 수많은 무리가 그들을 추종했고 따랐던 점으로 보아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러나 그들은 한 결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그가 죽임을 당하매...그도 망한즉....”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 역시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무슨 이유에서였습니까?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난 꿈들을 꾸던 자들이었기에, 일시적으로는 흥왕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꿈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들은 뿌리 없는 식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드다나 갈릴리 유다의 경우처럼 사람으로부터 난 꿈을 쫓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선진들처럼 헛된 야망을 붙든 채 그리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 꾸고 있는 이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인지 신중하게 살펴보십시오. 또한 그 꿈에 대하여 너무 성급하게 단정 짓거나 어찌 하려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너희가 ...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35절)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일정기간 관망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잠시 동안 이 꿈에 대하여 상관 말고 버려두는 용기를 발휘하시라는 말입니다. “...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38절). 그리하여 만일 이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이 (정황상) 명확해지거든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이 그 꿈을 붙든 채 달려가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난 꿈은 결코 무너뜨릴 수도, 무너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한 채로 말입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 하였듯 말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7:20~36)
* 모세는 호렙산으로 오기 40년 전에 이미 자신이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행 7:25)
대부분 모세의 소명의 출발점을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 섰을 때(출 3장)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집사 스데반은 모세가 이미 호렙산으로 오기 40년 전부터 이미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흔히들 호렙산 이전의 40 년을 실패의 시간 또는 잃어버린 시간으로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좀 더 배려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준비기간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를 가지고서는 부족합니다.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 15절까지의 의미를 더 밝혀주어야만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러한 점에서 출 2장 11절~ 15절의 의미를 더 자세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소명기사를 다루기 충분히 다루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설교 또한 다루어져야 합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나이 40이 되던 해의 사건을 모세의 소명에 있어서 그 출발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나이 사십이 되기까지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친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의 출신과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의 믿음의 역사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출애굽에 관한 조상들의 예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나이 40이 되던 해에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말입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행 7:25 상)
그는 호렙산에 이르기 40여 년 전부터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전혀 자신의 소명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호렙산에 가서야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는 주장이 못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물에서 건져내어 주신 목적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서 애굽의 궁중에서 바로의 왕자들과 함께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우게 하셨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이 일에 적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러나 그는 그 소명을 어찌 이루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행 7:24)
그러나 자신의 소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선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 하시려는 지, 그리고 자신이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너무 급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자기 나름대로 소명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구상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인 쿠데타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소명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너무 성급했고 너무 무모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행 7:23,24)
한 마디로 모세는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부분적으로만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사도 바울은 신구약을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소명 원리를 보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약시대나 구약시대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막무가내로 하지 않으시고, 먼저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호렙산에서 모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40년 전에 모세로 하여금 소원을 갖게 하시고 그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시고자 호렙산에서 소명하셨던 것입니다.
* 출 2:11절 이하가 없으면 출 3장도 존재 하지 않는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출2:11)
출 2장 11절 이하가 없다면, 출 3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출 3장만을 가지고 모세의 소명을 전부 말한 것처럼 말합니다. 분명히 출 3장 호렙산에서의 소명은 출 2장 11절 이하의 모세의 소명의 재확인이요 재천명이라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이라는 기간의 의미를 제대로 조명할 수가 없습니다. 출 2장 11절 이하가 살아나야 비로소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이 의미를 제대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모세가 40세가 되던 해의 사건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저희(이스라엘 자손)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년 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행 7:35,36)
호렙산의 사건의 의의는 40년 전에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라고 이스라엘 지손에 의해 거절당한 모세의 소명을 재확인해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던 해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과 자신의 소명을 인정해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 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하니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행 7:26~29)
모세가 두려워 한 것은 바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소명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고 스데반 집사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라는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로 왕을 두려워해서 도주하였기도 했겠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도주 이유는 그의 소명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의 인정치 않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때 자신의 소명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힘을 같이 했다면 아마도 바로 왕에 맞서 출애굽을 강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가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을 할 때’(행 7:23) 이러한 부분도 생각해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무 일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 빨랐던 것입니다. 모세가 더 인내하면서 애굽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면, 아마도 출 2장 11절 이하는 새롭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40년이 더 차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먼저 모세 자신이 더 자신의 소명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고, 이스라엘 백성도 더 준비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 ‘되매’와 ‘차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사십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행 7:23,30)
스데반의 설교에서 중요한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이 사십이 ‘되매’(7:23)와 다른 하나는 사십년이 ‘차매’(7: 30)입니다. 모세는 나이 사십이면 어느 정도 자신의 소명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되었다고 생각했어나 봅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도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건장하며 웅변을 잘하는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대의도 분명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40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십년이 차매’ 드디어 행동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아직 덜 준비되었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지라(9:1~9)
*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9:8,9)
사울(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사건 직후 실명하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구적이 아닌 일시적인 실명(失明)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9절) 결국 그는 동행하던 일행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8절 하)
헌데 주님은 사울(바울)의 눈을 멀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딱 사흘 동안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교훈코자 하셨던 것은 아닐까요?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
마치 주님께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써 지금껏 그가 영적 절름발이었음을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32:25,31)
필시 사울(바울)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그가 무언가를 깨닫길 원하셨으며, 자신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상기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의 영적 장님 됨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사울 자신이 여태껏 영적 맹인이었음을 깨닫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사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까지 사울(바울)은 전혀 자신이 영적 맹인임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꿈에서조차 말입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서 오히려 ‘볼 줄 안다고 하는 교만함에’ 빠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사울처럼,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볼 줄 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야곱처럼, 자꾸만 기우뚱 거릴 수밖에 없는 영적 절름발이임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걷고 있는 착각 속에서 살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 ..... 다시 보게 된지라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18,19절)
주의 제자 아나니아가 주의 명을 좇아 사울(바울)에게 안수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비늘’(헬, 레피스)이란 ‘껍질을 벗기다’란 뜻의 ‘레포’에서 유래된 말로서, 의학적으로는 ‘균열된 피부 조각들’을 의미합니다. 즉 그가 다시 보게 될 때 눈에 덮여 있던 피부조각들이 실제로 떨어져나갔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헌데 이 같이 ‘비늘’은 결국 무엇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까? 그의 (영적) 맹인 됨입니다. 물론 사울(바울)의 눈에 이 같은 비 늘이 덮여 있었던 것은 불과 사흘 동안이지만(행9:9), 영적으로 보면 출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결 같이 덮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같은 그의 두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누굴 통하여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9:3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울의 경우처럼) 우리의 두 눈에서 (보이지 않는) 비늘, 즉 불신앙 또는 무지 등의 비늘이 벗겨져 있습니까? 혹 아니면 여전히 우리의 두 눈을 가리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이와 같은 것들이 벗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영적으로 맹인이며, 장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말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이는 고린도후서에서 여전히 그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으로 비유되기도 함)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3:14,1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눈 뜨기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영안이 열리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어찌해야 합니까? 매일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 앞으로 가까이 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라야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영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이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3:1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자를 찾고 또 찾으신다(행13:1~3; 10:1~16)
* 하나님은 찾고 또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은 찾고 또 찾으십니다. 어떤 사람을 말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 즉 참된 예배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예배자입니까? 이는 신약적 표현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이며(요4:23), 구약적 표현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창5:26; 12:8; 13:4 등),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잠8:17) 등입니다.
“...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하)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8 하)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자를 찾고 또 찾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 즉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찾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하나님 역시 (간절히) 찾고 계시다는 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또 찾고 있느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또한 간절히 찾고 계시다는 점을 말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잠8:17).
* 하나님은 늘 예배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되 특별히 예배자를 들어 그리 하셨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보아 알 수 있듯 말입니다. 바울의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은 어찌 시작되었습니까?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과 더불어) 주를 섬기기 위해 마음을 같이 한 채 금식하며 기도(예배)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2절 상) 이 때 성령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절 하)
또한, 가이사랴 이달리야 부대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해서 그로부터 말씀을 들으라’는 환상을 본 것도(행10:3~6),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이방선교에 대한 환상을 본 것(행10:9~16) 역시도 그들이 개인적으로 기도(예배) 할 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 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10:3~5) /“...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행10:9~11)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예배든 개인예배이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분을 간절히 찾고 또 찾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간절히 찾고 계시며, 또한 (찾으신) 그 참된 예배자를 들어 그리 사용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예배자입니까? 아버지께서 그토록 찾으시는 사람입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만나다(16:1~5)
* 실패한 것처럼 보이나....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14:19)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를 비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절) 이 상황만 놓고 보면 다 실패한 것 같습니다. 다 그르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아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가가 있으니...”(행16:1) 사실 디모데가 복음을 받아들인 때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로 추정되는데, 그는 필시 돌아 맞아 거의 죽을 뻔 하면서 까지 복음을 증거 하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을 계기로 (바울이 증거 한)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임이 분명하구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까? 현 상황만 놓고 보면 다 그르친 것 같다구요? 그렇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만일 그 일이 주를 위한 일이라면) 결코 실패하거나 좌절되질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상만을 놓고 보면 거의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다 망쳐버린 것처럼 여겨질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의 일은 결코 실패하거나 좌절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바울은 주를 위해 평생 가정을 이루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6:7,8) 즉, 그는 평생 주를 위해 달려오느라 슬하에 아들 하나 둘 수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확신했습니다(고후6:10). 마치 아브라함이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살았지만 주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5,6)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누굴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신실한 청년 디모데입니다. 또한 그를 주시되 어떤 이로 주셨습니까? 믿음 안에서 참 된 아들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1:2)
사실 디모데는 바울이 직접 나은 아들은 아니었으나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지간을 뛰어넘어 영적 부자지간으로 승화된 그런 사이 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자신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고후6:8~10).
또한 우리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아들, 바울과 같은 믿음의 아비가 있습니까? 제자 이상의 아들, 스승 이상의 영적 아비 말입니다. 아직 없으시다면, 이번 기회에 꼭 갖게 되길 소망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6~10)
* 막이고, 제지당하고, 좌절되고....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바울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로마의 대로를 따라 주요 해안 도시였던 에베소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으로부터 제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방향을 바꾸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비두니아 지역으로 북상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도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계획이 빈번히 좌절되자 이제 바울로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마게도냐 환상이 주어진 것이구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9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세워둔 계획이 빈번히 막히고 좌절되고 제지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이로 인해 눈앞이 캄캄하고 암울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속 바울과 그 일행처럼 말입니다. “성령이.... 못하게 하시거늘...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6,7절)
* 그렇다면, 내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어쩌다가 한두 번 막히는 수준이 아니라 빈번히 막히게 된다면, 단순히 한두 번의 실패 정도가 아닌 빈번한 좌절 앞에 직면에 있다면, 그저 한두 번의 제지가 아닌, 원천봉쇄 수준이라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눈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에 말입니까? 내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말입니다. 물론 예초부터 항상 (내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더욱 관심을 두고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바울의 이번 여행(제2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1차 전도여행 지역, 즉 아시아 지역을 재차 방문하고 그 뿌리를 견고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분하자 하고.”(행15:36)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셨습니다. 바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까지 가서 진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본 환상을 통해 알 수 있듯 말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9절)
결국 바울은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와 제지 등이 이 때문임을 확신한 채 곧장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등이 없이 말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절) 마치 한나가 기도의 응답을 받은 직후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듯 말입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1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늘 주목하고 있습니까? (내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기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느냔 말입니다. 막이고, 제지당하고, 좌절될 땐....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은 채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마7:7). 그렇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바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새로운 국면으로 초청하는 소위 ‘마게도냐 환상’을 보게 될 테니 말입니다.
* 마게도냐 환상 - 새로운 국면으로의 초청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9)
물론, 마게도냐 환상이 주어진 1차적인 목적은 ‘바울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아시아를 넘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까지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모든 시대에 각 사람을 새로운 국면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람(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또는 하란에서) 부르심 받았고,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으로부터) 부르심 받았으며, 70년간 바벨론의 포로지에서 압제 받던 백성들이 (그곳으로부터) 그리 하였듯 말입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빈번히 막이고, 제지당하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혹 우리를 새로운 국면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 즉 소위 ‘마게도냐 환상’은 아닌지 곰곰이 되돌아봅시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반응으로(17:11)
*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말씀은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받아야 합니까? 첫째, 간절한 마음입니다(행17:11). 왜 입니까?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간절히 찾는 자가 그분의 말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만일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4,5)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간절함도 없이 그저 형식적인 자세와 태도로 그리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간절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습니까?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고 갈급해 하듯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 둘째,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 하)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받되, 이것이 진정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11절 하). 이는 말씀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 말씀을)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당시의 베뢰아 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부터 얻은 구약 지식과 헬라적 철학사상, 그리고 자신들의 생활 체험 등을 바울의 설교와 비교, 연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말입니까?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11절)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말씀을 받되 ‘이것이 진정 그러한가 하여’라는 자세로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혹 아니면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맹신하는 자세로 서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같은 맹목적 종교도, 탁상공론과 같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 셋째, 말씀을 받되 믿음과 결부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끝으로, 우리는 말씀을 받되 늘 믿음과 결부시켜 나가는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말씀을 받되 믿음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긴다는 말입니다. 또한 말씀을 듣되 믿음으로 반응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안식에 이를 수 없었습니까? 들은 바 그 말씀이 왜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어도, 믿음 가운데서 그것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을 들어도 불순종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4:6,11)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받되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되 믿음과 결부시킴으로 그리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치 거울로 제 모습을 보면서도 (고치지 않은 채) 곧 그 모습을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고 말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절)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할지라도(18:1~3)
*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드는 사역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당시 그 심경을 표현한 말입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의 특성 때문이었을까요? 그런 개연성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무역의 요충지로서 매우 부요한 도시였으며, 국제적인 항구도시가 대개 그러했듯이 고린도 역시 온갖 비행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현대 영어에서도 패륜아를 가리켜 ‘고린도인’(corinthian)으로도 표현함).
그러나 그게 전부였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드로아에서 확신한 찬 발걸음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 오기까지를 되돌아보았을 때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 하는 느낌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8~10)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건너가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도사역은 ‘아덴’을 전후로 해서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등지에서 심한 매를 맞아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못했고, 이 때문에 감정적으로 의기소침해져있었으며, 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로 거의 병이 들 지경이었습니다(살전2:17-3:15). 이처럼 안팎으로 답답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확신에 차서 시작했다 해도 기대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을지라도 좀처럼 기대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시작하라고 하신 그 일을 당신이 하고 있지만, 종종 당신은 미궁에 빠져드는 듯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기도 합니다. 혹은 점점 더 상황이 꼬여가고 복잡해지는 듯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철저히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구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을 주신다.’-<하나님을 아는 지식>, p306-
종종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기대한 것보다는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결과들이 ‘자신이 기대한 바 대로’ 되길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곧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기대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야만 합니다. 설령 그것이 '우리 자신의 기대'와 맞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말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5:11,12)
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화를 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기대한 바대로 엘리사 직접 나와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환부 위에 손을 흔들면서 병을 고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주술사들이나 의사들은 항상 그러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거두절미하고 사환을 보내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라고 하니 화가 몹시 난 모양입니다.
우리도 종종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기대하신 바대로’ 당연히 이루어 진 것을 보고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따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 생각엔 이렇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쯤 이 정도까지는 되었어야 할 텐데...’, ‘내 기대대로 안 되고 있다면,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겠어...’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왜 내가 실제로 구하고 있는 것을 주시지 않느냐’고 따지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우리가 실제로 구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것’ 이 종종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참 많이 고생하게 됩니다.
*뜻밖의 결과를 직면할 때마다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뜻밖의 결과, 기대 밖의 결과를 만날 때마다 이로 인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대로 모든 것을 주시기로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기대’만을 관심 갖게 될 것이 자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가장 그리고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물음은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실수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못한 일에 직면했을 때 당혹스러워하거나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지 못한 일들 앞에’ 직면할 때마다 당연한 일로 여기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는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둘 사이의 사이가 클수록 더욱더 우리에게 뜻밖의 일들, 예상치 못한 일들은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 ' 뜻밖의 사건', ' 예상치 못한 일' 등을 이렇게 불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구했어야 하는 일', '우리가 생각했어야 하는 일', '우리가 예상했어야 할 일' 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비전을 성취해 가면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종종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는 마게도냐의 환상(행 16장)을 보고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려움과 장애물들은 거의 매일 같이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아덴에서의 선교는 다른 곳에 비해 성과가 적었고,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었으며, 데살로니가에서는 소동을 겪어야 했고,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소명을 향해 확신에 찬 발걸음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을 겪어야 합니다. ‘확신에 찬 시작’이라고 해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리라는 생각은 재고해야만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더욱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어야만 할지도 모르며, 수많은 멸시와 냉대, 굶주림에 처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여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맡은 바 사명을 다 마쳤을 그 때에 우리가 그동안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보면, 모두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됩니다!(20:33~35)
* 받는 것이 복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어떤 사람이 복 된 사람입니까? 많이 받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많이 받아내는 사람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 하신 것처럼) 받는 자가 아닌 오히려 주는 자가 복 된 사람입니다.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35절 하)
왜 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얼핏 보면 받는 것이 더 복된 것 같은 데도 말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이 죄는 다시 무엇으로부터 비롯됩니까?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헌데 이 욕심, 곧 탐심은 무엇의 동인(動因)으로 지적되고 있습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결국 이는 무슨 말입니까? ‘이 욕심 때문에’ 사람은 죄를 범하게 되고 결국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한편, 동시에 ‘이 탐심 그 자체가’ 우상숭배의 동인으로 작용,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있습니까? 특히, 탐심을 말입니다. (사실, 탐심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죄를 잉태케 하는 ‘죄의 씨앗’으로, 결국 이 탐심이 자라서 각양각색의 죄들을 결실케 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마치 사해(死海) 호수가 (요단강을 통해) 위로부터 받기만 한 채, 전혀 아래로 흘러 보내지 않아 결국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Dead Sea)가 된 것처럼, 주지 않고 받기만 하면 이는 결국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마치 우물물이 길어내지 않고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못 쓰게 되는 것처럼, 주지 않고 받기만 하면 이는 곧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파탄 내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사실 우물물은 퍼내고 또 퍼내면 아래로부터 맑은 샘물이 계속해서 솟아오르지만, 퍼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고인 채로 섞어 결국 못쓰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주는 것보다는 받는 걸 더 좋아 하지는 않습니까?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됩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아직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복되다고 생각되십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평생 이 같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아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행20:33~35)
명심하십시오. (사해 호수처럼) 받기만 한 채 전혀 줄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그 생명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지만, (갈릴리 호수처럼)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지런히 줄줄 아는 사람은 몸과 마음도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사실 갈릴리 호수는 만년설이 있는 헬몬산으로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받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요단강을 통해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그 물을 흘려보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지만, 흐르는 물은 절대로 썩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혹 애써 외면하려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부지런히 길어 쓰는 우물물은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와) 오래토록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우물물은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욕심이 죄를, 죄가 곧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두고 있습니까?(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베풀며 또한 주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탐심이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죄를 잉태케 하는 ‘죄의 씨앗’임을 인지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 탐심이 자라서 결국 각양각색의 죄들을 저지르게 된다는 점 역시 깨달고 있습니까?(골3:5)
명심하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또한 주께서 친히 갚아주시되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주실 것이라는 점 역시 말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가시채 뒷발질을 멈추세요!(26:9~18)
* 회심 전 바울, 가시채를 뒷발질 하듯 주의 이름을 대적하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절)
회심 전, 사도 바울의 모습을 표현한다면, 마치 소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모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말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하)
여기서 ‘가시채’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 당시 가축을 앞으로 몰기 위한 끝이 뾰족한 막대기입니다. 그렇다면 ‘가시채를 뒷발질 한다’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가 여태껏 열심히 살아오긴 했으나 그릇된 열심을 좇아 그리 하였으며, 또한 그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긴 했으나 그릇된 방향으로 그리 하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사실 회심 전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어째서 이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3)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투옥시키고, 또 죽일 때에 찬성투표를 하였으며(10절, 행7:58), 또 각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되 강제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게 했으며,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 심지어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했던 것입니다(11절).
*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그와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이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대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그와 같지는 않습니까? 마치 소가 제 주인의 가시채를 향해 뒷발질 하고 있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사실 ‘가시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이나 막대를 가리키는데 이는 밭가는 소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이때 만일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소가 가시채를 뒷발질하면 결국 누구만 상하게 될 뿐입니까? 소 자신입니다. 이 어찌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회심 전 바울의 모습처럼, 연일 하나님께 반항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주의 이름을 (또는 주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리라 굳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릇된 방향, 그릇된 열심 등을 품은 채 연일 가시채를 뒷발질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멈출 수 있을 때 멈춰야 합니다. 끊을 수 있을 때 끊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왜 입니까? 언젠간 멈추고 싶어도 도무지 멈출 수 없고, 끊고 싶어도 도무지 끊을 수 없으며, 돌이키고 싶어도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멈춰야 합니다. 지금 끊어야 합니다.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그와 같지는 않습니까? 연신 가시채를 뒷발질 하고 있는 모습 등이 말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대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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