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이라는 현실적 얼굴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나의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중학교 1~2학년 때 까지 만화책을 몇 만권은 읽었던 것 같다. 잡다한 에세이나 소설, 철학책으로 옮긴 게 아마도 중3 이후 고교에 진학하면서 부터로 기억한다. 그 당시 만화가 이현세씨의 까치와 엄지 등 만화 주인공이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울기까지 했었다. 그의 만화는 청소년기 나에게 헤르만 헤세나, 앙드레지드, 쌩떽쥐베리, 알베르카뮈 등 무턱대고 읽었던 작가들의 작품보다도 더 큰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작가의 학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작가는 글이나 그림 등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 하는 도구로서 승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작품이나 내용보다도 먼저 작가의 학력이 어떻게 됐는지가 너무나도 중요한 모양이다. 현재 문화예술계가 학력 위조논란으로 들썩인다.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를 필두로,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만화가 이현세, 예술경영인이라 칭하는 김옥랑, 어제는 연극인 윤석화에 오늘은 배우 장미희까지 줄줄이 세간의 입방아에 놀아난다.
이러한 허위학력 문제의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학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실력이 있어도 기회조차 제공되지 못한다. 이에 반해 실력이 변변찮아도 학력이 좋으면 그 이상의 기회와 대우가 보장 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양극화문제, 환경운동, 학벌주의 사회 개혁 등 수많은 구호를 내걸고 실제 활동을 행하고 있는 NGO 등 시민운동진영에서조차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는 이들에게 학력을 연계시켜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코미디 같은 명칭이 붙고 만다. 학력이 밑바탕이 안 되면 기회를 균등하게 얻을 수 없는 현실에서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고교 중퇴의 가수 서태지, 영화배우 정우성, 음악인 신중현, 중학교 중퇴로 거장이라 칭함 받는 임권택 감독, 고졸의 만화가 허영만 등 악전고투(惡戰苦鬪)하며 학력을 넘어선 문화예술계의 인물들은 생각 외로 많다. 이들의 삶과 학력을 속이고 현재 커밍아웃하거나 밝혀지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학력을 속인 이들의 문제만 부각되고 정작 중요한 사회 구조적 문제가 배제된 채 공론화 되는 게 싫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개인의 거짓학력에 대한 심각한 인신공격은 끊임없이 행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단면에 대해서는 별반 이야기가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소위 일류대를 졸업한 이들이 대부분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대학의 서열화는 더욱 철저하게 공고히 되고 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으며 자손에게 대물림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방편으로 학벌을 이용한다. 학벌 공화국의 가장 기초적 구조인 셈이다. 근래 9급, 7급 공무원 시험에 대학생들 대다수가 몰리는 원인이 많지 않은 직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이유도 한몫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의 모대학 졸업장 필요 없이 국가에서 정해 준 시험과목에서 좋은 점수만 얻으면 평생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정확한 평가방법이 구체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기업입사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지방대학생들의 입사원서를 받아 주는 곳도 있지만 아예 원서자체가 통과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렵게 입사한 후 일류대학과 지방대학생간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대학입학이라는 일순간의 과정 자체가 일생을 귀결 짓는 가장 커다란 자신의 또 하나의 얼굴이 되고 만다. 20여 년 동안 공부해 이후 평생의 현실적인 자기 얼굴을 만들기 위해 국민 대부분이 사교육에 수조원을 쏟아 붓고 있다. 과거 신분상승의 기회 중 하나였던 대입마저도 이제는 기득권층에 의해 차단되어 간다.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와 외국유학 등 서민들이 감히 따라 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며 일반화 되어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수인 에픽하이 타블로의 학력도 논란이 됐다. 많은 이들이 크게도 관심 가져 주었나보다. 스탠포드대학 학사, 석사 출신인 이 가수는 근래 자신의 학력이 분명하게 가려지자 자신의 미니홈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도 이렇게 큰 관심 보여주세요. 아래 heal the world 보시길. Peace!“
heal the world는 타블로의 미니홈피에서 굶주리는 이들을 돕는 사이트나 국제백신연구소 등의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 이러한 자료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이다.
학력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를 통하여 이 가수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이들을 위한 활동도 할 수 있으며, 더 낳은 문화적 창작을 행할 수 있고, 어떤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다양한 수단 중 하나인 대학입학은 목적을 위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학은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면 거쳐 가야 한다. 학벌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20년 동안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면 앞으로 죽을 날까지 그 목적을 위한 더욱 다양한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학습(교육)은 학벌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닌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목적을 위해 평생 행해야 할 가치 지향적 도구임을 반드시 기억하자.
첫댓글 새전북신문연재하는 칼럼입니다.
저역시 학벌에 한 맺힌 사람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해내도 꼭 어디 나왔냐고? 아니면 지레짐작 몇학번이냐고 묻더군요... 저 자신을 속일 수 없어서 컴플렉스에 시달리다 스스로 암초를 만들고 오랜 귀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뒤늦게 새로 시작하는 맘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찌되었건 정상적이 과정이라는 이름도 중요하긴 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