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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직분과 신학교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문제는 지난번에 토론을 거치고 공개된 글이었습니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혀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많아졌고, 그동안 제기된 반론이나 이견들에 대해 반박할 필요도 있으므로 다시 보완하여 씁니다. 성경어디에서도 우리는 목사라는 직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성경을 변개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1. 성경에 없는 목사 제도, 목사 직책
(1)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행 14:23)
그들은 각 교회마다 목사들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각 교회마다 장로 한명만 세운 것이 아닙니다. 복수의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저희가 각 모임마다 그들에게 장로들을 택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부탁하니라.(행 14:23)
항상 복수로 장로들이 나오는 것은 주목할 사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울 때 신학교 출신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두란노 학당에서 전도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전도하여 그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믿음이 굳건한 사람들을 세웠음을 알수 있게 해줍니다.
(2) 바울은 디도에게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합니다(디도서 1:5)
목사들을 세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한다음(딛 1:5) 다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러 믿음의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딛 1:7) 그리하여 바울은 장로가 곧 감독임을 이 장에서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도 목사라는 직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각 성마다 복수의 장로들을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단수의
일인목회제가 아닙니다!
(3) 예루살렘 회의때에 사도와 장로들이 있었지만 목사들은 안보입니다(행 15: 2, 6, 22, 23) . 목사라는 직책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한글 성경은 2절, 6절, 22절, 23절에서 사도와 장로들이라고 나옵니다만 원어문은 사도들과 장로들로 모두 복수들입니다.( 아포스톨로이, 프레스 뷔테로이). 목사들은 하찮은 직책이고 장로들만 중요직책이어서 안보입니까? 그러면 오늘날 목사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4)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면서(빌 1:1) 목사라는 직책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라는 직책은 없었기 때문으로 분별됩니다!
(5) 바울은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다가 (행 20:17) 그들에게 교훈하면서 그들을 성령께서 교회의 감독들로 세웠다고 말합니다.(행 20:28) 이것은 장로들이 바로 감독들임을 설명해주는 말씀이라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직책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에베소 교회에 목사는 안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에클레시아) 라는 단수의 한 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그 교회( 단수의 한 교회)의 여러 장로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성령께서 교회의 감독들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일인목사제도, 일인 장로제도는 보이지 않고 분명히 복수의 장로제도가 보이지 않습니까?
(6)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안에 중요한 두가지 직책을 말하면서
그 두 직책에 선임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요건을 설명합니다. (딤전 3:1-13) 그 두 직책은 감독과 집사이며 감독의 자격요건은 딤전 3:1-7에 상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의 자격요건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 목사가 언급되지 않았습니까?
(7)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도이며 교사이며 전도자로 소개합니다(딤후 1:11)
바울은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안에서 전횡을 일삼는 목사라는 직책은 바울에게 금시초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습니다(딤전 2:7)
바울은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습니다(딤후 1:11)
그는 목사라는 직책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8)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합니다(벧전 5:1)
베드로는 어느 목사 아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참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베드로는 말합니다(벧전 2:25)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이 목자장이심을 가르칩니다(벧전 5:4)
모든 인생들은 양들일 뿐입니다.
(9)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로 소개합니다(요2- 1절, 요 3-1절)
사도 요한은 어느 목사 아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장로이고 디오드레베는 목사였겠습니까?(요삼 9절)
목사는 으뜸되기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바로 목사제도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3서 9절)
(10) 야고보는 병들면 장로들을 청하라고 합니다.
14 너희 중에 누가 아프냐? 그로 하여금 모임의 장로들을 부르게 하라, 그리고 그들로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람유로 기름바르고, 그의 위에 기도하게 하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만일 죄들을 범하였으면, 그것들이 그에게 사하여질 것이니라. (야고보 5장 14-15)
야고보는 왜 교회의 목사들을 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어디로 가셨나요?
목사라는 직책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복수의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로들이라는 복수의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제도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초대교회에는 없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치유할 것입니다. 설혹 병이 죄로 말미암았을지라도 그것들이 사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여 이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성경말씀은 진리이며,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그럴만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11) 성경 어디에서도 디모데나 디도나 두기고나 어느 누구도
목사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히 13:23) 데살로니카 3장 2절에서도 디모데는 형제로 불리웁니다. 베드로는 바울을 형제로 호칭합니다.(벧후 3:15)
(12)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목양하도록 말합니다(벧전 5:2)
목사들에게 목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별도의 목사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성경적 장로들이 목양의 임무를 수행하였음을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13) 장로직이 목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이 바로 목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왜 목사들을 장로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모든 장로가 목사라면 오늘날 각교회의 장로들을 모두 목사들이라 부르든지, 아니면 목사들을 장로들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들만 축도하고 장로들은 축도하면 안됩니까? 목사들만 세례 줍니까?
오늘날 목사들을 장로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장로들의 선임요건이나 의무를 충족시켜 선임하지도 않으면서, 권한은 무제한으로 행사케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인간적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영의 흐름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장로들은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아니고 교회안에서 삶을 통해 검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들은 삶을 통해 검증된 사람들이 아니라 신학교에서 시험볼 때 컨닝하고 졸업식때 계란 던지던 사람들이 안수라는 요술 거쳐서 목사되고 있습니다.
(14) 오늘날 목사들이 성경에 나오는 장로의 자격요건에 따라 선임되고 세워집니까?
디모데 전서 3장 1절-7절까지의 자격요건과, 디도서 1장 5-9절의 자격요건에 따라서 목사들이 선임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 나와서 안수받으면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목사됩니다!
아무리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의 성경적 자격요건을 갖춘 삶을 살아온 신실한 신자라 할지라도, 신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목사가 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목사제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목사제도는 성경적 장로-감독 제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15) 이러한 모순을 모면하기 위하여 목사들은 장로들 중에서 특별히 세워진 가르치는 장로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가르치는 장로들이 성경적 자격요건에 따라서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 외인에게서 선하다는 증거를 받은 자들, 더러운 이를 좇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아담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 자식들을 잘 가르치며, 등등의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들로 세워지고 있습니까? 그것과는 상관없이 신학교를 나오면 목사들이 됩니다!
아무리 성경적 자격요건을 갖추어 있더라도 신학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
결코 목사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비성경적인 교회 리더쉽을 형성하게 하는
사탄의 꼼수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 위에 교회없고, 장로위에 장로 없습니다.
(16) 에베소서 4장- 지푸라기 신학
에베소서 4장 11절을 들어서 목사가 성경적인 직책이라고 어떤이들은 주장합니다.
에베소서 4장11절에서 언급한 것들은 4장 7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의 내용이 바로 사도의 은사, 목자의 은사, 전도자의 은사 등인데, 목자의 은사를 목사라고 고쳐놓아서 목사라는 직책을 만들어냈습니다!
목자의 은사는 전도자의 은사보다 하위에, 맨 나중에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전도사들보다 아래에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1절의 목자는 포이멘의 번역으로서 다른 모든 곳에서는 목자로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목자와 교사를 합한 은사를 목사의 은사로 말할 수는 있겠으나, 그 경우 목자와 교사의 은사이지, 그것이 직책이 아님은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습니다.
목사가 은사는 될 수 있어도 직책이 될 수 없음은 성경 어디에서도 목사 칭호를 가진 사람이나 그 칭호가 언급된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치는 은사가 언급됩니다만 교회안에 <병고침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라는 직책이나 직업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직책을 만들어서 교회를 좌지 우지합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17) 목사가 성경에 나타난 장로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사직이 성경대로 자격요건에 따라 선임되지 않음에 대해서는 묵인합니다. 오늘날 어느 목사도 딤전 3장과 디도서 1장의 성경적 자격요건에 따라 검증되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라고 변명하는 사람들은, 성경적 자격요건은 피해가는 한편, 성경적인 장로라는 직책으로 호도하기 위한 술책일 뿐입니다. 이러한 변명은 인간들을 속이는데는 사용될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는 엄중한 책망과 매맞음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적 자격요건은 피해간다 함은 아예 믿음이 없는 자들이 목사 노회장, 총회장이 되어 교계를 더럽히거나, 교황 추기경 주교가 되어 진정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벼슬과 권한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19) 성경 어디에서도 한 사람이 독점하여 설교하며, 한 사람이 무슨 대단한 축복을 베푸는양 축도하며, 한 사람이 침례베풀고, 한 사람이 만찬을 주관하는 제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기독교의 성경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바빌론의 종교 제사장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분별됩니다. 그 상세는 히슬롭박사의 두개의 바빌론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빌립은 집사로서 침례베풀었으며 스테반 또한 집사로서 위대한 설교를 행하였습니다.
(20) 성경 어디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교회안에 누구는 성직자 혹은 교역자이고, 나머지는 평신도라는 체제는 예수님이 증오하시는 니골라당의 체제입니다! (계 2:6, 15)
니골라당이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이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니골라당이라는 말 자체가 그 뜻을 설명하기때문입니다! 니골라당( 니콜라톤)이란 말은 평민을 지배하는 사람들, 평민위에 군림하는 사람들, 평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서, 교회안에 평신도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교역자들이라는 사람들이며, 목사들이며, 천주교의 사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교훈, 그들의 갖가지 변명과 궤변들을 증오하십니다!
(21) 하나님의 교회는 강단의 사용권이 성령님께 있습니다! (고전 14:29-33)
누구든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단지 여자들은 교회안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두 세사람이 차서를 따라 말씀 전할 수 있으며 먼저 설교(예언) 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계시가 있으면 내려와야 합니다. (고전 14:29-31) 목사라는 직책을 만들어놓고 그에게 모든 것을 독점시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22) 스테판은 집사로서 위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행 7장)
그는 결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목사여야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들마다 한 사람의 목사바알이 있어서 그가 예수님 대신에 섬김을 받으며 모든 설교와 기도를 독점하는 체제는 성도들의 은사 발달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와 말씀과 뜻이 나타나지 못하고 대신 인간 육신이
교회를 지배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교회들을 지배하는 방법입니다!
(23) 필립은 집사이며 전도자로서 전도하며 침례 베풀었습니다.
그가 집사였기에 침례베풀었다기 보다 그가 전도한 사람에게 당연히 침례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는 목사가 아니었고 집사였지만 침례 베풀었습니다! 어느 특정 종교집단을 만들어놓고 그들이 마치 특별히 거룩한 양 성별된 것처럼 옷을 입혀서 성직자제도를 만들고, 그들에게 세례, 각종 성례를 만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은 바빌론 종교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바빌론 종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계 17-18장)
(24) 목사제도는 십자가 이후 15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목사라는 칭호를 사제들에게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사제들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그 어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도 십자가 이후 1500년 동안 사용되지 않았으며 1530년대 를 지나서야 이러한 직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사제도는 카톨릭의 사제제도를 변형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목사제도는 지난 2천년중 1530년대 이후 오직 500년간 존속해오고 있는 제도로서 16세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제도이며 목사제도는 천주교의 제사장(사제) 제도가 기독교 안으로 둔갑해 들어온 것입니다.
(25) 목사제도는 니골라당이라 할수 있으며 카톨릭의 사제제도는 크마림에 해당됩니다. 니골라당은 계시록 2:6, 15절에서 예수님이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시며, 크마림은 즈파냐 1:4과 호세아 10장 5절에 검은 옷을 입은 우상제사장들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닮으려고 열심히 연애합니다! 그것이 바로 ECT ( EVANGELICAL AND CATHOLIC TOGETHER) 입니다. 그들은 서로 잘 통하며 많은 목사들은 카톨릭에 합류할 것입니다. 종말에 매우 조심하여야 할 집단이 바로 이들 목사들과 카톨릭 사제집단들인데 그들의 야합이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입니다. 이 목사들은 이미 일제시대 신사참배시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신사참배로 인도하였습니다.
(26) 오늘날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셔야 할 교회의 머리에 앉아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엡1:22)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안에는 목사들이 그 교회의 머리로 군림하고 있으며 무슨 결정을 할 때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각자의 의견을 내고 조율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결정하기 보다는 “” 목사님””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바알 숭배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인간들은 내려와야 합니다!
(27) 목사들 중에 훌륭한 목사들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그들이 목사들이기 때문에 훌륭한 목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가 진정으로 거듭나서 훌륭한 믿음의 생활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훌륭한 목사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들이 있다 하여 성경에 없는 목사제도가 성경적이 되고 정당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경대로 성경적 장로로 사역한다면 더욱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것입니다. 그러한 목사들은 성경적 순종의 한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 모임의 진리에 관한한 고집불통의 꼴통신학을 유지하며, 교회안에서 군림합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지라도 그분앞에서 엄중한 책망과 매맞음을 당할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묵묵히 전도하며 진리의말씀대로 설교하는 목사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고집한 목사제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용인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의 폐해는 엄청난 것이었음이 그 심판대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28) 목사제도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다리이며, 지푸라기 신학의 결과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인간적 제도로서 바빌론 종교에 뿌리를 둔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각종 비행들과 수많은 비리들을 가져올 뿐입니다. 따라서 이 제도를 아무리 개혁한다 해도, 앞으로 그들은 수많은 비리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이 오늘날 수많은 비행들을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전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9) 목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구원파 이단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구원파 이단이라고 정죄함으로서 그들 스스로는 구원파의 대적인 구원 대적파이며, 구원 반대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당 다니기로 결심하면 거듭난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정통이 됩니다!
목사들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소위 구원파들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여러 이유들 중의 하나는 자기들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복음을 성경적으로 아주 잘 전하는 것이 시기 질투 되어 반응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들의 직책이 비성경적임과 그들의 비행들이 탄로나는 것이 두려워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구원 대적파들이며 구원 반대파들입니다!
(30) 목사들은 많은 경우에 십일조와 건물중시 건축헌금을 강조합니다.
이것들은 비성경적이며 니골라당의 교훈으로서 (계 2:6, 15) 예수님이 증오하시는 바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세상밖으로 불러낸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십일조는 희생제사들을 드리던 레위지파를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으로서 십자가 희생제사로 모든 희생제사를 영원한 효력으로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후로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들이 되었으며 그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다른 사람들에게 줄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연보만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흔히 성전건축헌금이다 하여 건축헌금을 강조합니다. 신약시대에 성전은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며(고전 3:16, 6:19) 건물은 그 성도들이 소유하는 부동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들이 건축헌금과 건물을 중시하는 이유는 건물이 커져야 목사들의 권위가 세상에서 세워지며 목사들이 존경을 받는 세상적 욕구 때문으로 파악됩니다.
신약교회는 수시로 가정집에서도 시작되었으며 건물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건물의 벽돌 사이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가운데 계십니다. 목사들은 이런 점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제도하에서는 이상하게도 성만찬의 자주 실행(고전 11:25-27) 이 배제되어 일년에 2-3회 실행되고 목사들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 목사숭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성경적 모임들에서는 주님의 피흘리심과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앙망하는 주님의 만찬이 예배의 중심이 되며 그것이 매주일 시행되어 자주 실행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 번역 성경들은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피해가기 위해 고전 11장 25, 26절의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헬라어 호사키스는 자주 할때마다의 뜻입니다. 읽으시는 성경을 확인해보십시오!
성경적 주님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존귀하게 높이는 시간이 될 것이며 예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31) 목사만 제사장이라는 주장
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목사들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같으며 일반 신자들은 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그 제사장이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체제가 기독교 교회의 체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말합니다.
너희는 < 택함받은 족속이요, 왕 실의(왕 같은) 제사장단이요, 거룩한 나라요, 특별한 소유를 위한 백성이니 (벧전 2:9)
10 우리를 우리 하나님께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그 땅에서 왕노릇하리이다.”하고 말하니라 (계 5:10)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사장들입니다. 그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음으로 마음 속에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마음속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피없이는 못들어가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롬 15장 16절의 복음 제사장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전도인으로서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오는 복음 제사장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없는 직책인 목사만이 제사장이라는 괴리 (괴상한 이론)는 비성경적이며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 조직을 통해 교회를 인간 육신대로 움직이려는 사탄의 영에서 나온 바빌론 종교 제사장제도로의 회귀 술책입니다!
(32) 목사에게 형제 호칭
목사들도 겸손하며 훌륭한 분들이 많다고 하면서 목사들이 장로이고 그런 분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 너희 선생은 단 한분 그리스도뿐이요,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니라> ( 마 23:8) 하신 말씀을 좇아 당신의 교회의 목사에게 형제님, 하고 불러 보십시오. 또 아무개 형제님이라고 다른 분들에게도 부르며 전해보십시오.
그러면 목사가 앞으로 자기는 형제로 불리우기 바란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고 이상한 사람 보았네? 하며 펄쩍 뜁니까? 한번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보기가 두렵습니까? 예수님이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지도자로 부르지 말라고 하신 명령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목사의 말이 더 중요합니까? 당신이 목사를 두려워하며 목사에 굴복한다면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한 예수님보다 목사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호칭 문제에 관한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엿먹어라 하면서 목사 바알을 섬기시는 것입니다!
당장 목사에게 형제님이라고 부름으로 실천해보십시오! 그가 30 센티 이상 뛰는지 이하로 뛰는지 재어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습니다! (히 2:11)
(33) 누군가는 교회의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어떤 분들은 아무리 그래도 교회에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아래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바로 장로로도 불리우고 감독으로도 불리우는 직책의 형제들입니다. 그들의 자격요건 등은 아래에 설명됩니다. 그들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라는 일인 목회제도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으뜸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아래와 같은 사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임에 편지하였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 좋아하는 자 디오트레페가 우리를 환영하지 아니함이라. (요삼 9절)
성경적 복수 장로제도이면 충분합니다! 그 자격요건등에 관해서는 딤전 3장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 상술되어 있습니다.
(34) 그래도 신학교 출신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
아무리 그래도 신학교 출신이 가르쳐야 이단들이 없고 그릇된 교리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이런 주장은 현실적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형제모임의 성경적 실행들을 관찰하고 경험해보지 않았을때까지 유효합니다. 실제로 소위 형제모임이라 불리우는 곳들에 가본다면 그들이 신학교 출신의 지도자들을 갖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훌륭한 성경적 지도자들을 배출해냈고 현재도 많은 모임들 안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모임의 수많은 위인들은 신학교 출신도 아니었거나 목사가 아니었고 여러 장로들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겨놓았습니다.
따라서 신학교 출신 목사가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형제들의 은사 계발을 막는 그릇된 교훈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5) 그래도 신학교 출신이 가르쳐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 주장 II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회당 건물 벽돌들 사이에 마치 성령이 계시는양 건물이 성전이라고 가르치며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고전 3장 16절과 6장 19절에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로마카톨릭에서 기독교가 나온 것처럼 교회사를 오해하게 하며, 로마 카톨릭 바티칸이 보관해온 조작 변개된 성경사본이 가장 권위있고 정확하다고 그릇 가르치며, 비성경적 오류 투성이의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이 정통인양 가르치고, 폐해진 십일조를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도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일년에 두어차례로 축소시키는 한편 인간 목사들의 설교로 대체하게 하며, 자매들의 머리수건을 폐하고, 침례를 세례로 대체시키며, 세계 최대의 이단 로마 카톨릭과 야합하기 위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며, 복음교회와 카톨릭이 함께라는 ECT ( Evangelical and Catholic Together) 운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일본의 천조대신 이름으로 침례를 받기도 하며 신자들을 그리해도 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회개하거나 시인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보다 나은 성경 번역들이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공사 조종사 출신이나 공과대학 공학교수에 의해 번역되어온 것은 주목할 사안입니다. 신학교 출신들이나 교수들은 도대체 뭐합니까? 그들은 대통령 조찬기도회에서 아첨하는 기도할 것 연구하느라 바쁩니까?
이들에게서 배운 목사들만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교회 지배 술책입니다!
2. 성경에 없는 신학교
목사제도 주장자들은 신학교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며 그 근거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과 구약의 선지자 생도들을 근거로 듭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의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두란노 서원 – 학당
사도행전 19장
8 그가(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간 대화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믿게하며 담대히 말하니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전도함)
9 어떤이들이 완고하여 믿지않으면서, 무리앞에서 이 도를 악담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 세상과 분리), 그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 에클레시아- 교회행위), 날마다 어떤 투란노의 학당에서 토론하였더라( 전도와 교회 활동- 초신자 훈련) 10 이것이 두 해동안 일어났으니 모든 아시아 거주하는 자들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더라( 전도 사역)
1) 두란노 학당이란, 그리스와 터키의 서해안 지역 도시국가들의 전제군주, 독재자들이 세운 학교들을 말합니다. 두란노는 영어의 티라니( Tyranny) 에 해당되며 그뜻은 폭군, 폭정, 전제군주를 뜻합니다.
2) 두란노 학당은 바울이나 어느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두란노 학당이란 전제 군주들이 고위관료 양성등을 위하여 세워놓은 관립, 왕립학교였습니다. 바울은 독재자도, 폭군도 아니었습니다!
3) 바울은 그 학당에 들어가 주로 전도하였으며 그 결과 아시아의 모든 거주자들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전도한 것입니다!
4)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 같은 사람이 카톨릭에 들어가서 전도하였더니 대부분은 반대하였으나 그들 중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초신자들을 양육하는데 그들 중에 두명이 서울대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서울대 안에 그리스도인학생회를 구성하면서 그들이 “바울”을 초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바울”이 전도하였더니 그 청중들이 계속 지인들을 불러와서 계속 정기적으로 성경 전도 모임을 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울시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서울대라는 장소를 빌려서 전도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바울이 신학교를 서울대안에 세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두란노 학당이 신학교였습니까?
아닙니다! 독재자, 전제군주의 학교였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신학교가 두란노 학당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바로 신학교들이 독재자들의 망령이 세운 학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임(교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등하게 모이는 모임으로서 그 자체 내부 성도들의 양육과 성장을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 가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전도의 기지요, 바탕으로서 마땅히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전도할 수 있는 중심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든 성도 양육과 전도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중심체인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신학교의 근거를 누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란노 학당 출신이 목사되었다는 말을 읽어보셨습니까? 아니면 장로되었다는 말이라도 읽어보셨습니까? 바울이 장로들을 도시 마다 세우라고 디도나 디모데에게 말할 때 두란노 학당 출신을 존중하라고 말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성경을 주로 공부하게 하는 어떤 교육기관(성경학교)이 있어서 어치피 자녀들이 다른 교육을 받을 바에는 성경 공부를 하도록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출신자들이 목사라는 직책을 업고 나와 교회안에서 검증되고 세워져야 할 사람들을 대체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디도서 1장과 디모데전서 3장의 교회 리더쉽에 관한 명령을 대체시킬 어떤 학교도 성경적으로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2) 선지자의 생도들
열왕기 하 2장
7절 선지자들의 아들들 가운데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았는데 그들 두 사람이 요르단 옆에 섰더라.
15 여리고에서 바라보던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그를 보며 이르기를,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거한다, 하고 가서 그를 만나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더라
열왕기 하 4장
1 이제 대언자(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아내들 가운데 어떤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내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주를 두려워한 줄은 당신이 아시나이다. 빚을 준 사람이 이르러 내 두 아들을 취하여 노예로 삼고자 하나이다, 하매
그런데 이 대목을 한글 개역 성경은 선지자의 생도들로 번역하였다가 오늘날은 개역개정에서 선지자의 제자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들은 브네이 느비임으로서 느비임은 선지자들이라는 말이고, 브네이는 아들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브네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자손들 혹은 아들들로 말하며, 브네이 레비는 레비인들의 아들들을 말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Sons of Prophets로 번역한 것처럼 한글 성경은 선지자들의 아들들( 흠정역은 대언자들의 아들들)로 번역함이 옳은 것입니다.
왜 선지자의 아들들이 엘리사에게 모였을까요?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가 없으나 다음의 말씀들을 읽어보면 짐작하게 하는 바가 나옵니다.
열왕기 상 18장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주의 선지자들 중에서 백 명을 취하여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그들에게 빵과 물을 먹인 일 즉 내가 행한 일을 내 주께서 듣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세벨이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들의 가족들은 풍비박산되어 흩어지기도 하고 자녀들을 돌볼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선지자들의 아들들을 돌보는 한편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 상19장
10 그가 이르되,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오며 나만 곧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제거하려 하나이다,
인간의 보기에는 아합과 이세벨이 모든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만큼 참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 엘리사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그렇게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고 있습니까? 참고로 형제모임의 죠지 뮐러는 고아원 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제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이 선지자의 생도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목사제도나 신학교를 도출해내기 위해 선지자의 아들들을 교묘히 변개시킨 번역에 불과한 것입니다.
목사들은 이런 사실을 안가르칩니다!
(3) 선지자의 무리들
사무엘상 10장
10 그들이 저쪽에 있는 산에 이를 때에, 보라, 선지자들의 무리가 그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영께서 그에게 임하시매 그가 그들 가운데서 예언을 하니라.
11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보니, 보라, 그가 선지자들 가운데서 예언을 하므로 이에 백성이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임한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사울도 선지자들 가운데 있느냐? 하고
어떤 목사제도 주장자는 이것이 바로 신학교의 원시적 형태이며 그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예언합니까? 선지자들이 말씀교제하고 함께 모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신학교의 근거가 되며 그것이 바로 다른 성경에서 장로(=감독)들의 자격요건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대신하여 신학교 졸업자들로 교회를 독점하게하며 강단과 축도, 성례를 독점적으로 실행케하라는 말씀의 근거로 주장될 수 있겠습니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예언하고 증거하는 선지자들입니다!
3. 성경적 리더쉽
(1) 디모데 전서 3장
1 미쁘도다 그 말이여, 누가 감독직을 간절히 바라면, 그는 선한 일을 열망한다 함이라. 2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건전하며), 고상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하며, 잘 가르치며, 3 술 취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고, 대신 온유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의 집을 잘 다스리며, 자녀들을 모든 진지함으로 순종케하며, 5 (만일 누가 자기의 집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모임을 돌보리요?) 6 새로 심어지지(회심하지) 않아서, 교만하여져 마귀의 정죄에 그가 빠지지 않도록 할지니라. 7 또한,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그가 빠지지 않도록, 그는 마땅히 외인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가져야 하느니라.
오늘날 교회의 감독직을 바라는 사람은 선한 일을 열망하면 (사모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드시 신학교 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신학교 가기로 대체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 불합격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신학교 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능성적이 그리 높지 않아도 갈수 있는 곳이 신학교로 알고 있습니다.
절제하며, 신중하며(건전하며), 고상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한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신학교 성적만 좋으면 됩니다. 때로는 신학교에서 커닝으로라도 성적만 좋으면 됩니다. 졸업식장에서 계란좀 투척해도 됩니다!
5 (만일 누가 자기의 집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모임을 돌보리요?)
자기 집 다스려본 경험없어도 교회는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요? 약관 25세의 나이에 신학교 나오면 할 수 있는 벼슬이 바로 목사벼슬이기 때문입니다!
(2) 디도서 1장
5 이를 인하여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둔 것은, 내가 네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네가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하려함이니, 6 만일 누가 흠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방탕하다거나 불복종한다는 비난이 없는, 믿는 자녀들을 가졌으면 가하니라. 7 왜냐하면 감독은 마땅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며, 쉽게 화내지 않으며, 술취하지 않으며, 구타하지 않으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나그네에게 친절하며, 선을 좋아하며, 냉철하게 생각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자제하며, 9가르침을 좇아 믿음의 말씀을 견고히 붙들어, 그가 능히 건전한 가르침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훈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바울이 여기서 장로 자격요건을 설명하다가 감독이라고 바꾸어 말한 것은 그 직책이 동일한 실체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신학교가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줍니까?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나그네에게 친절하며, 선을 좋아하며, 냉철하게 생각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자제하며,
이러한 성품과 자질은 신학교를 간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모임 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순종함과 그 말씀들을 생활에 적용하려는 인내의 노력을 계속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뜻이 무엇인지를 늘 살피는 삶을 계속할 때, 그 신자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며, 교회 모임들을 이끌어갈 능력과 자질과 성품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4. 오늘날의 목사중심주의는 목사바알제도, 목사바알은 묵사발 될 것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직접 가르치고 교훈하시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그분과 그 사이에 다른 인간을 두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거듭난 신자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합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마리아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둔 사람들은 마리아 숭배자들이며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인간들은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직접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의지하여 나아가며 그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목사라는 허공에서 온 직책을 만들어놓고, 그를 통해서 날마다 인간 육신의 설교를 들으며, 그를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두고 지내는 삶은 바로 목사를 바알로 섬기는 바알숭배입니다.
이러한 목사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이 바알숭배로 말미암아 엄중한 징계와 형벌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징책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 숭배자를 격파흩어버리십니다.( 바알 프라침- 바알 격파: 대상 14:11)
이제 현대교회는 초대 교회를 본받아 성령님을 좇으며, 엉터리 신학교 이론에 현혹되지 말고,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며, 성경적 장로제도와 성경적 교회 모임의 실행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는 모임들이 되어야지, 인간들이 세운 신학교, 인간들이 만들어낸 총회조직, 노회조직, 각종 종교 직책과 종교 행사들을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학교도, 목사제도도,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공에서 왔습니다!
이제 오직 주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 그분의 가르침만을 믿으며 주목할 때입니다.
2013. 2. 20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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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까? 로마 제국시대에만 유효합니까?
님은 이목사님을 만나보셨나요? 직접 만나 얘기도 해보지않고 판단하는것은 경솔한 일입니다.
대구교회분들이 이목사님을 숭배할만큼 모두 바보들은 아니랍니다. 제가보기엔
하토브님보다 더 성경에 능통하신분들이 많습니다. 신학은 물론이고 신학박사님도 여럿 계십니다.
숭배와 존경은 다릅니다.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을 숭배로 매도한다면 우리기독교의 앞날은 암흑입니다.
이시대의 문제는 성경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경의 열매가 없다는것이죠.
성경이 그리 어려운 책도 아니고 혼자 공부해도 얼마든지 깨달을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닮은 사랑과 존경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것이 모순인것이죠.
이 카페에 아래와 같은 수많은 글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이현래씨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이현래목사님에 대하여-
이현래와 그단체(열린문님)는 공중재림하는 예수님을 못만난다
대구교회 여름집회 인터뷰 (이현래목사) [10] ( 사랑)
대구교회 여름집회 인터뷰(이현래목사) ( 열린문)
예수님의 공중재림이 없다고 하는 이현래 [31]
하나님의 전능성 부인 등 황당의 극치 /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설교 녹취록 [25]
이 떨거지들 언제까지 봐야 되나요? -_-;;; [23]
한국교회 언저리 떠도는 신화사상들 .. 이현래 씨 등 설교 - 김석종 목사의 설교
그런 글들을 읽었어도 본인을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비평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현래는 신이니까 비판하면 안된다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단들에게 속는 사람들의 사기 당하는 수법이 똑같은 논리입니다!
님이야 말로 제발 여기에 올려져 있는 비평의 글들을 모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김정일 김일성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 비판할 수 없습니까? 아무리 수많은 영상과 글을 보았어도 직접 만나 얘기도 해보지 않고 김정일을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지요?
성경말씀이 절대 변할수없다는것은 삼척동자도 아는일이지요.
성경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이지 전통이나 형식이나 규제나 제도가 아닙니다.
님은 안식일을 지키나요? 비늘없는 고기는 먹지않나요?수혈은 받지않나요?
그리고 구름타면 안빠질 사람이 있나요? 성경은 민화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영광을 상징한다는것은 누구나 아는일입니다.어쨋든 서로 따져봐야 나올것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이해하고 상충해가야할일이지 자기의 해석만 맞다고 하다면 분열만 남겠지요.누구도 완전하게 성경을 해석할수없고 그내면의 하나님마음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해석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생각도 있을수있구나 아는것과 받아들일것은 받아들이고 버릴것은 버리는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겠지요.
그래서 모두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은혜위에 은혜가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해석은 이단 사이비가 하는 해석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해석입니다.
이현래는 사이비 집단임을 깨닫고 그런 사이비는 버릴줄 아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지요. 님의 구원 자체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목사라는 직책에 대해서 서로 교제하기로 하고 다시 근거자료를 찾아보던중.. 여기에 있는 자료들을 물론 다 봤다고 생각했습니다만...영문 NIV에는 pastor라는 단어가 한번 나오는데 KJV에는 렘 2:8 3:15...등 렘에서만 8번 엡4:11 에서 1번 총 9번 쓰여 있던데...원어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언어에 워낙 짦은지라~^&^ 부탁드립니다.
아, 이글에 답이 안되었네요.
예레미야서의 pastors 는 목자들로 번역함이 옳습니다.
교회안의 그런 직책이 있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런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휴대폰에서 간단히 씁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성전에 있었고 느디님들이 봉사했습니다.
성막. 성전밖에는 각 지파 족장들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외에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목자는 그런 지도자들 중 누구든지 그러한 목자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은사 호칭이었고 직책은 아니었다고 믿어집니다.
신약시대에 그런 직책은 없었습니다.
ㅎㅎ 늦게라도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이미 그렇게 교제를 마쳤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것을 성경에 근거해 올바르게 서로 알게 하는 교제를 위함이였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맞추어 살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명도, 예수님외에는, 없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구절대로 살고 있지 않으면 목사제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도 목사제도든 잘못된 제도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런 말 또한 이현래 집단이 얼마나 교활한지를 말해줄 뿐입니다.
"성경에 목사는 없다"(한솜미디어) 강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