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차문화를 주도해 온 것은 스님들이었다. 신라 경덕왕때의 충담은 삼화령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고 월명은 국왕으로 부터 차를 선물받았다. 쌍계사의 진감선사도 차를 마셨다. 고려시대의 스님들은
더욱 차를 즐겼다. 이규보가 개경의 안화사에 들렸을때 어떤스님이
차를 달여주며 향기도 색깔도 갖추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품다'品茶'에 밝은 스님이었다. 영남의 어느 사원에는
명전회'茗戰會'가 열리기도 했다. 차를 누가 더 잘 낼 수 있는가를
겨루는 풍속이었던 것이다. 남녁의 절에서는 스님들에 의해 차가 법제되고 있었다. 운봉의 노규선사가 이규보에게, 송광사의 어떤 스님이 이제현에게, 엄광대선사가 한수에게, 차를 선물했던 것으로 사원에서 토산차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 의천, 진정국사 천책,원감국사 충지 등의 고승은 모두 차를 즐겼고 차시를 남겼다.
조선시대에도 스님들은 차를 마셨고,차의 법제 또한 남쪽의 사원에서 그 명맥을 이었다. 조선 초기 다승으로는 기화와 설잠이 있다. 특히 설잠은 차를 재배하고 손수 법제한 차를 달이면서, 한 잔 차로 두눈이 밝아진다고 했던 다승이다. 소요는 "趙州茶"라는 시를 남겼고, "해안은 밑 없는 바루에 조주차가 있다."고 읊기도 했다. 선가의 조주다풍은 훗날 초의와 범해등으로 계승되었다. 19세기에도 지리산에는 승려들이 차를 만들고 있었다.지리산은 차를 만들기 위해 승려들이 많이 모였고,칠불암의 선승들이 차를 만들기도 했다. 대흥사에는 아암,초의,범해 등의 유명한 다승이 배출되었다. 초의 스님은 우리 나라 다도의 중흥조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동다송에서 우리의 토산차를 찬양했고 손수 만든 차를 많은 사대부에게 선물함으로써 음다의 풍을 확대하기도 했다. 선가의 음다 전통은 최근까지도 계승되었는데 송광사의 보정 대흥사의 응송,다솔사의 효당등이 대표적인 예다. 음다의 풍습이 성행한 곳은 주로
사원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나 일본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졸음을
쫓아주는 차의 약리적 효과때문이기도 하였지만,또한 다도의 정신과 선의 정신이 서로 결합하기때문이기도 하였다.
"喫茶去"는 선가의 화두이다,서산대사가 "납자일생의 업은 차 달여 조주에게 올리는 것"이라고 한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끊이며 ,그 잘 끓인 물과 좋은 차를 간맞게
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찻잔을 씻고 물을 길어 나르며 목마를때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에서도 "禪味"를 맛볼 수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녹차를 마시는 인구가 천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차 전문잡지가 몇종이나 되고 또 학술지도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차와 도구를 파는 가게 또한 적지 않고 ,다도를 가르치는 사회교육기관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대학에서도 차를 전공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부산여자대학에는
다학과를 설립했고, 성균관대학, 성신여대, 한서대학등에는 석사과정에 차 전공학과를 개설한지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 불교 종립대학의경우, 아직 차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서구 이념의 토대에 세워진대학에서
조차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데 정작
불교문화의 산실이라는 불교종립학교에서는 아직 다도가 관심 영역이
아니다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계 신문의 한 칼럼에
불교 종립대에 다학과를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된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천년 이상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도 ,불교를 생활문화에 접목하기 위해서도, 차문화를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다학과 설립은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