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般若寺 (반야사)
2010년 9월 26일 제17차 백팔고찰순례 3번째 순례 사찰 2009년 5월부터 50번째 순례 천년고찰
2009년 5월부터 추가 순례 포함 54번째 순례 사찰
반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서,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백화산에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꽃모양의 지형
을 이루는데, 이곳 연꽃중심에 반야사가 위치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9년(720년)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 스님이 창건한 천년
고찰답게 보물급 유물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삼층석탑과 석조부도, 대웅전과 요사채 3동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경주의 옥석으로 제작되어 개금한 것들이다. 또 대웅전 안에는 탱화 6점을 봉안
하였으나, 이중 1890년(고종 27) 청주 보국사(輔國寺)에서 제작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1753
년(영조 29) 경상북도 김천의 봉곡사(鳳谷寺)에서 조성한 지장탱화 등은 매우 양호한 상태로
지금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보물 제1371호인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으로 옮겨 세웠으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창건 당시 상원스님이 세웠다는 칠층석탑은 흔적이 없다.
이 밖의 유물로는 석조부도 2기(영동군 향토유적 25, 26호), 영위판(靈位板), 목사자, 청기와,
법고(法鼓), 범종 등이 있다.
영위판은 왕이 죽었을 때 영위를 봉안하는 판구(板具)로서 높이 105.5cm, 너비 15cm이며,
문수동자가 탄 목사자는 세조를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왕이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을
상징한다. 또 청기와는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용마루 기와다.
천년고찰 반야사는 충북 영동군 황간역에서 북쪽으로 약 5km, 황간I.C에서 면소재지 방면
으로 나오면서 우측에 황간교를 건너 약 9km 지점, 김천에서 국도를 딸 40분 (약35km) 가량
소요되는 지점, 영동에서는 30분(25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과 계곡이 깊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며 큰 물줄기로 사시사철 수량이 충분하여 여름철에는
많은 행락객들이 찾는 휴양공간이 될 뿐 아니라 방생도량으로서 전국 사찰신도들이 매 계절
마다 자주 찾는 유명사찰로 알려져 있다.
<역사 및 설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인 반야사는 720년(신라 성덕왕 19년)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 스님이 창건한 절로서 이절 주위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신앙에 기인하여 반야사라 하였다고 하며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1464년(조선 세조 10년)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크게 중창을 했는데,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들러 9일 동안의 법회를 끝낸 뒤, 혜각 신미(慧覺 神眉) 스님 등의 청으로 이 절의 중창된 모습
을 살피고 대웅전에 참배했다. 그 뒤에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지만 다음의 몇 가지 설화는
천년 고찰의 역사를 대신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세조가 복천사 법회를 마친 뒤 이 절에 들러 대웅전에 참배 했을 때 문수동자가 나타나 세조
에게 따라오라고 하면서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의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했다. 동자는 ‘왕이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 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목욕을 마친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세조는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와서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 때에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18세의 황도령이 황간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물‘수’자와 산‘뫼’자를 몰라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황도령
은 그 길로 황간 반야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학식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우스님께 학문
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우스님이 가만히 보니 황도령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황도령이 한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었다. 이에 일우스님은 황도령 전신에 금강경 5,149자를 빽빽이 써넣고 옷을 입혔는데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이 그 금강경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도망쳤다. 그만 일우스님이 금강경을 쓸 때 황도령의 귀부분만 빼먹은 것이다. 그러나 황도령은 금강경 덕분에 살아났고 그 인연으로 출가했는데, 귀가 없다하여
‘무이법사(無耳法師)’ 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인 같이 지내기 위해서
과부를 얻어 사는데 부인은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 “왜?” “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항상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 이상 못 살겠소.”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 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내어준다. 부인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 밖 샘물가에 앉아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 없으니 다시 정심선사를 찾아가면 이름
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 “내 다시 올 줄 알았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물으니 부인은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 “어째서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
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 그래서 그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 전에 자기가
버린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은 인과법칙의 이치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반야사 경내 극락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출처:반야사 홈피)
반야사 입구
고찰순례단원들이 반야사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대웅전 좌우로 극락전과 지장전이 있습니다.
대웅전 / 반야사의 주불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원래는 현재의 극락전을 반야사의 주불전
이자 대웅전으로 사용하였으나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했으며, 원래의 대웅전
은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련>
주련의 게송은 수(隋)나라 天竺(천축) 三藏(삼장)법사 사나굴다(闍那崛多) 한역의 불본행집경 권제4(佛本行集經 卷第四) 수결정기품 하(受決定記品 下)에 등장하는 게송.
청화스님 염불선 법문집에서 위 게송에 대한 글을 옮겨봅니다.
과거 저사(底沙,Tisya)부처님 회상에서 석가(釋迦)행자와 미륵(彌勒)행자가 도반이 되어 수행 정진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사부처님이 두 수행자를 관찰하니 석가행자보다 미륵행자가 근기는 더 수승하나 장차 제도할 인연 있는 국토 중생들은 석가가 제도할 국토 중생들이 훨씬 수승하므로 기왕이면 석가를 빨리 성취시켜서 인연이 성숙한 국토 중생을 제도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
그래서 하루는 저사부처님이 석가행자에게 산에 올라갈 테니 따라오라고 하시고 신족통(神足通)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석가행자는 그런 신통이 없는지라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산에 올라가서 보니 저사불(底沙佛)이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부터서 6조 혜능 스님까지 33조사 가운데서 한 6할 정도는 열반에 드실 때 화광삼매에 들어서 가셨습니다. 스스로 자기 가슴에서 삼매의 불을 내서 자기 몸을 다비(茶毘)를 했습니다.
저사불이 화광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너무나 장엄 찬란하여 석가행자는 황홀한 동경과 환희용약하는 마음이 사무쳐 넋을 잃고 저사부처님을 우러러 뵈올 뿐이었습니다. 경을 보면 ‘첨앙존안(曠仰尊顔)에 목불잠사(目不暫捨)라’ 저사불의 존안을 우러러 뵈오면서 잠깐 동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옮기려다 한 발을 든 채로 7주야(七晝夜) 동안 밤낮으로 찬탄을 했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은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라 하는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그때 나온 것이라 합니다. 교족칠일(翹足七日)이라, 이레 동안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한 공덕으로 석가행자는 미륵행자 보다도 9겁(九劫)을 초월해서 성불했습니다.
인경본(출처:고려대장경연구소)
대웅전 불상 / 불상은 3位(위)이고 중앙이 석가여래 좌상이고 우편은 보현보살,
좌편은 문수보살상이다. 모두 경주옥석으로 제작되었고 도금을 했다.
불단 상부에는 닫집을 만들어 달았다. 중앙부는 2층으로 구성했고 좌우의 날개부분은 단층
으로 만들었다. 전형적인 보궁형의 닫집이며 그 구성이 단순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왼쪽 배롱나무 뒤에 극락전이 위치하고 있다.
극락전은 원래 반야사의 대웅전으로 건립된 건물이었으나, 1993년 현재의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이후 극락전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반야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이다.
<주련>
이 시는 고려 때 나옹스님이 지은 것이다. 이 시가 지어진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20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출가한 스님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
이 누이동생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자꾸 절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옹스님은 만나주지 않고 다른 스님에게 다른 곳으로 가고 없다 하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그래도 누이동생은 이 절 저 절을 나옹 스님을 수소문하여 찾아 다녔다.
이리하여 나옹스님은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써 두고 누이동생이 찾아오면 전하게 하였다.
“나는 이미 세속을 떠나 출가한 몸이라 속가의 가족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유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우리 불가에서는 가족을 가까이하는 것을 수도의
장애라고 여긴다. 앞으로는 나를 찾아오지 말고 아미타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내 생각
이 날 때는 이 부처님 생각을 가슴에 얹어 두고 생각이 막힐 때까지 하고 있어라.”
편지의 마지막에 써둔 시였는데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자기에 대한 생각을
끊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1월 제72호>
위 念頌(염송)은 장엄염불에도 들어 있으며, 불교의식을 행할때나 새벽종성시
持誦(지송)되고 있다.
수천년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 허리에 쌓여 자연스럽게 호랑이 형상을 이루어
그 높이만도 80여 미터요, 길이는 무려 300여 미터나 된다.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 / 대웅전 및 극락전이 위치하고 있는 반야사의 주공간 정면에 작은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이 탑은 원래 현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이라는 지역에서
1950년에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전한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초층탑신의 결구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면석과
초층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비록 일부 새로운 부재가 보충되었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의 양식을 절충해 건립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배롱나무 / 반야사 경내에 있는 배롱나무(백일홍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이 되었으며, 높이
7~8m, 나무둘레 1.5m의 보호수이다.
이 배롱나무는 이조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
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7~8월이면 대웅전과 극락전의 단청빛과 반야사 3층
석탑이 어울려져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지장전 / 대웅전 오른편에 최근 새롭게 건립한 불전이다.
<주련>
이 주련글은 지장보살에 대한 탄백(歎白:재의식, 정근 등에서 올리는 찬불게)으로,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견문이익품(見聞利益品 제12)에는 地藏大聖威神力이
吾觀地藏威神力(내 지장보살 위신력 살펴보니)으로 되어 있다.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신 망경대 문수전으로 가는 길입니다.
반야사의 백미 문수전은 이러한 경사진 계단길을 한참 올라야 만날수 있다.
문수전 / 영천과 망경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며 망경대 꼭대기에는 문수전이
건립되어 있다.
문수전 문수보살상 / 문수보살은 청사자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문수전 벽면에 문수보살과 세조의 설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문수전에서 바라본 계곡
과연 문수보살이 상주할 만한 절경이 펼쳐진다.
망경대위에 서있는 문수전
망경대와 영천 / 반야사에서 약 200미터 동쪽으로 올라가면 계류면에 수십평 넓이의
반석이 깔려 있고 4면이 준봉으로 둘러쌓여 녹수청산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이곳이
망경대이다. 이곳 밑의 영천은 세조대왕이 문수보살의 안내로 목욕을 한 후 병이
낳은 곳이다.
법주사, 공림사에 이어 반야사를 마지막으로 17차 고찰순례를 마치고, 버스에서 2009년
통도사 화엄산림법회 8번째인 전 용주사 주지 정락스님의 <비로자나품>과 <여래명호품>
DVD를 시청하며, 창녕에 도착하여 창녕 맛집으로 널리 알려진 '김숙녀 시래기 밥상'에서
저녁공양으로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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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