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Rohtas Fort
3주 전에 Mine Salt 들렀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문전 박대를 당한 Rohtas Fort.
가는 길에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연꽃 덕분에 종일 Lotus 와 Rohtas와 헷갈린다.
여기 와서 연꽃은 첨 봤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펀잡(Punjab)의 질름(Jhelum)쪽으로 약 2시간 달려 Dina에서 약 20분 들어간다.
거리는 8KM지만 곳곳에 비포장도로.
사람의 인연이란?
가는 길에 눈에 익은 오토바이
3주 전에 우덜에게 Rohtas Fort를 안내해준, 물론 도움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실은 입구에서 만나 물어보니 Rohtas Fort가 밤에도 문 연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따라오라고 해서 갔는데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내인이 이곳은 총 가진 사람이 많아서 외국인은 특히 밤에는 위험하다고 해서 쫄아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줄행랑)
손만 흔들어 주고~~
밤에 올 때는
“알렉산더가 여까지 원정을 왜 왔지?“
했는데 낮에 보니 알 것 같다.
광활한 대지에 풍부한 물.
펀잡(Punjab)이 페르시라어로 `다섯 개의 강`이란 사실도 알게 되고
현장 옆으로 흐르는 강의 이름이 질름(Jhelum)이 알랙산더의 愛馬이름이란 것도 (여기서 죽었다네요).
먼지가 폴폴 나는 길을 달려가니 멀리 보이는~~
대단하다.
성내(城內) 생각보다 큰 마을이 있다.
마을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어김없이 나타나는
외국인 500루피, 내국인은 무료?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나니
어떤 할배(?)가 가이드를 자처한다.
2시간 가이드에 1000루피
적지 않은 돈이지만 주기로 하고
그러자 우덜 도시락 보자기를 달랜다.
괜찮다고 하니 밥값 해야 한다고
일행이 노인네한테 짐 들게 하는 불경스런 짓 하면 클난다기에
조심스레 “연세가??”했더니 “50살” 이란다. 부담 없이 맡기기로 했다.
(우덜 일행 중 내가 제일 젊으니)
내 이름을 묻길래 일러주니 어려운지 이상하게 불러서 그냥 `John`이라고 부르라 했더니
내 뒤만 쫄쫄 따라 다니며 1분에 한번씩
` John, 어저구 저쩌구~`
내가 물주라 생각했나보다.
내 영어 실력도 별로지만 영감 치아가 다 빠져 말이 새어 알아듣기도 힘들고 해서
`영감, 나는 됐고 다른 사람한테 설명 좀 해주라` 해도 열심히 설명을~
돈만 챙기는 얌체보다는~
아래 내용은 인터넷에서
이 요새(要塞)는 1540년대에 ‘셔 샨 수리(Sher Shah Suri)’가 건설한 것으로 파키스탄의 역사 건축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요새로 평가받고 있다. 성의 둘레가 약 4Km정도 되는 이 요새는 유(U)자형으로 휘돌아 흐르는 강을 배경으로 그 언덕위에 지어졌다. 깊은 골짜기와 강이 침략하는 적을 잘 막아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적에게 한 번도 점령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12개의 문과 68개의 보루를 갖춘 최강의 요새로, 성벽의 높이는 10-18미터이며 성벽의 폭은 13미터가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각각의 문(gate)들은 자기들이 있는 위치에 따라 가장 방어하기 좋은 모양으로 독특하게 건축되어 있어 축성(築城)양식의 연구에도 큰 가치가 있는 성(fort)으로 되어있다.
미국에서 발간된 「세계역사속의 명장(名將) 100인(人) ‘100 GREATEST GENERALS THROUGHOUT HISTORY’」이란 책속에 98위에 랭크되어있는 - 물론 서양인의 시각으로 저자가 아는 한계 안에서 지은 책이라 특별한 가치는 없다. 어찌되었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끌어온 책이다. - ‘셔 샨 수리(Sher Shah Suri)’는 아프칸 땅에 수리(Suri)왕조를 세운 인물로 그의 용맹성에 따라 ‘라이온 킹’이라고 불리고 있다. 어릴 적 이름은 ‘Farid Kakar’로 1472년 펀잡(punjab)지방의 영주(estate)인 ‘하산 자기르(Hasan Jagi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리족의 ‘아브라힘(Ibrahim)’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계모에 의해 견제를 받게 되어 가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이때 축성(築城)학을 공부하여 훗날 로터스요새 같은 훌륭한 건축물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20대의 나이에는 부친의 명으로 돌아와 잠시 작은 땅을 맡아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다시 가족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바부르(Babur)’가 세력을 모아, 지금 인도의 델리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잡고 있던 ‘로디(Lodi)왕조’와 투쟁할 때 ‘바부르’를 도와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특히 아그라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고 한다.
‘바부르’가 아그라에 무굴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하자, ‘셔 샨 슈리(Sher Shah Suri)’도 ‘바부르’의 후원아래 ‘사사람(sasaram)’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인도의 델리 부근에서부터 지금의 라호르를 거점으로 한 펀잡지역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셔 샨 슈리(Sher Shah Suri)’는 점점 세력을 넓혀가며 튼튼한 기반을 쌓았다.
‘바부르’ 사망 후 아그라에서 델리 쪽으로 거점을 넓히려는 무굴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Humayun)’과 충돌을 하게 되고, 세력 확대의 필요성을 크게 느낀 ‘슈리(Suri)’는 멀리 벵골지역을 정벌하여 왕의 항복을 받고 병합하였다. 그리고는 당시에 유래를 찾기 힘든 벵골에서 라호르까지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하이웨이를 개척하였다. 이때가 ‘셔 샨 슈리(Sher Shah Suri)’의 최고의 전성시기였던것 같다.
이때 ‘슈리왕국’은 동부 벵골에서부터 Agra(아그라), Burhanpur(부한푸라), Jodhpur(조이다푸르), Chitor fort(치트로성), Lahore(라호르)에서 Multan(물탄)까지를 아우르고 있었다.
1539년과 40년에는 무굴제국의 ‘후마윤(Humayun)’을 압박하여 챠우사(Chausa)와 칸나우자(Kannauj)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의 결과로 ‘후마윤’은 델리를 떠나 아프칸의 ‘카불(Kabul)’로 망명하게 되었다. 당시 카블은 무굴제국의 근거지라 할 수 있었으며, 터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1544년 ‘셔 샨 슈리(Sher Shah Suri)’는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토 일각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원정을 떠났다. 반란군을 정벌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둔지에서 일어난 원인모를 화약창고 폭발사고로 인해 ‘슈리왕조’를 연 사자왕(獅子王) ‘셔 샨 슈리(Sher Shah Suri)’는 1545년 5월 22일 사망하게 된다.
‘셔 샨 슈리(Sher Shah Suri)’의 무덤은 지금 인도의 델리에서 멀지 않은 곳 ‘사사람(sasaram)’에 있다고 하는데 인도를 여행할 때 이러한 정보를 알지 못해 찾아보지 못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용도 파키스탄 여행 당시에는 알지 못하고,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고 덧붙여 알게 된 것이다. 아마 이 내용을 먼저 공부하고 로터스 성을 갔다면 훨씬 더 감동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전시실에는 성의 개략적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미니츄어(miniature)가 있어 처음 방문자에게 도움을 준다. 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철옹성(鐵甕城)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역과, 그 구역과는 또다시 성벽과 성문으로 나누어진 약 1/5-1/6 정도 되는 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