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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을 찾아서 ------------------------------------------------------------------------------- 이동근/문숭리
필부는 지난 4.14-15. 양일에 걸려 충남 부여로 신동엽 시인을 찾아 문학순례를 다녀왔다. 10여년 전 필부의 제2의 인생에 모토가 되어 준 방송통신대 국문과 동아리 중 하나인 문학기행반 일원으로 동행을 했다. 언젠가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순례를 다녀 온 후 한참 만이다. 그 때는 하모사랑에서 인연이 된 연상의 누님이자 문학소녀와 함께 하모니카 여행도 겸했던 기억이 새롭다.
충남 부여라! 필부에게는 남다른 인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우선 부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젊은 학창시절 대학 졸업여행으로 1박 2일 단촐하게 다녀온 곳이 바로 부여였다. 그 당시는 부소산성 인근의 고란사와 낙화암... 그리고 백마강에서 유람선을 승선해 본 것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인연은 불혹이후 십 여년 간 생업차 호구지책의 일환 으로 전국 농어촌을 무대 농부들에게 작업복을 팔러 주유천하 하던 날에 수 많은 날을 들락거린 지역이었다.
전국 3대 수박 재배지(경남 함안, 전북 고창, 충남 부여)의 하나와 부여 세도면 방울토마토가 그 지역을 오고가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 지역은 어찌보면 고향만큼이나 정이 들었고, 앉아서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그 정도로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이 번 세 번 인연은 단순한 방문이 아닌 구도자의 심정으로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오래전 생을 달리한 충남 부여가 낳은 소설가 이상이 소설가로서 특별한 여운을 주고 갔다면 시인으로서는 모름지기 신동엽 시인이라고 필부는 주저없이 말을 할 수 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필부와 함께 신동엽 시인을 찾아 부여로 떠나 볼까요?
그 언제였던가? 두 번째 인연으로 부여를 내 집 문지방을 넘나듯이 들락거리던 날에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쓴 시가 하나 있었다.
길을 가다 보니 문숭리
길을 가다보니 어느 마을 입구에 김씨가 죽었다는 김씨 호상소 표지판이 보였다.
또 한참을 가다보니 이 번에는 박씨가 죽었다는 박씨 호상소 표지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는 내가 죽었다는 이씨 호상소 표지판도 보일게다. (2001. 9.21. 오후 부여에서)
- 내 고향 충청도, 문숭리 저, 도서출판 젤 기획 P.51~52에서)
그렇도. 실존주의 철학자 K.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고뇌, 고독, 투쟁, 죽음)에서 어머니라는 여자의 뱃속에서 세상에 논 우리는 그 누구도 죽음을 비껴갈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인간의 한계이다. 다만 손가락의 길이가 차이가 나듯 수 명의 차이일 뿐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생을 달리한다. 하지만 그들을 다 기억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왜? 신동엽 시인같은 특정한 사람들을 앞세워 추모하고 후대가 그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가?
바로 그 답에 대한 실마리를 일부나마, 아니 빙산의 일각일지라도 그 끝을 찾아서 필부는 나선 것이다.
방송통신대 국문과에서 문학을 섭렵하던 날에 희미하게나마 시험을 위한 신동엽 시인의 시와 그의 생에 대해서 바람에 스쳐가듯 배운바 있다.
그저 기억하는 것은 그의 시, <껍데기른 가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인연에서 그의 묘소가 있는 인접 마을 수박단지 농부를 찾아 생업을 이어가던 날에 세월에 못 이겨 쓰러져 있던 그의 묘소 표지판이 전부였다고나 할까?
그를 잠시 잊고 있다가 이렇게 기회가 되어 다 가까이 그에게 다가가 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지금은 귀향내지 귀농을 해서 나 홀로 거주지가 내 고향 충청도 충주지만 서울 떠나오기 전만 해도 광진구 능동에서 오랜 세월 머리를 두고 있었고, 내 가족이었던 인연은 길 건너 중곡동 어딘엔가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서울을 떠나왔으면서도 서울이 나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으려고 한다.
광진구 능동에 살던 시절에 전국 주유천하 농어촌을 떠 돌아 다니면서 성수동에 있는 방송통신대 서울지역 제1학습관이 또 다른 제2의 대학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대다수 모임이나 여행이 성수동에서 출발하는 경우라. 필부는 충주에서 상경을 하여 성수동에서 부여로 향하는 문학순례 버스를 승차를 해야만 했다.
4.14. 오후 4시 출발이었다. 오전에 농사일을 정리하고 부랴 부랴 서울로 향했다. 동서울 터미날에서 직접 뚝섬역으로 가면 되지만 신설동에 들려와야 하는 사정이 있다 보니 시간에 쫒기었다.
아스라이 4시 정각 즈음에 도착을 했는데 다소 출발은 2~30분 후에 이루어 졌다. 사전에 신동엽 시인 전집이라도 한권 사서 읽어보아야 할 일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간과하였는데 당일 토론을 위한 기행 책자를 버스 출발에 앞서 배포를 했다.
그래 마음먹고 필히 신동엽 시인이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표지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를 외워보 자. 암송을 잘 하면 상품도 있다니 알먹고 꿩먹는 일인데 말이다. 굳이 안 외워도 필부를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필부가 가장 많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하모사랑 회원중에 색동저고리 라는 분이 고희가 넘으신 분이 자신의 시도 아닌 많은 시인들의 시를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입에서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오듯 암송하시는데 필부는 이제 겨우 50대 중반이면서, 시인이고, 자신의 시도 수 백편 되는데 제대로 외우고 있는 시가 고작 10개 미만이다. 부끄럽지 않는가?
이번 기회에 필부도 한 번 당당하게 시를 외워서 이번 기행팀 회원들 앞에 서 보리라 마음 먹었다. 자신만만하게 두 세번 읽다보면 외우겠지? 하지만 50번 정도 반복을 해야 했다. 중간지점 공주 정안 휴게소에 쉬어갈때야 겨우 머리에 시 한편이 자리잡았다.
무작정 외우다가 안 되어... 하는 수 없이.. 정형시 기본 틀인 기(3). 승(3) . 전(7), 결(4)에 행 수를 세어서 3374 수법으로 정리를 했다. 전형적인 정형시에 껍데기는 가라 가 6번 반복되는 반복적 수법으로 쓰여진 이 시는 정말 감각적인 운율로 배열되어 있는 시이다.
충남 부여읍 시내 동남리에서 해설사에 의하면 김소월의 시를 끼고 살던 신동엽 시인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민족적인 시풍에 민속적인 우리 고유의 운율적 행 배치에 극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춘향이라도 필부의 머리속에 안 착을 할 수 있었나 보다.
천안-논산간 고속국도를 타다가 남공주로 나와 부여로 향하는 어둑 어둑한 사위속에서도 10여년 이상 들락거린 그 흙냄새는 이내 마음에 사무치게 밀려들어왔다. 눈을 감아도 지금 여기가 어디라는 것을 어찌 모를리가 있으리요. 도착하자 마자 부여 청소년 수련원 숙소 방 배정을 마치고 곧이어 신동엽 시인에 대한 작가론, 작품론과 더불어 토론이 이어졌다. 서 너 시간 열띤 분위속에 밤은 깊어갔다. 자정을 한 두 시간 남기고... 이내 그렇게 신동엽이가 멀리서 가까이 다 가와 필부에게 속삭였다. 껍데기는 가라. 지금까지 나 자신이 살아오면서 진정한 나의 알멩이는 무엇이고, 껍데기는 무엇이었던가?
할 수만 있다면 기행 주제에 따른 생존 작가나 아니면 전공자를 초대를 하기도 하지만 이 기행은 선배 동문출신 졸업생이 사전답사를 거쳐 작가, 작품론을 준비하여 발표한다는 기본 취지가 마음에 든다. 생활이 현실을 속일 정도로 각박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가운데에서도 문학을 베개삼아 잠을 자고자 하는 정말 문학을 사랑하는 선후배가 하나가 되어 이렇게 1년에 서너 차례이지만 문학체험내지 순례여행을 하면서 토론을 한다는 것은 그 누가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
- 기행반 전임 재학생 회장에 대한 공로패 전달, 수고했습니다. 감사!-
( 신동엽 시인에 대한 각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그의 시에 대한 문학토론 장면... 진정한 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배움에 대한 문고리를 지속적으로 이어갈때 학생이라 하지 않을까요? )
자비어 안지 어지락(子非魚 安知魚之樂, 그대가 물고기가 아니기에 어찌 물고기의 기쁨을 알겠는가?)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문학의 밤이었다.
이어서 이어지는 뒷풀이 또한 여행 중에 작은 낙이 아닐 수 없다. 한 식구가 되는 것은 역시 식구라는 표현에서 먹을때가 가장 돈독한 분위기가 있을까? ㅎㅎㅎ
필부는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온 탓인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잠을 청해야 했다. 다를 새벽 3~4시까지 주안상에 열띤 밤을 지새웠다고 하는데...다음날 아침은 또 다른 신동엽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생가, 시비, 묘소를 찾아 나서고... 다음에는 부여 유적지 탐방도 이어진다.
시와 토론속에서 만나보았던 신동엽 시인의 실제 흔적을 찾아나섰다. 숙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같은 읍내라 쉽사리 접근을 했다. 직접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필부도 그 집 앞을 수 없이 지나치곤 하던 곳이었는데 이제사 그의 살던 생가를 들려본 것이다.
부여 군청 관광과에서 나온 문학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국문과 동문이란다. 반가운 일이었다. 50대 중반이 넘어보이는 필부 나이 엇 비슷해 보였다.
신동엽 생가와 더불어 그의 가족사, 그의 인생에 대한 해설을 격의 없이 부여에서 살아오면서, 아닌 생존해 있었던 그 당시 신동엽 시인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여과없이 들려 주었다.
- 귀는 해설사 음성에 눈은 신 동엽 시인 아내 인병선 여사가 쓴 현판에 머물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의 만남을 인생 최고로 생각하고 남편에 대한 애정이 신 동엽 시인의 존재를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한 것도 그녀의 헌신적인 남편사랑이었다. 인병선 여사가 이화여고 1학년 시절 신동엽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에 들락 거리던 날에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 부부가 되기전 인병선 여사는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을 하였는데 신동엽 시인과 결혼하여 그의 배필로 신동엽 시인의 뒷 바라지를 하려고 학업을 포기하였고... 훗날 불우한 세월속에 신동엽 시인이 처해 있을때에도 양장점을 열어 생계를 책임지고... 신 시인이 39살에 요절을 하지만 뒷날 그가 진정한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생가에 걸려있는 이 시가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많은 보수 문학인이 신동엽 시인을 좌파 성향의 문인으로 치부를 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문화해설사를 하면서 알게 된 신동엽 시인은 그 누가 무어라 해도 민족시인으로 분류함이 타당하다는 말을 힘주어 강조를 했다.
-- 우리는 살고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
좌파 성향의 문체 냄새가 날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는 동학 농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남북의 통일을 간접적으로 시를 통해서 역설한 그런 시인이라는 것이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산에 언덕>이라는 시는 서정적이면서 민속적 향취가 절로 배어나오는가 하면 그의 시가 역사성을 배경으로 민중을 사랑하는 민족적인 색체가 강하다는 것을 대표시 중에 또 하나인 장편 서사시 <금강>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언제 다시 꼭 그의 평전에 가까운 신동엽 전집을 구입해 보고 싶은 충동이 절로 나는 격의 높은 문학해설사의 언변이 필부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던 날이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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