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천(조목)선생실록(月川先生實錄)
월천이 퇴계 선생을 오담(鰲潭)가에서 모심에 말이 ‘중류지주(中流砥柱)’에 미치자 퇴계 선생께서는 “우리 고을에 그것이 있도다.”하니 월천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 하였다. 퇴계 선생은 물속에 서 있는 바위를 지시하면서 말하기를 “저것이 지주다”라고 하였다. 월천 선생께서는 노경에 나에게 말하였는데, 나는 직접 그 말씀을 들었다.
월천 선생은 평소 대소변을 봄에 있어서 해와 달이 곧바로 비취는 앞에서 하지 않았다. 또 평생 작옹(雀甕)의 독(毒)을 입지 않았다.
월천 선생이 어버이의 묘소에 성묘하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니 권생이 술과 실과를 가지고 뒤따라 와서 손자들로 하여금 묘소에 다시 술을 치게 하였다. 손자들이 내려 올 때 향불을 향로석(香爐石) 아래에 쏟고서 돌아왔다. 조금 뒤에 그곳에서 불이 나 묘소를 모두 태웠다. 선생께서는 깜짝 놀라 묘소로 달려가서 슬피 운 뒤에 흰 옷과 흰 띠를 매고 3일을 지나고 또 3일 동안 고기반찬이 없는 밥을 먹었다.
부인의 남자 종이 다른 종과 결혼을 하여 자녀를 많이 낳았다. 부인의 생질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모든 종들은 여자종을 자기 아내로 삼게 되면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면 노비의 상전께서는 법도에 의당 그들을 잡아야 하는데도 완전히 거론하지 아니하니 빨리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그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그 자녀는 마땅히 그 아버지의 상전을 가져야 할 것이니 무엇 때문에 그를 다스리겠는가. 이것은 식견이 있는 사람은 행하지 아니할 일이다. 다시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생질들은 모두 할 말 없이 물러났다. 남자종이 그 일을 듣고서 감격하여 딸을 팔아서 선생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저를 대신 한 것입니다’ 하고 하였으나 선생께서는 상관하지 아니하였다. 사람들마다 이 일을 듣고서 감격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 2년 동안 왜적들이 날뛰고 기근이 이어졌는데 얼제(孼弟)가 매우 굶주려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사람 얼굴에 귀신 형상을 하여 반걸음도 옮기지 못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는 스스로를 연명하기에도 힘들어 내 힘이 너희들의 처자식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너 한 몸뚱아리는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라고 하여 날마다 아침저녁을 나누어 마시니 얼제는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면하였다 한다.
선생께서는 때때로 출입할 때에 말이 올라탄 뒤로는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말머리만 똑바로 쳐다보며 갔다 한다.
생신날에 자식들과 사위 그리고 친족들이 술을 가지고 오면 반드시 물리쳐서 나중에 그처럼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한 뒤로는 항상 삿갓을 쓰고서 손님을 맞았다.
난리를 만났을 때에 감사와 수령들은 선생의 집안 살림살이가 가난함을 생각하여 쌀과 콩을 보내어 그 궁핍을 구제하였는데 받지 아니하고서 말하기를 “지금처럼 군량미도 부족한 때에 한 말의 쌀도 오히려 어렵거늘 이 늙은이가 이것을 받는 것은 법도가 아니오.”라고 말하며 굳게 사양하여 돌려보내었다. 또 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안동의 쌀과 콩을 가지고 직접 와서 주며 속마음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물리치지는 아니하였다.
77세시에 선조께서 여러 번 소명을 지극히 하였으나 매번 부임하지 아니하니 알만한 여러 원로들은 굳게 사양함을 미안하게 여겨 조정에 나아갈 것을 권하니 부득이 가묘에 하직하고 길을 오르면서 눈물을 떨어뜨리며 “산림(山林)에서 늙어 죽는 것이 내 소원이거늘 흰 머리 흩날리며 왕의 부름에 나아가니 평소에 내 마음을 져버리는 것이 못내 부끄럽구나.”라고 하며 근심스러움이 얼굴에 가득한 채 억지로 말에 올라 겨우 영천(榮川)에 이르러서 사퇴를 올리고 곧바로 돌아왔다. 소명은 공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나라의 말을 타고서 급히 명을 따른 때였다.
임진년(1592) 여름 4월에 왜적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서 출동하여 곳곳에서 성을 함락시키고 곧장 전진하여 서울에 가득하니 선조는 5월 초 3일 밤중에 서울을 버리고 평양성을 향하자, 도성은 도적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선생께서는 이 같은 기막힌 사건을 듣고서 분천으로 달려가니 이매암(이숙량)과 길에서 서로 마주쳐서 그 근처 길모퉁이에서 서울을 향하여 통곡하고 각자 헤어졌다. 또다시 매암(梅巖)과 함께 향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상의하니 생원 금응훈(琴應壎)으로 도통(都統)을 심고 한림(翰林) 김해(金垓)로 부통(副統)을 삼았으며, 김기(金圻) 및 저작랑 김택룡(金澤龍)을 정제장(整齊將)을 삼았다. 얼마 뒤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한림 김해를 추중하여 좌도의병대장(左道義兵大將)으로 삼았다.
노복이나 불순한 사람은 사건마다 법전에 의거하여 구구절절이 깨우치는 말을 하여 너무 심함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을 스스로 두려워할 줄 알게 하였다. 평소에 집안에서 거처할 때 문하의 선비들에게 말하기를 “노비가 주인의 일을 함에 있어서 간혹 공손하지 못할 때가 있으나 어찌 그들을 심하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노비는 주인에 있어서 의리로 서로 만난 자들이다. 나를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의 말을 타고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이 있는 데도 길을 떠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였다. 하물며 저들은 집안에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 일을 담당할 시각이 없을 것이다. 또 주인의 눈앞에 떠나지 못하니 어찌 괴롭지 아니하여 즐거울 수 있겠는가. 덥고 습한 것도 피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인의 명만을 따라서 하니 되돌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라 하였다. 본 집의 노비를 호주로 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되와 말을 정확하게 대어 주니, 마을에서 세를 받는 사람들도 감격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선생은 술을 즐기셨으나 크게 취함에 이르지는 아니하였고 조금 술이 오르면 화기가 얼굴에 가득할 뿐이었다.
소, 말, 닭, 개, 양,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단지 꿩과 물고기를 자실 뿐이었다.
임종할 즈음에 혈기가 떨어지자 손발이 마비되니 의원이 말하기를 “물이나 음식을 차게 먹지 말면 나중에 그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나이 이미 80을 넘었으니 이 같은 병이 있을 수 있다. 어찌 구차하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소변을 볼 때 자질 등이 요강을 대령하면 직접 그것을 받아서 행했는데, 대변을 볼 때에는 비록 몸이 아프더라도 뒷간에 갔다. 기력이 쇠해질 때는 남녀를 타고 가서 방안에 싸지 않았다. 더러운 물건은 남들에게 보이고자 하지 않아서 급히 치웠는데 선생의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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