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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을 찾아서(2/2) ------------------------------------------ 이동근/문숭리
우리 일행은 신동엽 시인에 대한 해설을 듣고 아직 미 개관이지만 준비가 완료된 신동엽 시인 문학관을 외부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내부에서 위로 올라가게 설계된 건물 이전에 위에서 아래로 들어가도록 설계된 독특한 발상이었다. 물론 1층에서도 들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위에서 문학관 전체로 내려다 보며 미끄러 지듯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이어 부여경찰서 후편에 위치한 소나무 밭 신동엽 시비 관람을 했다. 소박하고 서민적으로 마련된 문학비였다. 그 앞에는 보수 단체와 관련된 무슨 비가 있었는데 그 회원들이 신동엽 시비와 더불어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한다. 신동엽 시인에 대한 사상성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랬던가? 우리 일행이 기행을 하기 1주일 전쯤인가... 신동엽 추모행사가 있었는데 전교조에서 현수막을 마련하여 그것을 알렸는가 보다.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시비에는 서정적인 시인 [산에 언덕에]라는 시가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를 지난번 필부 정지용 기행시 필부가 신경을 써야 했던 멘토였더 중년 여성회원이 시비에 적힌 시를 적어와서 낭독을 했다.
- 이 문학기행팀에 초창기 멤버로 20여 년 문학기행과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생활을 넘어 진정한 문인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한다. -
그럼 그 목소를 직접 한 번 들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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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관람을 마치고 부소산성 낙화암을 거쳐 부여 구드레 쌈밥집에서 중식을 해결하고, 서동요 이야기가 서려있는 궁남지를 거쳐 연이어 강행군 문학순례길이다. 이번에는 살아서가 아닌 죽은 신동엽 시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언젠가 생업차 전국 농어촌을 오고가던 날에 쓰러지 그의 묘소표지판이 있던 곳이었다.
길가 어느 농가 양계장을 관통하는 나즈막한 산 중턱에 그의 묘소가 부모 묘소아래 자리잡고 있엇다. 그 주변에는 진달래가 한창 피어서 봄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던가?
어느 팀이 놓고 갔을까? 다 말라빠진 꽃 다발이 상석에 놓여있었다. 우리 일행은 묵념으로 대신했고 강화도 이장이라는 신00 동문 고참 회원이 잔을 따라서 시인을 기렸다. 필부는 다 끝나고 북어포에 음복했노라. 내가 죽어서도 누군가 내 묘소에 이렇게 누군가의 발걸음이 이어질 것인가?
그냥 아마추어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르 안분자족하지만 또 다른 욕심이 아니 생긴다면 필부는 문인이 아닐 것이다.
이제 마지막 일정에 신동엽 시인 묘소 입구에 있는 능산리 고분 6개 묘지와 의자왕 가묘와 부여융의 묘를 둘러보고 상경 길이다.
일정에 비해 지친 기행이었지만 또 다른 의미의 기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루 이틀 상관에 신 동엽을 다 안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필부는 1. 껍데기는 가라 를 암기하는 쾌거가 있었고(잠시 뒤에 직접 암기해 보이리다.) 2. 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와 더불어 금강 이라는 대 서사시를 차기에 다시 음미해 보고 싶은 강렬한 자극을 받고 온 것과 3. 상경하여 뒷풀이 중에서 하모니카와 더불어 잊지못한 에피소드를 한가지 남기고 온 것인데 그것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이 기행의 느낌과 그리고 그의 시 낭송과 암기가 있었는데 필부가 유일하게 암기하여 문화상품권을 획득했는데 필히 보태여 신동엽 전짐(16000원 이라고 한다)을 구입할 것이다. ㅎㅎㅎ
그냥 헤여지기가 섭섭하였다. 아니 충주로 돌아오는 것이 이내 아쉬웠던가 보다. 성수동 방송통신대 제1지역 대학 뒤에 전주집 순대국 집에 몇 이 모여앉았다. 벼르고 벼르던 어제, 오늘 하모니카 연주를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한곡 청하는 것이었다. 기행 일정중에 한 곡 들려주려고 했는데 봄이 너무 화사하고 벗꽃이 부여읍 일대를 가득 덮고 있어서 꽃에 취해 하모니카를 꺼낼 수가 없었노라.
- 이 사진과 더불어 일부 사진은 글을 위하여 이 글과 관련된 기행팀에서 옮겨왔습니다. -
소주 한잔 기운에 고향의 봄을 어설프게 불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일인가/ 앞에 사진에 보이는 파란 상의를 입고 있던 이름 모를 남자가 자신이 가진 것이 다 라면 5000원과 1000원을 털어 6000원을 내밀었다. 받아야 한다고 한다.고향이 그립던 날에 당신이 나로 하여금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고.... 수입치고는 정말 한 곡에 이 정도면 어디를 가도 하모니카만 있으면 룲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ㅎㅎㅎ 고향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신동엽이도 필부도 고향에 내려와서 글을 썼고, 쓰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머물 수 없느 서울.... 내려왔다. 이번 기행에서 이 글만을 여기에 남기고 싶었다. 필부가 추구하는 진정한 문학 정신 내지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랄까? 문학은 또 다른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두 얼굴이다. 신동엽이가 꿈꾸던 껍데기는 가라의 실체가 이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확신이었다.
혼돈기를 살면서 사상적 갈등을 겪기도 했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40살 이내에 죽어야 요절... 안타까운 죽음이자 젊은 죽음)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또 다른 저 세상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산문시
스카디나비아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 아이의 손을 이끌고 백화점거리 칫솔살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 주머니 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커,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떠나는 국무충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있을때 그걸본 서울 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한마디 남길뿐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땅에서 하늘로 치 솟는 무지개빛 분수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죽이는 시늉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 동산처럼 풍오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마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꽁무니에 막거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놀러가더란다.
--- 정말 하고 싶은말, 쓰고 싶은 말이 많고, 사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올릴 수 없기에 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36명 기행팀 전원에게와 필부에게도 자신이 손수 만든 천연 YOON & CHANG 비누늘 나누어 주신 분에게 감사와 더불어 버스 맨 뒤에서 오가는 길에 대작의 즐거움을 마련한 신00 선배 동문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내 하루는 형님으로 필부를 모시고 다음 날은 자신이 형님인 것을 몰랐다고 마음을 열어 필부에게 기행동안 친구가 되어 준 문00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다름에 또 만나서 잔을 나눕시다. 감사~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농사 지으랴! 하모니카 강사 나가랴! 이렇게 작은 글이나마 시간을 내다 보니 충실한 기행문이 되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오며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었거나 읽게될 필부가 속한 10여 카페 회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2012. 4. 27. 내 고향 충청도 충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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