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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 關防
5.1. 관방 關防
예전 사냥꾼들은 관방에 설치된 주요 도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냥꾼이 드넓은 산과
못, 호수와 바다에 한 조각 그물을 설치해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물고기
나 날짐승, 들짐승이 오가고 모이는 곳을 잘 살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당연히 사냥꾼
들에게는 숙련된 일인데, 이는 ‘방어를 튼튼히 하여 적을 제압하는 방법’에 비유될 수 있
다. 손빈孫臏의 지혜를 갖추었을지라도 마릉馬陵의 험준함이 없었다면, 적을 사로잡는
계책을 펴지 못했을 것이다.1) 또한 음평陰平의 견고함을 믿고 촉蜀나라 사람들이 방어를
하지 않았기에 물고기를 꿰미에 꿴 듯한 군사들이 이곳에 이를 수 있었다.2) 이러한 이유
로 손자孫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보다 먼저 전쟁터에 가서 적을 기다리면 편안하지만, 적보다 늦게 전쟁터에 와서 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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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빈孫臏의… 것이다: 제齊나라의 군사軍師 손빈孫臏이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魏나라로 쳐들어가면서 마릉馬陵에 이
르러 나무를 깎아 하얀 면이 드러나게 한 다음 그 나무에 “방연龐涓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글을 써 놓고 좌우에 궁
노수弓弩手를 매복시켜 두었다. 제나라가 위나라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의 장군 방연은 조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급히 위나라로 달려와 저물녘에 마릉에 당도하여 나무에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불을 비추어 읽으려 하는데 채 읽기도 전에
매복한 궁노수들의 기습을 받아 패사敗死하였다. 『사기史記』권65「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보인다.
2) 음평陰平이… 있었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장수인 등애鄧艾가 촉蜀을 칠 때에 음평陰平으로부터 무인지지無人之地 100 리의 산을 파서 길을 내어 담요로 몸을 싸서 굴러 내려가고, 군사들은 나무를 부여잡고 벼랑을 따라 물고기를 꿰미에 꿴 것처럼
하여 들어갔다. 『삼국지三國志』권28「등애전鄧艾傳」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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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싸우게 되면 고통스럽게 된다”.
“적을 공격해서 적진을 점령하는 것은 적이 방어하지 않는 곳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적
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적이 공격하지 않는 곳을 방어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적의 수가 비록 많더라도, 싸울 수 없게 만든다면 승리할 수 있”다.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말고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것을 믿어라. 적이 공격하지 않
는다고 믿지 말고, 적이 공격하지 못할 대비가 있음을 믿어라” .
“좁은 지형을 먼저 차지하고 이곳에 병사를 모아 적을 기다리며, 험난한 지형을 먼저 점유
하여 반드시 높고 양지바른 곳에서 적을 기다려라”.
손자가 말한 이 몇 가지를 안다면 관방을 설치하고 방어하는 도리가 다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한 무리의 병사들을 데리고 이로운 지형을 차지해 방어한다면, 이것은 사냥
꾼들이 산과 못, 호수와 바다에 한 조각 그물을 설치하여 뜻대로 포획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비록 수백만의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반드시 이롭고 편리한 지형을 골라 그곳에
관방을 설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형은 삼면이 바다이고 나머지 한쪽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신라와
고려 때에는 천하의 강국으로 알려졌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나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수
많은 병력으로도 결국 패배하고 군사를 회군시켰다. 그러나 고려 이후에는 도리어 천하
의 약한 나라가 되어 섬 오랑캐3)와 북쪽 오랑캐4)로부터 해마다 약탈을 당했다.
여러 선왕들의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은 하은주夏殷周 삼대를 능가했으며, 먼 나라 사람까
지 편안하게 해 주는 교화와 나라의 변방을 안정시킨 위엄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뛰어
났다. 그런데도 오히려 임진년의 왜란 및 병자년과 정묘년의 호란으로 여러 진鎭이 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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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섬 오랑캐: ‘훼복卉服’은 풀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오랑캐의 옷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섬 오랑캐라는 의미로, 왜인
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4) 북쪽 오랑캐: ‘전구氈裘’는 털로 짜서 만든 갖옷인데 서북 지방의 오랑캐들이 입으므로 서강西羗이나 흉노의 추장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여진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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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온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다. 지금 그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된 이유
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렇게 된 것은 지금과 그때의 군사력이 다르기 때문이며, 시운時
運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들 한다. 이것이 어찌 시무時務를 아는 논의라 할 수 있겠는가.
고려 이전에 우리나라는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무력武力을 숭상했고 풍
속 또한 검소하고 근면했다. 그래서 마을의 터가 높은 산봉우리에 있었고 험준한 곳에 기
대어 돌로 성을 쌓고서는 열 사람 백 사람이 서로 지켰으니, 마치 주周나라 전제田制의 오
묘五畝 제도처럼, 가을과 겨울에는 성안에서 지내며 식량을 보관하고, 봄과 여름에는 들
판으로 나가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이웃한 적이 쳐들어와도, 성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어
도 성은 저절로 지켜졌으며, 들판을 말끔히 정리하라는 명령5)이 있지 않아도 들판은 저절
로 깨끗해졌다. 적을 피해 험준한 곳으로 도망가려 해도,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험
준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험준한 지형에 방어할 곳을 설치하여 죽을 각오로 스스로를 지
켰기에, 멀리서 공격해 온 외부의 적은 군량軍糧을 지속적으로 운송하기 어렵게 되어 적
의 불편함과 편리함에도 분명 다른 형세가 있었다. 적은 먼 길을 달려와 공격하기에도 이
미 편치 못했으므로, 성 하나를 빼앗는 것도 어려워 얻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에 적
은 스스로 지쳐 군사를 후퇴시키고 아군은 날카로움을 쌓아 적을 추격하게 되었다. 이것
이 바로 『무경武經』에서 말한 “승산이 있으면 군사를 일으키고, 승산이 없으면 군사를 움
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에게 패하더라도 완전히 패망하지는 않았고 승리할 적
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것은 군사력에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로 시세
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지금 높은 산봉우리에 종종 돌을 쌓은 곳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왜
성倭城’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예전 성을 쌓아 방어했던 곳으로 ‘왜倭’가 ‘고古’와 발음이
비슷하기에, 잘못 일컬어 전해진 것이다.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나라에는 적의 침입에 대한 근심이 없었고 문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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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들판을 말끔히 정리하라는 명령: ‘청야지명淸野之命’이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주민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들을 비워서, 보급을
차단하는 병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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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성대해져, 편안함 속에 근심을 잊고 안일함에 빠져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도읍과 시골 마을은 모두 평야 지대에 있었다.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대부분
짐을 싸들고 도망가는 것만을 최고의 계책으로 삼았다. 그래서 우리의 창고에 쌓아놓은
것들은 적의 군수 물자가 되었고, 적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서도 도망쳤으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한 것이다. 이것은 패하게 된 이유가 우리에게 있고 적은 그저 우리의 그러한 기
세만을 탄 것이다.
그래도 고려 시대의 지난 역사는 오히려 숭상할 만하다. 조선의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말
을 하자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처음에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무너
졌었다. 그러나 무기를 겨루며 적에 대항할 적에는 승부를 다툴 만하였고 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경우도 제법 많았다. 이것은 진실로 군사력에서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는
증거이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처럼 겁이 많은 사람도 없으며, 또한 우리나라 사람처럼 용맹한 사람
도 없다. 그래서 동래東萊의 백성들은 왜구를 잡초처럼 보았고, 육진六鎭의 백성들은 오
랑캐를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이는 들에 사는 사람은 호랑이 이야기만 들어도 깜짝 놀라
지만, 산골짜기에서 자란 사람은 호랑이를 보면 주먹을 쥐고 잡으려 하는 것과 같은 경우
이다. 그런데 사람의 강인하고 나약함이 어찌 산골짜기와 들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겠
는가. 다만 나약하거나 용맹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훈련받지 못한 군사를 데리고 갑자기 강
한 적과 싸우게 되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대하
면서, 상대에 익숙해져 있고 상대의 강하고 약한 것을 잘 알고 있다면, 비록 약하고 싸움
에서 패한 병사라 할지라도 한결같이 적과 대적할 마음이 있을 것이니, 싸울 생각이 있는
병사들을 데리고 헤이해진 적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사나운 새가 공격하려 할 때에는 먼저 낮게 날면서 날개를 거두고, 맹수가 덮치려 할 때
에는 귀를 숙이고 바짝 엎드리는데, 이것은 힘을 모으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지금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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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하는 계책6)으로, 비록 고을마다 성을 쌓을 수는 없지만, 우선 앞선 시대 사람들이 쌓
아 놓았던 성을 더 수리하고 이로운 지형의 요해처를 차지해 방어책을 마련하여 성을 방
어하면서7) 힘을 모아 뒷날의 기회를 엿본다면 이것이야 말로 방어를 견고하게 하는 최고
의 계책이다.
5.2. 관서의 지형과 관방 關西形便關防
관서의 지형은 대저 백두산으로 경계가 나뉜 뒤, 그 기운이 돌아들어 연이어 사이봉沙伊
峯, 완항령緩項嶺, 어은봉漁隱嶺이 되었다가 서쪽으로 뻗어 원산圓山이 되었다. 백두산의
기운이 서리었다가 나뉘어 태백산太白山에까지 이르러 삼수부三水府의 경계가 되었고,
다시 돌아들어 설한령雪寒嶺이 되었는데, 폐사군廢四郡이 그 사이에 있다. 설한령은 강
계부江界府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강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용만龍灣에서 그 기운이 그
친다. 강변의 일곱 고을은 모두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용만으로 경계가 나누어
졌는데, 그 사이에 있는 오가는 길은 적유령狄踰嶺과 계반령鷄攀嶺 두 고개이다. 모두 천
혜의 요새이니, 진실로 하나의 관문이 되어 어느 누구도 넘지 못할 곳이다.
용만에서 기성箕城까지는 오백여 리인데, 산세山勢가 평탄하다. 동림진東林鎭과 서림진
西林鎭 및 효성령曉星嶺이 비록 관액關扼이라 하지만 관북關北의 여러 봉우리와 비교해
볼 때 모두 평탄한 길에 불과하다. 방어하는 계책은 오직 험한 지형에 성을 쌓고 지키는 것
이기에, 선천진宣川鎭을 동림진東林鎭으로 도로 옮겨 두 곳에 성을 쌓아야 하고, 철산진鐵
山鎭을 거연관車輦關으로 옮겨 재물을 모아 성을 쌓아야 한다고 일찍이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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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리 대비하는 계책: ‘철토지계撤土之計’는 사람이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로, 『시경詩經』「빈풍豳風 치효鴟---------------------
능한산성凌漢山城이 있는 곽산郭山은 그 땅이 정주定州와 경계가 되는데 산세가 높고도
험하며, 앞쪽으로 큰 길이 나 있어 이곳 또한 천혜의 요새이다. 정묘년丁卯年 호란胡亂에
능한산성이 함락되자, 이 성을 버려두었다. 정묘년에 이 성이 함락당한 이유는 곽산과 정
주의 두 고을 원이 주장主將의 권력을 다투어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서 적의 침공을 방어
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적이 이 틈을 타고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성이 견
고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비록 금탕金湯8) 같은 견고함이 있다 하더라도, 인
화人和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때 무너졌던 곳을 보수하여 수리하지 않
고 군량미와 병기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공공연히 무너진 성곽 사이에 버려두었으니, 이
는 진실로 식자識者들이 개탄하는 바이다. 지금 보니, 돌을 쌓아놓은 것은 그대로 있으니
백성들을 불러 모아 조금만 더 성곽을 수리하고, 곽산의 수령이 정주까지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여 통제를 전담하게 한다면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방비가 될 것이다.
영변寧邊의 철옹성鐵瓮城은 국내 산성山城 중 제일의 관방關防이다.9) 병영兵營을 안주
安州로 옮겨 설치한 것은 변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한 것인데, 흉역凶逆의 변란이 일어났
다. 이것이 어찌 성의 잘못이겠는가. 다만 저 안주는 성터가 기울어져 있어 견고하게 지킬
수 있는 형세를 갖추지 못했으며, 가로질러 있는 드넓은 들판은 마치 지름길로 가는 손쉬
운 방법인 듯하다. 예전 선왕先王 때에 관서關西의 장수가 장계狀啓를 올려 영변으로 병
영을 옮길 것을 청한 것은 진실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전례에 따라
병영을 영변으로 옮겨 설치하고 또한 방영防營을 안주에 두어, 이로써 길을 막는 방법으
로 삼고 천혜의 요새에 원수元帥와 큰 진을 설치하면, 마치 사나운 호랑이가 산 속에 있는
형세가 되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 했을 때, 병력을 모아 기회를 타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직 이 방법을 따른다면, 이것은 병가兵家에서 말한 만
전을 기하는 최고의 계책이 될 것이다. 이는 편안하면서도 위급함을 잊지 않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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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탕金湯: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준말로, 쇠로 만든 성곽과 펄펄 끓는 물로 채워진 해자垓字라는 뜻으로, 견고한 요새지를 말한다.
9) 【두주: 의주직로義州直路로부터 고진강古津江에 이르기까지, 비스듬히 식송진植松鎭이 있다. 이 식송진 앞의 동쪽은 구성부龜
成府와 연해 있고, 동북쪽은 안의진安義鎭과 맞닿아 있으며, 극성령棘城嶺 너머는 삭주朔州와 접해 있다. 또한 식송진 앞으로부
터 동남쪽으로는 비스듬히 혜천蹊川의 나루와 접해 있는데, 이 혜천은 의주직로와 서로 만난다. 의주직로를 따라 온다면, 의주에
서 이곳까지는 삼백여 리이고, 식송진의 길로 이곳까지 온다면 이백오십여 리이다. 그러니 이 식송진은 진실로 통행하는 요충지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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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미리 강구해야 할 방책이다.
이상 관서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5.3. 해서의 지형과 관방 海西形便關防
원산圓山의 큰 줄기가 멀리까지 이어져 낭림산狼林山이 되었다. 낭림산이 돌아들어 두
류산頭流山이 되었고, 두류산이 동쪽으로 돌아 함경도 남관南關의 여러 고을의 산천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돌아 관서의 양덕陽德・맹산陽山 등의 경계가 되었다. 두류산이 서
쪽으로 돌아들어 개연산開蓮山이 되었고, 개연산이 서남쪽으로 멀리까지 뻗어 송악松岳
에 이르러 송경松京이 되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해서海西의 곡산谷山과 토산兔山
등의 고을 및 관동關東의 이천伊川・안협安峽과 기전畿甸의 마전麻田・삭녕朔寧 등의
고을은 모두 고개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연이어져 있어 이들
모두가 하늘이 만든 험준한 지역이다. 황주로부터 송도까지의 삼백여 리 사이는 봉산鳳
山의 동선령洞仙嶺이 조금은 험준한 지형이 된다. 그래서 이곳에 관방을 설치했고 더불
어 산 위에 정방진定方鎭을 두었으며, 산산진蒜山鎭은 산이 끝나고 들판이 펼쳐지는 지
점에 있어 그곳을 방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전의 방어책에서도 이 점
에 대해 논의한 바 있는데, 그 가운데 우선적으로 방어해야 할 곳이 바로 청석동靑石洞이
다. 그 지세가 마릉이나 구불구불한 양의 창자처럼 험준하며, 좌측에는 대흥산성大興山
城과 백치진白峙鎭의 견고함이 있고, 우측에는 전포錢浦와 벽란도碧瀾渡의 험준함이 있
다. 청석동은 벽같이 서 있는 두 산 사이의 외길로, 진실로 한 명으로도 만 명의 적을 감당
할 만한 곳이다.
지난 병자년의 호란 때에 적군이 며칠 만에 천여 리를 짓밟고 이곳까지 이르렀다. 적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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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래 살핀 이후에 비로소 마음껏 내달려 들어왔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이 전해지고 있어, 적군에 대해 단단히 벼르고 성내지 않음이 없다.
대개 서쪽 길로 오는 자는 왼쪽에 산골 마을을 끼고 수산遂安・토산兎山・마전麻田・삭
녕朔寧의 험준한 길을 지나야 하며, 오른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긴 강과 험한 파도를 배로
헤쳐 나가야 하는 근심이 있게 되니, 모든 길이 오랫동안 말을 몰아서 넘어올 수 있는 지
형은 아니다. 그러니 이곳 청석동을 넘는 길은 목구멍 같은 중요한 문이 된다.
하늘이 경기도와 황해도에 뛰어난 지형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버려두어 쓸모없는 땅으
로 만들고 끝내 성을 쌓고자 하는 계획이 없으니 예전부터 변방의 방어를 담당했던 사람
들이 깊이 생각하고서 그렇게 한 것인 줄은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곳 청석동이 진실로 병
자년 호란 때 적군이 왕래했던 길로, 예전에는 없었는데 지금 생긴 길이라고 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가 않다. 임진臨津과 동선령洞
仙嶺에는 모두 전례에 따라 관방을 설치했으면서도 어찌하여 유독 이곳에만 관방을 새로
설치하는 것을 기피하는가. 하물며 청석동의 지형은 호리병의 모양과 같아 골짜기 입구
가 좁아 절로 관방의 문이 되고, 또한 이곳에는 흙과 돌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성을 쌓는
데에도 크게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수백 리 정도의 성을 쌓고 이곳에 진장鎭將을
두고서 그로 하여금 방어하게 한다면, 굳건하게 지키는 방법이 국내에 흩어져 있는 통행
을 막는 큰 진鎭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이곳이 수십 년 전에는 오히려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민둥산이 되어 거의 들판 산과 같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벌목伐木을 금지하
는 법령을 만들어 나무를 기르고자 하는 뜻에 부합한 것이겠는가. 벌목을 각별히 엄금하
여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해송海松을 텅 빈 곳에 심고 벌목을 금
지하는 한계를 정하여 묵정밭을 태워 화전 밭을 경작하지 못하게 해, 나무가 울창하게 하
늘까지 닿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이후에야 관방을 두텁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상 해서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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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관동의 지형과 관방 關東形便關防
두류산頭流山의 산세가 멀리까지 이어져 분수령分水嶺이 되었다. 분수령은 동남쪽으로
뻗어 철령鐵嶺이 되었고, 또 분수령으로부터 동북의 경계가 나뉜다. 또한 분수령의 한 줄
기가 남쪽으로 뻗어 오대산五臺山이 되었는데, 오대산에는 대관령大關嶺의 요해처가 있
다. 또 뻗어 내려 태백산太白山이 되었다. 태백산의 황지黃池는 삼척三陟의 경계에 있는
데, 태백산을 뚫고 남쪽으로 흘러들어 낙동강洛東江의 수원水源이 된다. 관동關東의 영
동嶺東과 영서嶺西가 여기에서 나누어진다. 분수령이 동쪽으로 뻗어 백빙산白氷山이 되
었고, 남쪽으로 뻗어 보개산寶蓋山이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궁예弓裔의 옛 도읍지로, 철
원부鐵原府이다. 백빙산이 동쪽으로 뻗어 불정산佛頂山・대성산大聖山 등의 산이 되었
고, 또 뻗어내려 백운산白雲山・운악산雲岳山 등의 산이 되었으며, 그 산세山勢가 경기
도로 들어와서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되었다.
철령의 아래에 회양淮陽에 있는데, 이곳은 남북을 통행하는 관문이기에 철령은 절로 천
혜의 요새가 된다. 철령의 정상에는 옛날 성을 쌓았던 터와 성문터가 있고 고갯마루에는
조금 드넓은 곳이 있다. 지금 만약 사오백 걸음 정도의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백성들
을 모으고 사창社倉을 설치해, 회양부사淮陽府使가 겸하여 방수장防守將이 된다면, 안변
安邊과 더불어 표리 관계가 되어 서로 응하게 될 것이다. 분수령【추가령楸加嶺이라고도
한다.】의 한 길은 고산高山으로부터 북쪽으로 곧장 삼방치三防峙까지 연결된다.
철원부鐵原府로부터 좌측 길로 접어들면 연천漣川으로 들어가기에, 철원에 방어하는 병
영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삼방의 길은 평탄한 편이기에 요즘 장사꾼
이나 여행객들은 모두 이 길을 이용한다. 그러나 좌우가 모두 깊숙한 골짜기로 오직 외길
로만 오갈 수 있기에, 참으로 천혜의 요새이다. 고려 때에 이미 세 곳에 방어벽을 설치했기
에, 삼방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삼방치의 길을 영원히 막아 긴 시간 동안 나무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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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오직 철령만을 남북을 오가는 길로 삼은 뒤에야 변방의 방어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
이상 관동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5.5. 경기의 지형과 관방 畿輔形便關防
두류산이 서쪽으로 뻗어 개연산開蓮山이 되었고, 개연산이 서남쪽으로 멀리까지 뻗어 큰
줄기와 직접 닿아 천마산天摩山과 송악산崧嶽山이 되었다. 마전麻田・삭녕朔寧・연천
漣川・장단長湍 등의 고을과 해서의 토산兎山・곡산谷山・신계新溪・금천金川은 고개
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감악산紺岳山과 소요산逍遙山은 관동과 맞닿아 있다. 이곳은 큰
골짜기와 여울이 띠를 두른 듯 연이어져 있고 절벽이 우뚝하다.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송경의 직로로 접어들지 않는다면, 반드시 마전麻田・삭녕朔寧・연천漣川・장단長湍
사이의 길로 와야 하는데, 골짜기가 매우 험하여 힘겹게 경기도와 황해도로 연결되기에
대략 이곳에 방어벽을 세우면 훗날 걱정이 없게 될 거이다. 북쪽에서 오는 자들이 영평永
平과 포천抱川의 직로로 오지 않는다면, 삼방치로부터 내려오는 큰 여울 너머의 길 이외
에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삼방치를 영원히 막자는 논의를 앞서 했던 것이다.
동쪽과 남쪽의 두 길은 방어벽이 없이 텅 비어 있다. 그래서 남쪽 길에는 옛날부터 수원
水原에 방어하는 병영을 설치했다. 또한 지금 이미 유수영留守營을 옮겨 설치했고, 요로
要路에 성을 쌓았으니, 만전을 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남三南에서 오는 네다섯
갈래의 큰 길은 경기에서 만나는데,10) 호서湖西의 고을에는 험한 곳에 자리 잡은 방어할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으며, 요해처가 될 만한 이름난 산이나 큰 냇물도 없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드넓은 길은 곧장 진위振威의 경계에서 모두 만나서 비로소 한 길이 된다.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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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두주: 내포內浦 여러 고을의 길은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는 큰 길과 갈원葛院의 경계에서 서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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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수십 리를 가면 오산烏山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수원
水原을 경유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용인龍仁을 경유하는 길인데, 모두 경성京城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렇기에 진위振威11)는 진실로 삼남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 되니,
마땅히 진위振威에 기보좌방畿輔左防을 설치하고, 양성陽城과 하나의 부府로 합쳐야 한
다. 또 진위振威에 독진獨鎭12)을 만들어 수원水原과 더불어 서로 돕는 형세13)로 삼는다면,
안과 밖으로 거듭 닫아거는 것이 되어 경기도의 방어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비록 충주忠州와 진천鎭川을 통해 경기도로 올라오는 길은 있지만, 죽산竹山을 경유하고
용인龍仁을 지나야 경성京城에 이를 수 있다. 이 길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과 화성華城14)두
개의 큰 진鎭이 함께 오륙십 리의 땅을 서로 돕고 있으며15), 큰 강이 그 앞을 가로질러 가기
에, 혹시라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빈틈을 노리고 바로 공격할 만한 형세는 없다.
동쪽 길은 원영原營16)에서 출발해 조령鳥領과 죽령竹嶺 두 고개에 이르는 길로, 양근楊根
에서 만나는데 산을 끼고 강을 연해 있다. 이 길은 월계月溪를 경유하고 두미豆彌를 지나
경성京城으로 통하기에, 양근楊根에도 별도로 하나의 진鎭을 설치하여 경성京城으로 올
라오는 길을 차단하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동쪽으로 칠십 리의 거리에 봉안역奉安驛이 있고 봉안역의 동쪽
에는 고랑진高浪津이 있는데, 험준한 산이 빙 둘러 있다. 이곳은 요충지로 어떻게든 방어
할 수 있는 곳이니,17) 마땅히 고랑진高浪津 위쪽에 있는 용진龍津에 하나의 진장鎭將을
설치해야 한다. 용진龍津에는 이미 훈국창訓局倉이 있으니, 훈국창이 있는 그곳에 설치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양근楊根 고을 상류의 지세地勢가 좋은 곳을 겸영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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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주: 진위 고을의 터는 험한 산이 빙 둘러 있고, 남쪽으로 열려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지금 이곳에 성을 쌓는다면 삼면은 모
두 산성이 되고, 남쪽 방면은 지형에 맞추어 평지에 성을 쌓아야 한다.】
12) 독진獨鎭: 조선 시대, 해안 지대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방에 설치한 진영. 수령이나 첨사가 독립적으로 다스렸다.
13) 서로 돕는 형세: ‘보거지세輔車之勢’는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다. ‘보輔’는 협보頰輔인데 뺨에 붙은 뼈, ‘거車’는 아거牙車인데
어금니 아랫뼈이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조에, “속담에 이른바, ‘보거輔車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
다는 것’은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른 것이다.”란 기사가 보인다.
14) 【두주: 남한산성南漢山城 화성華城】
15) 서로 돕고 있으며: ‘의각猗角’은 사슴을 잡을 때에 뒤에서는 다리를 잡고 앞에서는 뿔을 잡는 것으로, 인신引伸하여 군사를 양
편으로 나누어 적을 협공挾攻하거나 앞뒤에서 견제하는 형세를 이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14년 조에, “비유
하면 사슴을 잡을 적에 진晉나라 사람들은 뿔을 잡고 여러 융족戎族들은 다리를 잡는 것과 같이 한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16) 원영原營: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있던 강원도 감영監營으로, 강원도 원주에 있었다.
17) 【두주: 방어하는 곳에 진실로 성루가 없다면, 험준한 지형에 기대 방어할만한 곳이 없더라도 반드시 성을 쌓은 이후에야 방어
할 만한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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營으로 승격시키고, 지평砥平을 속읍屬邑으로 삼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서로
힘을 모아 방어하게 한다면 아마도 굳건하게 지키는 계책에 부합할 것이다.
이상 경기 지역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5.6. 영남의 지형과 관방 嶺南形便關防
오대산五臺山의 서쪽 줄기가 연방산燕方山과 청량산淸涼山 등의 산이 되었고, 다시 돌아
들어 태기산泰岐山과 치악산雉岳山이 되었으며, 경기도까지 뻗어 용문산龍門山이 되었
다. 태백산太白山은 동쪽으로 뻗어 남쪽으로 향해 몰운대沒雲臺에 이르렀고, 동래부東萊
府의 부산釜山 및 수영水營이 모두 그 끝자락에 있다. 또 태백산이 서남쪽으로 돌아들어
죽령竹嶺이 되었고, 다시 뻗어 주흘산主屹山의 조령鳥嶺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뻗어 속
리산俗離山이 되었고, 다시 남쪽으로 지리산智異山에까지 이르렀다. 지리산은 뻗어 팔량
치八良峙가 되었고 바다를 만나 그 지세地勢를 다했다.
속리산이 북쪽으로 곧장 뻗어 경기도 한강 이남의 여러 고을의 산천이 되었고, 서쪽으로
뻗어 호서湖西가 되었다. 동쪽으로 뻗어 남쪽으로 향해 영남嶺南의 우도右道가 되었고,
남쪽으로 뻗어 서쪽으로 향해 호남湖南이 되었다. 그러니 호서와 영남이 속리산의 동서
로 경계가 되었고, 호서와 호남이 벽골지碧骨池의 남북으로 경계가 된 것이다.
오대산의 남쪽 줄기는 동래부에서 그친다. 영남의 모든 물은 낙동강洛東江으로 모여들
어, 밀양密陽의 삼랑진三浪津까지 흘러가고, 남쪽으로 김해金海와 경계를 이루며 두 산
의 암벽 사이로 흘러가 바다에까지 이른다.
동래부의 육지에 오른 후로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좌측으로 기장機張과 울산蔚山
을 경유하여 경주慶州로 돌아드는 길이다. 그래서 울산에 좌병영左兵營을 설치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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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 다른 길은 우측으로 양산梁山을 거쳐 산과 강을 따라 가는 하나의 좁은 외길이다.
그 길로 몇 십 리 가면 작원鵲院에 이르는데, 작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지가 된다. 그
래서 예전 임진왜란 때에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이곳에서 적군을 방어한 것이다.
그런데 적군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천대암天臺巖을 포위하여 먼저 공격하기 좋은 지형을
빼앗았다. 그래서 박진은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돌아온 것이다. 천대암은 작원의 위에
있는데, 산세가 험하고 동남쪽은 조금 완만하다. 천대암의 바깥쪽은 절벽이요, 안쪽은 평
탄하여 참으로 하늘이 만든 성터라 하겠다.
예전 영종조英宗朝 때에, 영남 사람들이 이곳에 성을 쌓자는 소장을 올려 아뢴 적이 있었
는데, 산 아래 사는 호족豪族들이 이를 막아 끝내 성을 쌓지 못했다. 지금 만약 이곳에 성
을 쌓고 하나의 진장鎭將을 설치한다면, 밀양은 길을 막을 수 있는 큰 고을이고 사람들도
많으니 방영防營으로 승격시켜 산성을 관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예상치 못
한 일이 발생했을 때 천대암에서 방어하고 작원에서 가로막아 비록 적군이 수백만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이곳을 넘을 수 없어, 결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
니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남로南路 제일의 관방 자리가 된다18.)
상주尙州는 영남 우도의 큰 고을로, 화령령化寧嶺과 추풍령秋風嶺 아래에 있고, 앞에는
큰 길이 뚫려 있다. 순흥順興의 영장營將19)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여, 죽령竹嶺과 상주
尙州를 지키게 하고, 방영防營을 두어 토포討捕와 독진장獨鎭將을 겸해야 한다. 수원水
原에 시행했던 방식에 따라, 조정에서 의논해 관리를 뽑아 파견한 이후에야 여러 고을을
제어하고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양彦陽에 단봉산성丹鳥山城이 있는데, 지세가 험하고 또한 병영兵營으로부터 경주慶
州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지금 보니, 돌로 쌓아 놓은 성벽이 그대로 있다. 문경에 있는 고
모성鈷母城은 좌우의 길이 만나는 곳에 있고, 두 골짜기가 마치 묶어 놓은 듯하며 큰 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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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두주: 동래의 금정산성金井山城은 고을의 서북쪽 십여 리에 있다. 앞으로 큰 길이 가로질러 있고, 성의 북쪽은 험하고-------------------
이 빙 둘러 흘러간다. 이곳에도 돌로 쌓아 놓은 성벽이 그대로 있다. 이 단봉산성과 고모
성 두 곳을 모두 수리하고 백성들을 불러들인다면 길을 가로막고 차단하는 형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조령鳥嶺은 이미 성을 쌓았고 대략 방어 시설도 마련되었기에, 이곳에 대
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이상 영남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5.7. 호서의 지형과 관방 湖西形便關防
태백산太白山에서 뻗은 큰 산맥은 앞뒤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된다. 봉우리 아래
의 여러 고을은 요충지가 아닌 곳이 없는데, 그 중에서 조령과 죽령 아래에 있는 충주忠州
는 충청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이곳에 진영鎭營20)을 설치한 의도는
비록 환란을 미리 대비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만일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길을 차단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진영으로는 불가능하다. 마땅히 충주에 목사牧使를 설
치하고 병영防營을 두어 토포討捕의 직책을 겸하게 하고, 통제와 관할을 전담하게 해 영
장營將21)의 일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 또한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교대로 목사로 파견해
야 한다.22) 통제를 더 위엄 있게 하고 관할을 두텁게 한 이후에야 바야흐로 위급한 일이 발
생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충주의 진영을 혁파하여 그 진영을 옮겼고,
황간의 수령을 진영을 겸해 다스리는 무신 수령으로 삼았다.
화령령化寧嶺23)은 병영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오히려 상주와 표리의 관계로 서로 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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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진영鎭營: 조선 시대, 각 수영水營이나 병영兵營 아래에 두었던 지방 군대의 직소職所를 말한다.-----------------
있다. 그러나 추풍령秋風嶺은 병영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만일 영남에 예기치 못한 변란
이 일어날 경우, 한 병영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두 곳을 모두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황간은 고개 너머에 있으니, 영동永同과 합쳐 하나의 고을로 만들어 겸진兼鎭을 설치하
고 통제·관할한다면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계족산성鷄足山城은 충주에 있는데, 지형이 험준하다. 지금 비록 계족산성을 버려두었지
만, 돌로 쌓은 성벽은 그대로 있다. 성벽을 대략 수리하고 백성들을 불러 모으며, 군량미
쌓아 놓을 곳을 설치하면 참으로 만전을 기한 보호막이 될 것이다.
이상 호서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5.8. 호남의 지형과 관방 湖南形便關防
호남의 서남쪽은 바다가 빙 둘러 있고, 동북쪽으로는 육지와 닿아 있다. 그래서 이곳을 지
키는 방책은 수로水路와 육로陸路가 모두 중요하다. 육로의 경우, 운봉雲峯의 경계에 있
는 팔량치八良峙는 지세가 평탄하여, 비록 군사적 요충지가 될 정도의 높은 봉우리는 아
니지만, 이미 경상남도의 큰 도로와 연결되니 방어하는 곳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운
봉에 겸진兼鎭을 설치한 것이다. 남원南原은 웅장하게 큰 고을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
으며, 죽령과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다. 마땅히 방영防營을 설치하여, 좌측 길을 통제·관
할하게 해 운봉과 서로 돕게24) 하고, 순영巡營25)과 수곤水閫26) 사이를 연결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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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서로 돕게: ‘보거輔車’는 서로 돕는다는 의미이다. ‘보輔’는 협보頰輔인데 뺨에 붙은 뼈, ‘거車’는 아거牙車인데 어금니 아랫뼈------------
또한 문신과 무신을 번갈아 파견하여, 이력履歷으로만 쳐주는 자리로 만들지 말고 다른
고을보다 권위를 더 부여해야 한다.
바닷길은 우수영右水營으로부터 북쪽으로 소영蘇營까지의 거리가 6~7백 리인데, 그 사
이 바닷길의 목구멍 같은 요해처는 군산도群山島만 한 곳이 없다.【지금의 고군산진古群
山鎭이다.】게다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섬들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 배로 가지
못할 곳이 없다. 그러나 이 섬은 왼쪽으로는 암초暗礁가 있고 또한 항구가 얕다는 우려가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파도가 너무 거세어 위험하니, 왼쪽으로나 오른쪽 모두 배가 지나
가기가 쉽지 않다. 다만 고군산진의 남북쪽에 있는 두 산 사이의 벼랑길이 절로 출입문의
구실을 하는 요해처로 평평하게 펼쳐져 바람을 가두고 바닷물도 유유히 흘러가기에, 이
곳이야말로 삼남三南의 뱃길 중 목구멍 같은 요해처이다. 지세도 험준하여 하늘이 만들
어준 해안 방어선이 되기에, 중국의 『일통지一統誌』에서도 해동의 모든 섬을 두루 거론하
면서도 오직 이 한 섬만은 특별히 그 형세를 “열두 봉우리가 성城처럼 연이어져 있다.”라
고 하였다. 이러하니 이곳이 바다의 섬 중에서 가장 험한 요해처라 할 수 있다. 지난해 관
찰사가 아뢴, ‘변경 방어 직책을 이력으로 쳐 주는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하나
의 큰 진영을 만들어 칠산七山 북쪽의 각 진영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만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비책이 될 것이다.
이상 호남의 지형과 관방에 대해 논했다.
지금까지 모든 길의 관방과 참고할 만한 풍토를 기록했다.
해안 방어는 육지 방어보다 훨씬 중요하다. 바람과 조수를 타고 오기에, 그 갑작스럽고 재
빠른 것이 육지 방어를 위해 봉홧불을 피우거나 파발擺撥27)로 미리 경계하라고 알리는 것
에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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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파발擺撥: ‘발보撥報’는 파발로 알린다는 뜻이다. 조선은 본래 군사 통신 제도로서 봉수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치------------
만약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바닷길의 요해처를 논한다면, 호남의 군산도가 가장
중요한 요해처가 된다. 호서는 안흥安興이 가장 요해처가 되는데, 지금은 이미 진영을 설
치하여 지키고 있으므로 이곳에 대해서는 다시 논하지 않겠다. 다만 군량軍糧을 더 늘려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대비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경기에 대해 말하자면,
사람들이 강화도의 손돌목[孫石項]이 삼로三路 중에서도 가장 험한 곳이라고들 한다. 손
돌목은 물이 쏟아지는 듯 거세고 사방에는 산이 흩어져 있는데, 왕래하는 배들은 늘 이곳
을 지나야 하기에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뱃사공[梢工]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에 땀을 흘리
지 않는 경우가 없다. 또한 손돌목은 강화도와 통진通津의 교차 지점에 있기에, 만약 두
물기슭에 각각 50~60명의 포와 활을 쏘는 사람을 두어, 한 명의 장령將領으로 하여금 상
황에 따라 변고變故를 제압하게 한다면 비록 백만의 병사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서는 어
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선천宣川과 곽산郭山 두 고을에는 신미도身尾島28)와 가도椵島 등의
섬이 있다. 신미도는 곽산과 서로 바라보이는 곳으로, 만약 말을 키울 만한 곳을 구하여
이곳의 말들을 다른 목장으로 옮기고, 이곳에 백성들을 모아 살아가게 하면서 하나의 진
장鎭將을 둔다면, 해안을 방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도는 섬이 크고 땅
도 비옥하기에,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진영을 설치하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다만 가도는
옛날 모수毛帥29)가 점거했던 곳으로, 비록 우리나라의 경계 내에 있지만, 바닷길이 조금
멀어, 오랫동안 중국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량軍糧을 둔다면,
얼마 되지 않아서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될 수 있을 듯하니, 차라리 그냥 버려두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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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신미도身尾島:『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53 선천군宣川郡 조에는 ‘신미도身彌島’로 되어 있다.
29) 모수毛帥: 명明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을 말한다. 광해군 14년(1622년)에 모문룡이 가도椵島에 진鎭을 설치하면서 국가 재
정상으로나 외교상으로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는데, 인조 7년(1629년)에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전격적으로 참수
斬首되었다. 그 뒤 유격遊擊 진계성陳繼盛이 원숭환의 명을 받아 그 섬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인조 8년에 유흥치劉興
治가 투항한 달족▩族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진계성 이하 장수 등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이듬해에 섬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오랑캐에 투항하려고 하면서 포악한 짓을 저지르자, 유격 장도張燾와 장관長官 심세괴沈世魁 등이 유흥치와 심복 부하들을
모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권25 「모문룡주사毛文龍誅死」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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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의 천일록 -- 관방 關防 중에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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