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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서적 읽고 독후감 쓰기
알 수 록 재 미 있 는
그리스도교
2
이야기
일월성당 삼환지역
김홍찬 모데스타
저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회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우리 사회를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사회로 바꿀 수 있고 과거에는 필요할 때 마다 수도회들이 생겨나면서 복음을 새롭게 선포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전문화된 평신도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고 이런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 사회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다고 한다. 평신도인 내가 이번 신심서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할 힘을 기르고 싶다.
그리스도 이야기 2의 내용은 14강 카를 대제의 문예 부흥과 수도회 개혁 15강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스콜라 철학의 태동 16강 세상의 사랑에서 천상의 사랑으로 17강종교 간의 전생과 그리스도의 평화 18강 이슬람 문화와 아리스토텔레스 19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교회의 위기 또는 기회? 20강 교회와 함께 성장한 중세 대학 21강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 22강 서구 지성사의 금자탑,《신학대전》23강 돌로 만들어진 천상 예루살렘 24강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5강 빛을 잃은 교회와 흔들리는 신앙 26강 에필로그-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대한 내용이다.
세계의 최고 통치자인 카를 대제가 빠르게 프랑크 왕족을 넓혀 유럽을 통일하면서 새로 정복한 영토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려는 행동을 반기고 로마를 위협하는 세력을 정벌해 준 것을 계기로 교황은 카를대제에게 황제가 되길 권고하고 이에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권위를 얻고 싶었기에 교황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카를대제가 혁신적인 교육개혁을 생각하던 중에 종교개혁에 참가했다가 적임자 앨퀸을 만나 수도 아헨에 궁정학교를 열게 되고 카를대제의 문예부흥이 시기에 아름다운 성경들이 널리 보급된다. 문맹률이 90퍼센트가 넘었고 카를 대제도 앨퀸에게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은 티내고 싶지 않아 밤마다 침상에서 글을 연습하고 책읽기를 시작했던 카를대제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제국을 만들기 위한 적임자라고 부제였던 앨퀸은 생각하고 그의 개혁을 도와주는 일에 집중했다.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어두운 필사실에서 손이 얼어도 그리스도 제국이 완성되는 이상을 꿈꾸며 펜을 놓지 않았고 엘퀸의 역할을 베네딕도 수도회가 이어 받아 게르만 민족의 학문적인 못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소규모였던 수도회가 카를 대제 이후 체계화되면서 최초의 통합된수도원이 생기고 ‘기도하라’쪽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나타나자 베네딕투스가 귀족화된 수도회를 질책하며 청빈·정결·순명을 강조하는 초기 수도회 본래의 모습인 ‘기도하고 일하라’를 찾고자 육체노동을 통해서 자급자족하는 시토회를 창설하며 수도원이 개혁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왔음을 저자는 기억했으면 좋다고 한다.
카를대제나 베네딕투스가 그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면서 부흥과 변화를 가져오듯이 신앙인으로서 현재의 내가 갖고 있는 문제-주님에게 받은 사랑을 삶 안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점-를 잘 파악하고 앨퀸과 같은 이상을 품으며 성실한 노력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
신앙과 이성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에 대해 신앙이 먼저라고 하며 “나는 믿기 위해 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한 대목에서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살면서 믿기 위해 이해하려 노력한 부분이 더 많았기에 안셀무스라는 인물이 내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켄터베리에의 안셀무스는 사춘기 시절 신실한 신앙을 가진 어머니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집을 나와서 유명하다는 수도원을 돌며 공부를 했고 란프랑쿠스를 만났을 당시 어두웠던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화해를 하고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수도원에 입회한지 2년 만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느낀다. 나에게도 털어버리지 못하는 그래서 어두운 부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본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의 신비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이성적인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변증론자들에게는 “믿음을 전제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다”라고 하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여 이성을 거부해 철학은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비난하여 철학은 신학의 고유성을 훔치기 위해 만들어 낸 ‘신학의 시녀’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변증론자들에게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태만이다”라고 하며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기며 신앙과 이성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며 신앙심을 단순히 그대로 보전할 석이 아니라 점점 키워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하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며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교회가 영국 국왕에 매인 하녀가 되어 자유롭지 못함에 충고를 하면서 두 번이나 유배를 갔다.
저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때 저자는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고 하며 질문을 던지다 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안셀무스의 표현처럼 오만하기도 하고 태만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도 사실 많지 않으니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위한 노력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맹신적인 신앙의 모습이 내 안에 있는지 이성적으로 잘 가고 있는지 생각하고 반성하며 살아갈 일이 앞으로 살면서 계속해서 풀어 나가야 할 숙제다.
수도원 학교, 궁정학교, 주교좌성당 학교가 있었음에도 자유도시가 발달하면서 개인학교가 생겼고 철학자들의 도시인 파리에 가장 많이 세워진다. 아벨라르두스는 프랑스 팔레라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개인학교를 모두 섭렵하며 교사보다 더 뛰어났고 사춘기 정도에 직접 강의를 하다가 성공하면서 파리로 진출하여 12세기 최고의 명강사가 된다. 자신의 학교를 살리기 위해 논리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기욤의 수업을 들으면서 공격적인 토론으로 기욤을 이기고 논리학을 평정한 후에는 만학의 학문이라 불리는 신학이라는 새로운 산을 넘어 보고자 학생이 되어서도 일인자자가 되려고 강의를 들으며 공격할 점을 찾아 정리 한 것이《그렇다와 아니다》로 질문을 던지고 ‘그렇다’와 혹은 ‘아니다’로 정리되는 형식은 토마스 아퀴나스도 받아들일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빨간책으로 취급 받았다. 랴옹의 안셀무스를로 패배시키고 당시 승승장구 하던 시기에 고위 성직자의 조카딸 엘로이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면서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은 중세 최대의 연애 사건으로 두 사람은 도피하여 아들까지 낳고 살았지만 결국 헤어져 각기 수도원 원장이 되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고 주님 안에서 서로 자문을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살다가 아벨라르두스가 죽자 에로이즈는 자신이 묻히게 될 자리에 시신을 묻었고 에로이즈도 그 옆에 묻힌다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다.
보편과 개체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서는 위험하며 양자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벨라르두스의 가르침이고 균형을 잡고자 노력한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벨라르두스의 일기 제목이《나의 불행한 역사》라며 저자는 신앙 없이 인간적인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할 때 완성보다 실패하기 쉽기에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럼에도 개인의 소중함과 인간의 자유가 중요함을 두 사람의 사랑이 주는 교훈이라 한 점에 나 또한 공감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 개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며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피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매사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며 살아가야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1096년부터 1291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친 종교 전쟁은 셀주크 투르크족이 예수살렘을 점령하며 일어나는 비극을 안 교황이 성지를 지키려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는 외침에 자극을 받고, 축적된 부로 전쟁준비를 할 수 있었으며 뛰어난 무술을 가진 이가 토지나 부와 명예를 쟁취하려는 욕구와 새로운 경험에 대한 동경, 성화상 논쟁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사랑과 자비를 외치던 그리스도가 이슬람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며 악은 악을 불러 2003년 이라크 전쟁이후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테러가 계속이어지는 악순환은 이미 십자군 전생 때부터 지속되는 아픔을 낳고 있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십자군 전쟁이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전쟁에 이용했을 뿐이고 하느님은 오롯이 향유되어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하느님을 사용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것에 나 또한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느님을 수단으로 사용했기에 부끄럽게도 할 말이 없음을 인정하며 앞으로 살면서 십계명 중 2계명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를 잘 명심하고 하느님을 목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한 안셀무스는 교황에게 전쟁을 멈추길 요청했고, 허름한 옷을 입고 십자군 기사들의 옷을 잡고 “안 됩니다. 복음에는 사랑하라고 나와 있습니다.”라며 전쟁을 말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슬람의 술탄까지 찾아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가뭄에 단비처럼 복음과 기쁨을 전해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살아가면서 생기는 다툼과 쟁취 상황에서 안셀무스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처럼 평화와 사랑의 복음을 실천하려는 말과 행동을 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깨닫는다.
중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의 한 복판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으며 그를 이해하려면 이슬람 문화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스승 플라톤은 저 너머 이데아의 세계에 주목하고 뛰어난 제자들 둔 덕에 900이나 이어졌지만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살고 있고 관찰 가능한 자연세계 주목하며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으로 유명하지만 제자들이 뛰어나지 않아 학파가 이어지지도 못하고 책들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지만 이슬람세력에 의해 그리스어 원본과 시리아어로 번역된 책을 발견하고 중요성을인식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책들이 모두 아랍어로 번역이 되어 별다른 문화가 없었던 이슬람에게 그리스 과학과 문화가 폭발적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의 영향을 입어 식물도감, 종합병원, 화학, 천문학, 커피, 레몬, 염료, 항해 기술 등의 문화가 아랍에서 비롯되었다니 발달된 아랍 문화의 뒤에는 아랍의 철학자가 있었고, 그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기에 가능하였으며 이로 인해 15세기 전까지는 서방보다 동방의 문화가 우세하였다. 12세기 정도부터 아랍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다시 라틴어로 옮겨 쓰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주로 수도원에서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공부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는 시대의 표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필사에 참여하게 된다.
저자는 공부할 책을 마련한 필사자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종교와 문화의 중심은 계속해서 옮겨가기에 타종교도 인류 문화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서로 싸우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지, 누가 더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지 등의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나도 타인의 삶은 존중하고 사랑과 자비와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과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깨닫는다.
12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대한 강의가 충분한 학식과 비판 능력이 있는 교수들은 연구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운 창조 개인적인 구원 하느님의 섭리와 기적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세계의 영원성, 단일 지성론(죽음의 순간에 지성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우주적인 지성으로 넘어간다), 자연법칙의 절대화를 사상을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그리스도의 교리와의 충돌이 생기게 되어 교회와 긴장 관계에 생기고 그에 대한 강의 금지령이 내려진다. 13세기 이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가 많아졌고 돈이 있는 도서관에서는 그의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지만 책이 너무 어려워 아베로에스가 쓴 주해서가 200년 동안 지배하여 14세기 까지 가장 많은 필사본이 나오고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생기도 대표적인 대 알베르투스는 그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맞을 때는 “오 놀라워라, 하느님의 은총!”이라 외치며 감탄했고 맞지 않는다면 생각하며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라고 쓰며 비판하고 수정했다. 양도 많고 어려운 책을 새로 주해서를 작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읽을 수 있기를 열망을 담고자 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이어 받은 사람이 천사이자 박사이자 교수인 토마스 아퀴나스다. 저자는 주체성을 잃지 않고도 충분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 덕분에 점점 더 발전할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생기지만 개방적인 태도로 주체성을 잃지 않은 가운데 스스로 탐구하고 비판적으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자세를 나 또한 삶 안에서 따라할 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공부의 기회를 주고 수도원장으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얻길 바라던 부모에 의해 유치원생 나이에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 책 읽기를 좋아하며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수도원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나폴리 대학에 들어간다. 나폴리 대학은 황제가 교황권에 대항할 힘을 기르고자 만들어 졌고 대학을 특성화시키기 위해 방법으로 교황청 직속 대학이 금지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유롭게 연구하고 싶은 학생들이 유럽 전역에서 몰려들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들의 길거리 설교에 매료된 토마스 아퀴나스를 처음에는 몸집이 큰 그가 거지수도회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받아들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며 총장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어머니께 수도회에 들어간 내용과 파리 대학에 간다는 사실을 받아주길 바라는 편지로 보냈다가 형들에게 잡혀 탑에 가두고 맛있는 음식을 준다고 설득하고 아리따운 여인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붙들려는 했지만 여인을 악마라 생각하며 내쫓고 1년 동안 어머니의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고 파리 대학에서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대大알베르투스를 만났고 퀼른 대성당 옆 수도원에도 사제지간의 정을 깊이 쌓았다. 스승은 악필인 제자의 글을 접한 이후에 토론자의 발표자로 세우고 선배들에게 몸집이 크고 말이 없고 ‘벙어리 황소’라는 불리었던 그를 “저 벙어리 황소가 입을 여는 순간 온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다.”한 예언이 실현되어 파리 대학의 교수로 보내기로 결정을 한다. 49세의 짧은 나이에 400권에 이르는 책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의 훌륭한 저서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신학대전》이며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4천개가 넘은 질문에 대한 답을 60권 정도의 방대한 철학을 통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꿈꾸었던 대단한《신학대전》을 나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1273년 12월 6일 미사를 드리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제대 앞에서 몸이 멈췄고 이후 책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나는 더 이상 책을 쓸 수 없다네. 그날 내가 바라본 그 광경에 비한다면 내가 써 온 모든 것들은 지푸라기와 같다네.”라며 미완성의《신학대전》을 남겼지만 가톨릭교회에서 19세기 말에 공식적으로 ‘서구 지성사의 최고의 금자탑’이라고 인정하며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스승으로 세웠다.《신학대전》의 서술 양식은 4개의 고정된 부분으로 나누어 탐구하는 서술 방식으로 1번은 논박될 이론(그렇기 않을 것 같다)을 소개하고 2번은 반론(그러나 반대로)을 소개한 3번은 본문(나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논거가 나오고 4번은 논박될 이론에 대한 해답으로 1번과 2번이 주로 역사적인 권위에 의거한다면 3번과 4번은 거의 합리적인 철학적인 논술이 펼쳐진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무엇이 올바른지 생각해 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본받아 하느님이 주신 다양한 보화를 통해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저자는 말처럼 나도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생각을 무조건 밀어내거나 무조건 받아들려 하지 말고 무엇이 올바른지 생각하면서 실천하는 태도와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종교적인 상징성을 지닌 성당의 건축양식에도 바실리카 양식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발전하고 다시 고딕 양식을 발전하며 당시의 시대상과 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이념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유럽 해외여행이나 성지 순례 시 이러한 건축 양식의 종교적 정보를 안다면 더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아주 초기부터 정치와 연결이 되어있다. 황제는 교회의 권력을 가지고 싶어 했고, 교황은 세속의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면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 의 위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는 하인리히 4세 황제의 카노사의 굴욕으로 인한 교황권의 강화가 되는 듯 했지만 그 이후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을 폐위시키면서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은 교황권이 강해지면서 십자군 전쟁이 생기고 또한 대학 간의 경쟁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십자군 전생의 실패,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 흑사병, 세속군주의 성장과 교회 내부의 문제, 서방 교회의 분열로 교황의 권위는 급속도로 추락했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잡혀가는 ‘아비뇽 유수’(교황청이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70년간 머무른 사건)로 교황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지고 세금을 거둬들이면서 교황청이 세속화된 때가 바로 아비뇽 유수 시기이며 이 사건을 통해 배울 교훈을 저자는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많지 않지만 가난한 교회, 나누는 교회, 정의로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가에 따라 자유로움이 확보되기 때문에 진정한 교회의 의무를 위해 한번 되돌아보길 저자는 권한다. 나도 신앙인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가난한 삶, 나누는 삶, 명예나 권력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길이 내가 추구할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 혼란과 계속되는 전쟁과 아비뇽 유수 등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어머니로서 더 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서양인들은 교회를 떠났고 문화적인 영향력도 약해졌다. 중세 말에도 새로운 목욕 문화와 향략 문화가 발달하고 보카치오는《데카메론》에서 교회와 성직자를 비웃고 중세 예술의 주제는 ‘죽음’이 되었으며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를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중세 전체를 이끌어 온 목표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아벨라르두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하느님이 결정하신 것, 그것이 곧 선이다.”라는 반이성주의 경향이 오컴을 통해 퍼져나갔고 위클리프는 예수님의 성체가 변화된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마술적인 것이라 치부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교황이 세 명이나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때에 체코의 신학자 안 후스는 교회가 단죄되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였고, 올바른 사실에 대해서는 받아들여야 하고 교회는 복음적 가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락한 성직자를 강하게 비판하고 양형 영성체와 자국어 성경의 필요성 주장했지만 공의회 결정으로 화형에 처하며 악명 높고 의미 없는 공의회 중 하나가 되었고 보헤미아 교회와 로마 교황청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다.
이후로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고 믿게 되고 여성 신비가들이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했고 성인 유해 공경이 유행처럼 퍼져나갔고 평신도 중심의 신비주의가 확산되었다. 교황이 발휘하던 힘은 사라져 버리고 세속화가 많이 진행되면서 교회는 경직되었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고통 받은 신자들을 제대로 이끌어 주지 못했지만 토마스 아 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며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세속적인 사람들과 향략 문화를 쫒아가고 있지만, 이것으로 진정한 복에 도달할 수 없고 새로운 영적인 것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쓴 책《준주성범》으로 개인적이고 영적인 종교 감성에 호소하는 등 근대의 신심 운동은 몰락해 가는 중세를 되살리지 못했다.
저자는 중세 말기의 상황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는 위기를 맞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등을 돌리지 않고 교회와 함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며 용기를 내어 우리 모두 함께 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저자의 바람을 생각하며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순가부터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가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도록 살아가야 하며 그 실천 속에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균형 잡힌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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