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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의 옛터 답사를 다녀와서
Ⅰ.들어가는 말
신흥무관학교의 옛터 답사를 위해서 광주에서는 오랫동안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인 5명이 7월 22일 새벽 1시에 버스를 몸을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작년 이 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는데 올 해도 연속사업을 진행하여 120여명이 제출한 신청서를 심사하여 다행이 통과되어 답사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단원까지 해서 70명이 인천공항에서 만나서 중국 만주지방을 향하다.
이번 답사에는 독립운동의 후손 3분을 포함해서 역사 선생님들 과 중고생들이 상당히 많은 단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대학다닐 때 부터 관심을 가졌지만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해방 후 이 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흥대학(지금은 경희대학)의 민주동문회 몇 명도 함께 하다.
한말 국권상실의 회복을 위해서 의병투쟁을 계승하여 옛 고구려 땅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투쟁을 통해서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기 위해서 거의 10년 동안 3,500명 졸업생을 배출한다.
폐교된 이후에도 신흥무관학교의 관계자와 졸업생들은 각지에 이 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를 설립하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후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1930년 이후의 사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현실의 기존의 독립운동이 숨죽이고 있을 때 일어섰기에 독립운동사에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Ⅱ.본말
첫째날 (7월 22일)
1시간 넘게 비행기타고 심양에 도착하니 다행이 흐린 날씨였다. 왜냐하면 이곳의 여름날씨는 태양이 작렬하면 그 폭염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심양에서 멀리서 잠도 못자고 앞으로 버스를 오랫동안 탑승할 것이기에 피로를 덜 느끼라고 높은 대형버스 2대로 이동하다.
길림시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내리니 단원들은 준비된 우의나 우산을 쓰고 답사를 진행하다. 이 육문중 학교는 공사중이고 현재 한중관계를 반영한 것인지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밖에서 학교이름 앞에서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구멍 난 담벼락 사이로 언뜻 보니 북측의 김주석의 큰 동상이 서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자세히 볼 지 못하게 경비원이 막는다. 김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 꼭 들리는 학교란다.
이 학교는 일제하의 김주석이 다니면서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를 비밀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김주석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에도 언급된다. 그 외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김주석의 이름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는단다.
버스 타고 조금 더 가니 구일본영사관 옛터에는 은행이 들어 서있고 그 옆에는 길림 감옥옛터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림에서 영사관은 경찰이 있어서 영사관자리가 매우 넓었다. 이는 영사관이 이 지역일대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를 감시.체포.고문.살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은 할 수 없어서 재판소가 있는 용정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관동군 부대가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영사관 맞은편에는 김원봉을 주축으로 한 테러조직인 의열단 발대식이 있었다. 나중에는 테러로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돌아서다.
백두산 천지에 발원하여 흐르는 송화강이 도심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천지를 발원한 강은 그 외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다. 비가 계속 내리어서 저녁식사를 하고는 한 단원과 함께 사진 몇 장 찍고는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안내원이야기로는 송화강 야경이 이 곳의 제1의 명장면인데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버스 간에서 단원들이 참여한 동기를 이야기를 하는데 사뭇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비장한 결의를 엿보는 것 같아서 이 단원들과 함께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에는 4일간 함께 할 단원을 배정하였다. 나는 전북 선생님인데 침술에 대가인데 일정상 한 번도 시술을 받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첫 날 뒷풀이를 위해서 인근 포장마차에 가서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기개를 드러내다.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중국음식이 적응이 되지 않아서 몸상태가 그리 편치 않아서 조금 일찍 숙소에 들어오다.
둘째날(7월 23일 )
오늘은 먼 거리를 이동하여야 하기에 5시에 기상해서 8시에 출발하다.출발할 때에 흐린 날씨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작렬하는 만주의 햇빛을 맞이해야만 했다.
대부분 단원들은 장춘지역의 서란현의 서과촌으로 이동하여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신 이상룡의 선생님 서거지역을 답사하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서 이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택시타고(16대)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다시 이동하다가 대형버스는 전기줄에 걸리기에 소형버스 2대로 이동하여 그 서과촌을 찾다.
도착하니 우리 어릴 때처럼 마을 아이들이 제일 먼저 신기한 눈으로 반기고 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서 우리를 보다. 이상룡선생님의 사셨던 흔적은 없고 마을에서 당시 마을에서 사용한 우물터는 없고 단지 추정된 지역에서 선생님에 대한 단원들의 추모식을 간단히 하고 기념사진촬영하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이상룡선생님의 손자되신 분이 친철하게 설명해주시다.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석주 이상룡선생님이 서거한 1932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이나 생활이 매우 어려운 때였다.석주는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관대하게 화합의 길을 걸었지만 독립운동의 기본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만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1931년에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해 관동군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독립운동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게릴라전과 같은 새로운 투쟁양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할 때 동지인 이장녕과 폐교된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검성중학교를 세운 여준선생님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석주는 곡기를 끊고 냉수만 들다가 향년 74세로 서거하다.
단원 중 5명은 여준선생님이 세운 검성중학교 옛터를 답사하러 가다.
완전중학교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교측에서 방문을 하지말아 줄 것을 당부하여 가지 못하다. 현재 한중관계가 한일군사협정이 중국을 겨냥하고 있고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이야기하다. 나중에 와서 해명을 하다.
조선족완전중학교는 1912년에 세워진 '은양학교' 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하현에는 26개의 조선족 중학교가 있었으나 계속되는 조선족 이주로 학생들이 줄어들어 3개학교 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2005년에 3개학교가 통폐합하여 지금은 유일한 조선족중학교로 남게 되었다.
조선족중학교의 뿌리인 은양학교는1912년 10월 10일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류하현 삼원포 대화사에서 독립운동가 방기
전 장로가 세웠다. 1920년 교장 방기전 장로가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학교는 불살라졌다. 1922년 독립운동가들이 은양학교 후신으로 '동명학교'를 새로 세웠으나 교장 한경희 목사가 한족 토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중국정부에 의해 폐교되었다. 1947년에 독립운동가 조선족들이 다시 동명소학교, 중학교를 열어 오늘의 조선족중학교가 끈질긴 역사와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 금년이 개교 99년, 내년이 개교 10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현재 교직원 81명, 초, 중, 직업고등학교 학생 700명이 공부하고 있는 유하현의 유일한 조선족중학교다.
셋째날(7월 24일)
오늘은 만주지방의 여름 날씨를 단원들에게 제대로 보여줄 양 태양의 작렬한 햇빛은 감당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신흥무관하교의 옛터 3군데를 보기로 하다. 우리가 머나먼 길을 마다않고 온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맨 먼저 간 곳이 전성기의 본부역할을 한 유하현의 고산자 터였다.(1919.5~1920.7)
3.1운동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는 청년들이 부쩍 늘어 천험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위치한 합니하로서 불충분하였다. 한국인이 많이 살고 교통이 편리한 고산자 부근으로 본부를 이전하고 합니하는 쾌대무자 무관학교와 더불어 분교로 삼아 독립의 열망을 들떠 있던 젊은이들을 전사로 키워냈다.
고산자에 가보니 옥수수밭으로 되어 있었서 땅주인의 허락을 겨우 받아내서 옛터를 겨우 답사할 수 있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고가 아니라 산천도 인걸도 간데없고 오직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만을 오늘에 계승할 책무를 결의하는 자리였다고 본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했다.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이 추가가에(1911.6~1912) 가려고 하니 중국 공안이 저지하여 못가게 하다. 그래서 관계자들이 한참 이야기하고 오더니 그 곳에는 공군기지와 미사일기지가 있기 때문이라는데 앞에 언급한 한중정세의 불안성에 기인한 것 같다고 한다. 안타까웠다.
다음은 천혜의 요새지역인 합니하인데 이 곳은 아예 갈 시도도 하지 않고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이 합니하는(1912~1920)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학교다닐 때 감동있게 읽었던 님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도 이 무관학교를 찾았던 젊은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백서농장은 그 위치를 찾기 쉽지 않단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는 조금 앞서가는 운동하는 자는 물고기에 비유하고 일반 민중은 물에 비유는 두 관계가 비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따라서 한반도를 벗어난 중국의 만주지방에서 10년 가까이 신흥무관학교을 통해서 무장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에 와 있는 많은 한민족을 토대로 가능했다.
이런 이주한 동포를 묶어 세우는 조직인 경학사-부민단-한족회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경학사에 이어 1915년말 1916년 초에는 서간도 주민자치조직으로, 만주 부여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할 결사를 세운다는 의미와 이주민들을 부양시킨다는 뜻을 가진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부민단은 10호에 십가장을, 백호쯤 되는 마을에는 백가장을, 큰 마을에는 천가장을 두었다. 일제의 한 자료에는 부민단에 1,229호, 6013인이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부민단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고국에서 오는 동포를 맞이하여 살게끔 해주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중국인과의 계쟁(係爭)사건을 관장하는 등 행정처리뿐만 아니라 사법처리까지 맡은 명실상부한 주민자치기관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왕성해짐에 따라 부민단을 확대 개편한 것이 한족회다. 한족회는 매호에 의무금을 내게 하고 민·형사 소송까지 맡아 완연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족회는 고산자에 새로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지어 본교로 했고,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인 이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한족회와 같은 시기에 조직된 군정부는 독립군 조직이었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 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학우단은 무관 양성 등 독립운동 인재 양성의 참뜻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신흥무관학교 및 분교와 지교, 부민단이나 한족회에 적이나 적의 앞잡이가 침투하는 것을 막는 자위조직으로도 기능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 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이건 6·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운동이건 모두 다 불법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 내내 국내에서는 지하투쟁의 형태로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동남아식민지를 둔 나라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세웠기에 인권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에 식민지에도 일정하게 최소한의 천부인권을 부여하려 했던 반ㅂ면 일제처럼 봉건사회에서 바로 위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하여 인권 등에 대한 합의가 거의 없었기에 식민지에 대해서 철처히 탄압일변도로 나아갔다.
이런 상황은 후방 식민지 독립기지를 건설하는데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이는 독립운동가의 가족에 대해서 민중들의 시선이 매우 비우호적이었다. 이는 만주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저렇게 운동가의 목숨부지도 힘들지만 그 가족도 위험에 처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도 다 거덜난다는 사실을 통해서 가까이 하려고도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는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나 유족이 어떤 처지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가를 보면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야할 곳을 외부적 환경 때문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방학진사무국장님이 이도백하를 가는 도중 우리 버스(버스가 1호차 중장년층 단원 중심으로,2호차는 어른신들과 중고대학생들 중심으로 타다.) 뒷좌석에서 여흥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뱃속이 편치 않아서 동참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 좋아서 같이 앞좌석 내자리에서 가락에 맞추어서 흥을 돋구고 있는데 방국장님이 노래 한가락하라고 하여 나가다.
대학다닐 때 축제 마지막 저녁때인가 전대운동장에서 수 많은 학생들이 농민가를 부르면서 짝을 돌아가면서 그 특유의 춤을 출때가 기억나게 하는 농민가도 흘러나오다. 그래서 나도 당시에 언제인가 운동장 한켠에서 뒷풀이자리에서 공대생이 ‘불나비’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감동있게 들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이후 전교조 집회에도 불려지고 했지만 쉽게 배울 수 없었고, 조금 가사를 알아도 음치인지라 곡이 아니었다. 이번에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하니 한 단원 가사와 곡을 완전히 소화하여 나도 엉겹결에 재미있게 따라 부르다. 이런 주체성없는 모습에 일침을 가한 것이 다른 노래를 부르라 하여 가요 한 곡을 부르다. 그러고 나니 이 마당이 정리되어서 아쉬웠다.
넷째 날(7월 25일)
백두산 북파관광의 출발점인 이도백하에 숙소를 정하다.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 상류강변에 있어 이런 지명이 붙었다. 전체면적 94%가 살림자원이고 미인송도 유명하다.
저녁에는 고생하신 관계자들에게 얼마되지 않은 술과 안주로 위무하다.그리고 저녁 식사 후 20여명의 중고생들이 너무 기특하여 얼음과자를 하나씩 주다.
오늘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를 답사하러 가는 길이다. 짚차로 북파의 천문봉에 오르다. 오르는 동안 하늘이 너무 쾌청하여 예전에 천지를 두 번 갔는데 그 때에도 너무나 화창하게 반기어서 이번에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천문봉에 내리자마자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운무에 비가 내리다. 천지를 보기 위해서 오르는데 한국 사람보다 대부분 중국 사람들이었다.정상에 올라서서 천지를 보려하니 짙은 운무에 강한 비바람을 한참 동안 쏟아 부어서 천지를 못본가 싶었다.
그래서 대다수 단원들은 답사 1시간이 되니 하산하였는데 나를 포함한 몇 명은 성스런 천지를 기어코 보고 말겠다는 신념을 비바람을 맞고 나니 약속시간을 20분을 넘기고 나니 몇 초 동안 여러 번 천지의 신비를 보여주다. 그래서 사진 몇 장 찍고 하산하다.
늦게 와서 비룡폭포를 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안내원을 말을 듣고 적이 실망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갈 수 있다하여 거기가는 버스를 타다.
가니 단원들은 하산하고 있어서 우리 뒤늦은 일행 6명 중 4명은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걸어서 비룡폭포의 장엄한 구경하고 기념으로 사진 몇 장을 남기다
천문봉에 오르면서 그 아름다운 야생화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대지를 화원으로 만들고 있어서 이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이 화원을 보려면 서파쪽으로 오르면 이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꽃이 마치 우리 민족의 모습인 것 같아서 더욱 애착이 가다.
하산해서 통화로 이동하다.
다섯째 날(7월 26일)
통화에는 비루수라 부르는 혼강이 흐르고 있었다.이 강은 압록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이다.
심양에는 서탑거리에 1.5㎞걸쳐 있는 조선족들이 한글 간판을 걸고 장사하는 모습을 보다.
그 다음에는 일제가 중국대륙 침략의 신호탄이 되었던 1931년 9.18만주사변기념관을 답사하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시 위만황궁(僞滿皇宮)내에 있는 ‘잊지 말자 9.18-일본침략중국동북사실’전람관은 일본의 만주침략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3천여㎡의 면적에 지하1층, 지상2층에 총 1천여m에 걸쳐 대량의 사진과 문물 및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일본의 끔찍하고도 잔혹한 중국 침략사에 몸서리가 쳐 질 정도다. 일본은 20세기 초중반 만주지역에서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의 화려한 역사가 펼쳐진 영토가 일본에 의해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이 기념관을 보면서 우리 역사는 이런 치욕적인 역사나 헌신한 독립운동에 관한 기념관이 제대로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그렇게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 독립운동사나 유적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조차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민족을 팔아먹는데 앞장선 자들의 기념관이나 동상을 세우고 있으니 지금도 과거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9.18만주사변은 중국침략의 신호탄
9.18만주사변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은 치밀한 각본에 따라 진행됐다. 1927년 6월 일본내각은 도쿄에서 ‘동방회의’를 개최했고 ‘대중국정책요강’을 제정해 무력으로 중국내정에 간섭하고 중국 침략을 확대하는 ‘대륙정책’을 확정했다. 일본은 ‘대륙정책’이란 미명아래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7일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盧溝橋)를 공격하면서 중일전쟁을 도발한다.
일본관동군은 1928년 6월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부근의 황구툰(皇姑屯)에서 철도에 폭약을 장치해 당시 동북지역 군벌이던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킨뒤 1931년 9월 18일 9.18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밤 10시20분 일본 관동군은 선양북쪽 류탸오후(柳條湖)지역의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무고한 백성에게 중국동북군 군복을 강제로 입혀 총살시키는 자작극을 벌였다. 그뒤 인근에 주둔하던 중국군 7여단에 누명을 씌워 공격하는 식으로 사건을 조작해 고의로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했다.
일본군은 궁극적으로 1937년 7월 7일 펑타이(豊臺)에서 군사연습을 하던 일본군 사병 한명이 실종된 것을 빌미로 베이징(北京) 교외 루거우차오(盧溝橋)를 공격하고 중일 전쟁을 도발해 중국 대륙을 삼키기 위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 때 여준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이 살해되는 시기이다. 그리하여 임정을 포함한 독립운동세력들이 포악한 일제의 칼날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시기이다.
돌아오는 도중에 완전중학교 선생님들께서 방문을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제 저녁에 해명하시고 가면서 중국고급술 여러 병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방국장님이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준다고 하니 2병은 이해가 가나 6병은 제비뽑기하자고 긴급 제안이 들어와서 급히 공란희 회계팀장님이 모자안에 단원 개개인의 차고있는 명찰을 집어넣었다. 제비뽑기는 우리 차의 막내인 아름다운 여선생님이 뽑다. 그런데 여선생님이 탄 쪽인 좌측만 5명이 나와서 우측에 자리잡은 단원들이 항의가 대단하였다. 다행히 마지막은 우측이 뽑혀서 무사히(?) 끝나다. 제비뽑기하는 동안 왁자지껄 조금 소란스렀으나 매우 즐거웠다.
단원들의 소감을 전체적으로 들어보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고, 특히 2호차에 탄 중고대학생들의 소감을 듣지 못한 점도 못내 아쉬웠다. 비록 그 차안에서 하였다고 하지만.
답사나 관광은 여행일정의 원래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를 정리하는 뒷풀이 장소가 소감이나 저녁 뒷풀이 모임이 중요하다. 첫날 뒷풀이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좋았다고 본다.이후는 이동거리로 시간이 담보되지 않아서 전체적인 뒷풀이 성격의 모임은 쉽지 않았다.
심양에서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몇 단원들이 소감을 말하는데 나는 공항에 다와서 몇 마디 하다. 시간상 아쉬움이 남는 발언이었다.
이동하는 거리가 길었기에 함께 즐겁게 이야기 동무가 되어준 공무원인 신희숙님과 광주가 고향인 동기생인 문선선생님(이 두 분은 백두산천지를 볼 때까지 함께 했고, 비룡폭포도 바람처럼 달려서 같이 보다. ) 그리고 전북 한 고교의 초빙교장인 이태룡선생님은 의병투쟁사에 전문가이시인데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다. 독립기념관에 근무하셨고 지금은 교수님으로 재직중인 윤종일 선생님은 독립기념에 관한 논문이나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다.그리고 많은 단원님들이 함께 하는 서로 도움을 주면서 이번 답사를 무사히 보람되게 마칠 수 있었다.
Ⅲ.맺음말
복학하고 해방전후사인식 연속된 책 등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우리 현대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포함해서 과거가 단지 책이나 유적지 답사가 화석화된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 과거에 대해서 철저히 알고 느끼면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리라 본다.
민족모순과 민중 생존권을 어느 정도 해결하면서 근대민족국가를 완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남북의 화해.협력을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야겠다.
E.H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미래와 대화이다라는 말을 상기시켜야겠다.
2012.8.1 23:25 미라보아파트에서
답사기를 귀국한 날 종이에다가는 간단히 적었는데 이렇게 적는 것은 내내 미루다가 오늘 정리해봤다.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