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咸安)은 경상북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의 한(弁韓) 땅이었으며, 또 가락국(駕洛國)의 6가야 중 아나가야(阿那伽倻)의 영역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함안군(咸安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고려 때의 995년(성종 14)에 함주(咸州), 1018년(현종 9)에 함안군(郡), 1172년(명종 2)에 함안현(縣), 1374년(공민왕 22)에 함안군, 조선 때의 1505년(연산군 10)에 함안도호부(都護府), 1506년(중종 1)에 함안
군이 되었다.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상(李 尙)은 위위시주부동정(衛慰時主簿同正)을 지낸 원조(遠祖) 원서(元敍)의 후손으로 고려 때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오르고 파산군(巴山君)에 봉해졌다.
그 후 문헌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으므로 후손들은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인 함안(咸安)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상(尙)의 아들 청(淸)은 문하시랑평장사(文下時郞平章事)를, 원(源)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이 두 형제파가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고려구국의 명장(名將) 방실(芳實)은 당시 국가를 혼란시킨 홍건적을 격퇴하여
함안 이씨(咸安李氏)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고려구국의 명장(名將) 방실(芳實)은 당시 국가를 혼란시킨 홍건적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으며, 함안 이씨를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놓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 미(美)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났고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兵曺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5부자 6급제(五父子六及第)]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큰아들인 인형(仁亨)은 당대의 석학 김종직(金宗直)과는 사돈지간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에 항거하였으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중(追贈)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신(公臣)이 되었던 세응(世應)은 사간(司揀)이 되어, 당시 권세를 부리던 류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낼 정도로 기개가 당당하였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영(令)은 인형(仁亨)의 셋째 아들로 스승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화(禍)를 당하였다.
그 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세응(世應)의 아들 임(霖)과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장으로 공(功)을 세운 달(達)·응성(應星)·왕(旺) 등이 대표적이며, 굉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려 명문인 함안 이씨를 더욱 빛낸 인물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792가구, 31,9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尹始榮) 유택
- 소재지 : 경남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山1194-1
칠원(漆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에 위치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 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칠제(漆 )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지금의 창원)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김행 속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조(宣祖)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光海君)때 현(縣)이 되었고 1895년(고정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후에 함안군(咸安郡)에 병합되었다.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 때 태자 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영(始榮)의 아들 황(璜)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高麗)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거부(鋸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17세손 길보(吉甫)가 삼중대광 첨의찬성사(三重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고 귀성군(龜城郡)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칠원(漆原)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였다. 정경공(貞景公) 저(抵)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으며 제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 때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칠원군(漆原君)에 봉(封)해졌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한 석보(碩輔)는 호당(浩當)에 뽑혔고 관찰사(觀察使)·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현령(縣令) 이(伊)의 아들 탁연(卓然)은 명종(明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형조·이조 판서(刑曹·吏曹判書)를 거쳐 종계변무(宗系辨誣)하여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졌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외에도 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과 함께 신임(辛任)이 삼포의(三布衣)로 이름난 지술(志述)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사국(師國),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은 형은(衡殷)·치민(致珉) 등은 칠원 윤씨(漆原尹氏)의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