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과정
1. 동독정권의 붕괴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을 철거한 일을 계기로 동독 여행자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헝가리,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과 동베를린 주재 상주대표부에 동독 탈주민들이 쇄도했다. 1989년 9월 10일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고 동독 주민의 출국 여행을 허용함으로써 9월 말까지 3만 명 이상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주요 분야의 인력들이 서독으로 이주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한편, 1988년 1월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기념행사를 계기로 동독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1989년 5월 지방선거의 부정으로 인해 저항세력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 초여름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수백 명이 여행의 자유 등 개혁을 요구하며 월요시위를 시작했다. 월요시위는 10월 9일에 7만 명, 10월 16일에 12만 명, 11월 6일에 50만 명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10월 말 일어난 시위가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1월 4일 동베를린 시위에 100만 명이 참가하였다.
1989년 10월 17일 정치국 회의에서 동독 총리 슈토프(Will Stoph)가 호네커(Erich Honecker)의 사임을 주장하고 이러한 제안을 정치국원이 지지하였다. 다음 날, 호네커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를 발표한 후 에곤 크렌츠(Egon Krenz)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12월 1일 동독 헌법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이 삭제되었고, 1989년 12월 3일 동독 공산당 중앙위와 정치국이 해체되었다. 그런데 주민들의 개혁요구가 여행, 언론의 자유에서 자유선거 등으로 고조되어 간데 반해, 동독 지도부는 시의 적절한 개혁을 거부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2. 콜 총리의 10단계 통일방안
1989년 11월 20일 라이프치히, 동베를린, 드레스덴 등지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민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요구하였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막고, 동독 상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통일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1989년 11월 28일 <조약공동체⇒ 국가연합적 구조⇒ 연방식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10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3. 콜-모드로 정상회담
1989년 12월 19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양 독일 정상 간 회담에서 1990년 4월까지 양 독일 간 조약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합의하고, 조약 체결을 위한 분야별 정부 간 협상을 개최하였다. 모드로 총리는 자유, 평등, 비밀, 보통 선거의 4대 원칙이 보장되는 민주적 선거법을 제정하고, 시장경제원칙에 따른 정책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헌법 및 형법을 개정하고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1990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제2차 정상회담을 서독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4. 동독 최초 자유총선거 실시(1990년 3월 18일)
1989년 가을 동독에서 변혁(Wende)이 시작되면서, 서독정부는 동독 측에 민주화와 개혁, 특히 자유선거를 실시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를 위해 여행, 언론, 정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포기할 것과 정당설립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개혁도 요구하였다. 이에 한스 모드로(Hans Modrow) 동독 총리는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원탁회의와 협상을 벌여 동독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기총선에 합의하였고, 원래 5월 6일로 예정된 총선을 3월 18일로 앞당겼다. 서독정부는 동독의 선거를 위해 물적, 인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정당과 정치인은 자매정당을 조직하고 선거 유세를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서독 마르크화(DM)의 즉각적인 도입과 조속한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기독교민주연합 중심의 ‘독일연맹’이 승리함으로써 화폐통합과 통일과정이 가속화되었다.
5. 동·서독 화폐 경제 사회통합의 달성
동독과 서독은 ‘선 경제개혁 후 화폐통합’이라는 단계적 통합방안도 고려하였지만, 동독 이주민의 증가, 동독 주민의 서독 마르크화(DM) 도입 요구,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상실 등 정치 경제 사회적 이유로 인해 급진적 통합을 결정하였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 동독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서독은 단계적 통합에서 조기통합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
콜-모드로 제2차 정상회담(1990년 2월 13일 ~ 1990년 2월 14일)에서 콜 총리는 특정한 날짜를 기점으로 하여 동독의 통화단위 및 법적 지불수단을 서독 마르크화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양 독일 간 화폐통합과 경제공동체 형성을 위한 협상기구인 ‘공동전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1990년 4월 25일에서 5월 17일까지 6차례 전문가 전체회의와 소회의가 개최되고, 1990년 5월 18일 동독과 서독은 화폐· 경제·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에 서명하는 등 자유선거에 따른 민주 합법정부의 출범 후 화폐통합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6. 독일 통일을 위한 대외 협력
1990년 2월 12일에서 13일, 오타와에서 북대서양조양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와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 회원국 간에 ‘영공 개방(open sky)’회담이 개최되었고, 독일 통일과 그 관련국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2+4 회담’의 개최가 합의되었다.
독일 통일에 대한 대외적 장애요인 중 가장 큰 것은 통일 독일의 동맹체 소속과 독일과 폴란드 간의 국경선 문제였다. 1990년 7월 15일에서 16일, 이틀에 걸친 독·소 정상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회원국 잔류에 동의하였다. 이후 1990년 9월 12일 4차례 외상회담을 통해 ‘독일 관련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2+4 조약)’에 합의하고 서명하였다.
7. 독일 통일의 완성
1990년 8월 22일 전독총선을 위한 선거협약이 체결되었다. 1990년 8월 23일 동독인민의회는 기본법 제23조에 의거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편입하기로 결의하였다. 1990년 8월 31일 통일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서독 각 부처는 동독의 현행 법률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서독 법규의 독일 전지역 적용 여부를 조사하고, 동·서독 부처 간 협의를 통해 통일조약 조문을 작성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었고, 1990년 10월 4일 베를린 제국의사당에서 최초의 전독의회가 개최되었다. 전독의회에는 구동독 인민의회 의원 144명도 참석하였다. 이후 1990년 12월 2일 전 독일 총선이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