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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불교의 동북아시아로의 전파
대한불교 총지종 총지사 특강원고(2010.4.21)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장 김규현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티베트불교의 특성과 종파들
3. 티베트불교의 분류
4. 티베트불교의 중국화
5. 한국 속의 티베트불교
6. 티베트학(Tibetanlogy)의 미래
7.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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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스스로를‘뵈’라고 부르는 티베트!
근래에 구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티베트사원이 세워지고 티베트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이 신드롬을 이루며, 티베트를 소재로 한 서적, 영화, 음반 같은‘문화인프라’가 현대인들의 공허한 가슴속을 파고들면서 티베트불교가 세계적인 화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노벨평화상을 획득한, 나라 잃은 망명객인 달라이라마에 대한 존경과 측은지심도 한 몫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주요인은 티베트불교의 독특한 수행법이나 색깔이 선명한 불교문화 등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베트불교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같은 길을 가는 불교도로써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운운)
2. 티베트불교의 특성과 종파들
속칭 라마교(Ramanism)라고, 일본식 명명법으로 잘못 불리고 있는, 티베트불교는 1960년대에 붉은 중국에 점령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라의 주권은 없어졌지만, 티베트불교는 세계적으로 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대,소승으로 가르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제는 서구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즈라야나(Vajrayana), 즉 금강승(金剛乘)을 하나 더 추가하여 3가지로 불교를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금은 생소하지만 바로 이 단어가 티베트불교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티베트불교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밀교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티베트에 처음 들어온 불교 자체가 인도의 후기불교- 즉 딴뜨릭 불교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신비적 요소와 상징성 그리고 주술성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딴뜨릭 불교 자체가 기존불교에 비해 다소 현란한 요소가 있는데다가 다시 토착신앙인 뵌뽀교(Bo"npo)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외부의 문화요소가 접근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지형적인 원인도 작용하였습니다.
불교는 법륜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부딪혔던 모든 민족들의 토착신앙을 안으로 끌어들인 종교사적으로 유일한 종교라고 일컬어집니다. 상극(相剋)하지 않고 상생(相生)한 포용력 있는 종교였습니다. 해동반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설역고원(雪域高原) 티베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뵌뽀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다 보니 무속적인 냄새가 너무 진하게 배어 버려 신비적이고 주술성이 강한 불교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 대승불교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특색입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대승의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해탈에 있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에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아가 해탈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이 진정한 대승불교도가 걸어야 할 ‘보살(菩薩)의 길’인 것입니다.
그들의 원력은 한 영혼을 가지고 수없이 윤회하면서 전생에서 못 다한 원력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까르마파 린포체는 벌써 17번이나, 달라이라마는 14번이나, 판첸라마는 11번이나 계속 한 영혼으로, 그 의식을 유전자 속에 간직한 채 몸만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불교의 고향인 인도와 개화지 중국에서 불교가 거의 사라져 버린 현재 시점에서 유일한 대승권의 종주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우리 해동불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하고 곱씹어 볼 문제입니다.
1) 닝마빠 종파
8세기 히말라야를 넘어 설역고원에 불교를 전한 빠드마삼바와[일명 구루린포체,蓮花生]를 종조로 창립된 첫 번째 종파로 가장 오래되었기에 고파(古派)라고도, 또는 붉은 옷과 모자를 쓰기에 홍교(紅敎) 또는 홍모파(紅帽派)라고도 합니다. 딴뜨리즘적 성향이 강한 종파로 현란한 의식과 매장경전(埋藏經典)에 의한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종파의 승려들은 대처(帶妻)를 하고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히말라야 권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꽃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추상적인 인적사항과 생몰연대를 비롯한 모든 것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인물인 이 초능력자는 설역에 들어와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으며 25명의 제자들에게 요가딴뜨라의 요체를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이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것과 가르침을 펼만한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을 알고 그는 많은 경전과 불상, 불구 등을 다음 세대를 위해 숨겨 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티베트사자의 서」입니다. 이 매장경전을 찾아내는 많은 초능력자 즉 ‘테르퇸’이 유물들을 찾아내어 그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단절됨이 없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닝마파의 전통에서는 최고의 깨달음, 즉 ‘대원만'(Dzogchen)경지’를 성취하는 수행과정을 일반적으로 원인승(原因乘), 외(外)딴뜨라, 내(內)딴뜨라에 각각 3가지씩 구승(九乘)으로 나눕니다.
2) 까규빠 종파
인도로 직접 내려가 밀교수행과 경전 번역을 한 역경사 마르빠에 의해 창립되어 밀라래빠(1040-1123)에 의해 널리 퍼진 종파입니다. 특히 하얀 옷의 거사’라는 이름의 제2대조사 밀라래빠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십만송(十萬頌)」이란 유명한 시집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로 신통력이 뛰어난 초능력자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전기에 의하면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점철된 고행자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카일라스산[강린포체 또는 강디세]의 연고권을 놓고 뵌뽀교 사제와 겨룬 한판 싸움은 민간에 회자되는 유명한 설화입니다. 이 종파는 고행위주의 두타행(頭陀行)에 중점을 두었고 장발에 흰옷을 입었기에 백교(白敎)라고도 하며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며 밀교의 전통대로 철저한 사도상승(師徒相承)을 전통으로 삼습니다. 이 종파는 밀라래파의 제자 감보빠에 의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춘 후에 다시 4줄기 8갈래로 분파되었는데 그 중에 까르마파가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종파입니다.
까귀빠 종파의 가르침은 인도의 대성취자인 나로빠의 ‘나로최둑’과 대성취자 마이뜨리빠의 ‘마하무드라’에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1)나로최둑(나로빠의 여섯 요가)
① 뚬모(gTum mo:열)요가는 나로빠의 여섯 요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실천방법으로 이 요가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행복을 일으키고, 행복과 공성을 결합하는 지혜를 실현하기 위해 맥, 기, 열, 정수가 사용됩니다.
② 규뤼(sGyu lus:환술의 몸)요가를 실천하는 목적은 깨달음의 길에서 보다 진전하기 위한 것으로 이 요가를 실천함으로써 수행자는 모든 현상을 신들의 환술의 몸으로 보도록 배웁니다.
③ 미람(rMi lam:꿈)요가는 수행력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수행자는 잠자는 과정 또는 꿈꾸는 상태에서 인식하는 것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④ 외쎌(od gsal:광명)요가는 도의 정수로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명료한 것과 공성의 몸으로 발생하게 되는 '태어나지 않은 광명의 삼매'의 상태를 성취할 때까지 수행합니다.
⑤ 바르도(Bardo:생과 사의 중간상태)요가는 환술의 몸과 광명의 경험을 통해 중음의 상태에서 명료함과 공성의 합체를 현행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⑥ 포와(Pho ba:의식의 전이)요가는 전생에 걸쳐서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만약 수행자가 이 수행을 통해 도를 완성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는 이 수행을 다음 생에까지 계속 지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수행을 통해 수행자는 마하무드라의 문을 통해 청정한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수행자가 자신의 의식을 다른 사람의 몸에 전이할 수 있는 '포와공죽' 즉 유체이탈(流體離脫)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포와도 있습니다.
3) 싸갸빠 종파
내륙 깊숙한 ‘싸갸’라는 지방에서 ‘쾬’ 씨족에 의해 창건된 종파인데 문수, 관음, 금강을 의미하는 홍, 백, 흑색을 주된 문양색(紋樣色)으로 사용하기에 일명 화교(花敎)라고도 부릅니다. 13세기 원나라를 등에 업고 위탁정권을 세워 설역고원을 백여 년 동안 통치하였는데, 이 종파는 원나라의 황실을 움직여 원나라의 국교가 되면서 전 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친 종파입니다.
특히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1308~1313)이 대략 3년 동안 이 사원에서 귀양살이 또는 승려생활을 한 것은 특기할 사항입니다. 원사(元史)와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원 황제가 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의 살사결(撒思結:싸갸사원)로 유배 보내어 대략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하였다. 이 때 장원지張元祉등 18명과 함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 종파는 현재에도 마치 중세의 요새같이 생긴 싸갸사원을 중심으로 남부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데 역시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원은 고색창연한 불교문화재를 많이 보존하고 있어서 순례길에 꼭 들려보아야 할 의미 깊은 곳입니다.
4) 겔룩빠 종파
토번제국의 마지막 왕인 랑다르마 암살사건 이후 티베트는 긴 암흑기에 들어갔는데 그 말기에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명한 밀교승인 아띠샤(Atisha 980~1054)가 설역고원으로 넘어와 전법륜의 기치를 들어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시대를 열었습니다. 법을 이은 제자에 의해 카담파가 라싸 근교에서 세워졌는데, 이를 토대로 쫑카빠(1357~1419)가 기존의 종파들의 폐단을 개혁하고 계율을 정비하여 승려들의 독신을 의무화하여 비구승단을 만들며 티베트 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었기에 처음에는 신(新)카담파라고 하다가 후에 겔룩파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황색의 옷과 마치 로마병사의 투구 같은 노란 모자를 쓰기에 황교(黃敎) 또는 황모파(黃帽派)라고도 부르는데, 후에 까르마파를 모방하여 달라이라마 제도를 확립하여 정교를 양손에 쥐고 오랫동안 분열상태에 있었던 국토를 통일하여 라싸의 뽀딸라궁을 중심으로 5백 년 간 설역고원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의해 국토를 점령당한 뒤에 통치권을 잃어버리고 법왕인 14대 달라이라마는 1959년 무력항쟁의 실패 후에 인도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후 1966년부터의 문화혁명으로 모든 사원들은 거의 파괴되고 승려들은 환속 당하였으나 1984년부터의 햇빛정책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사원들도 복구되기 시작하여 다시 어느 정도 소생하여 겔룩파의 6대 사원을 중심으로 아직 최대 종파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종파의 가르침은「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람림」-“깨달음의 길로 가는 올바른 순서” 라는 논서를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3. 티베트불교의 분류
1) 금강승(金剛乘:Vajra yana)
인도불교사에서는 딴뜨릭 부디즘(Tantric Buddhism)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서구에서는 완전히 대,소승과 어깨를 같이 하는 불교의 3대산맥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불교사상을 부르는 말입니다.
알려진 대로 고향인 인도에서 불교는 중세기 이슬람의 인도대륙 침입과 함께 쇠락의 길에 들어설 때였는데, 이때 불교의 핵심교단은 생존을 위해 히말라야를 넘는 비상탈출구를 찾아내어 티베트로 피난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의 최대 수입처인 중국으로 가는 기존의 불교 전파로―파미르 고원을 넘는 실크로드나 해양로가- 이미 이슬람에 의해 차단되었기에 기존의 방법으로는 인도에서 탈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스런 결과이지만,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딴뜨릭 불교를 신봉하는 밀교학승이었기에 자연스레 딴뜨리즘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티베트사자의 서」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빠드마삼바와, 산타라크시타 같은 딴뜨라불교의 대가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티베트가 처음으로 받아들인 불교는 우리 대승권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후기 밀교적인 불교였던 것입니다.
반대로 중원대륙에는 8세기 이전에, 인도의 4단계의 밀교 중에서 3단계까지가, 주로 해로에 의해 전래되었지만, 그러나 시기적으로 티베트에 전래된 제4단계의 최후의 밀교인‘아누타라요가 딴뜨라’는 받아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중국대륙에도 티베트를 점령한 원, 청에 의해 다시 간접적으로 티베트의 밀교를 장전불교(藏轉佛敎) 또는 황교(黃敎)라는 이름으로 전래되기는 하였습니다.
말을 바꿔보면, 고향인 인도에도 없고 대,소승권 어디에도 없는 인도의 마지막 후기불교의 진수가 바로 티베트불교의 본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세계가 히말라야 뒤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설역고원의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딴뜨리즘
티베트의 딴뜨릭 불교를 ‘금강승’ 또는 ‘밀교’ 중에서 어느 것으로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를 조금은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상통되는 의미로 쓰이고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자면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딴뜨리즘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또는 자인교(Jain) 같은 인도에 뿌리를 둔 종교에 6세기 이후에 불어 닥친 새로운 포괄적인 사조를 총칭하는 말로, 여기서 ‘딴뜨라(Tantra)’는 산스크리트어로 ‘씨줄’이란 뜻으로, 기존의 경전을 뜻하는 ‘슈뜨라(Sutra)’의 ‘날줄’이란 뜻에 상응되어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번역에서도 구별되어 기존의 그것을 ‘경전’으로 번역하는 것에 대비하여 ‘경궤(經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반면에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동북아시아권에서 흔히 쓰는 ‘밀교’라는 용어는 전승방법이 스승과 제자사이에 비밀리에 이루어진다는 형식상의 문제를 강조한 중국식 번역에 중점을 둔 것으로, 기존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구분하면서 그 대한 상응되는 대칭어로 사용되어 내려왔습니다. 또한 동북아시아권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기는 해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는 사실도 티베트의 딴뜨라 불교와 비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별법은 오히려 딴뜨릭 불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에, 차라리 아래와 같은 시대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리라 생각됩니다. 당시 인도 힌두사회에 딴뜨리즘이란 이름으로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왔던 이 일련의 사조는 당시 사변적이고 현학적으로 치닫던 난해한 대승불교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종교를 중생들의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어려운 이론보다는 “인간의 몸과 입과 뜻”을 활용하여, 몸으로는 무드라(契印)를 짓고 입으로는 만트라(眞言)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만다라>를 관상(觀想)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생의 현세적 욕망인 화를 피하고 복을 부르는 것과 ‘즉신성불(卽身成佛)’에 목적을 두고 있었기에 당시 민중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불을 목표로 하는 것은 불교의 어느 수행법이든 기본적으로는 차이가 없겠으나, 소승은 성불을 목표하면서도 일체의 번뇌를 끊고 먼저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반면, 대승은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성불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현세에서의 성불은 쉽지 않으니 억겁의 긴 수행과 보살행이 필요하다고 설하고 있지만, 밀교는 “인간의 몸과 입과 뜻”으로 바로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차별화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상인 딴뜨릭불교는 시대조류에 발을 맞춘 생활불교이고 또한 난해한 이론과 어려운 수행법과 오랜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즉신성불(卽身成佛)’ 할 수 있는 경제적 불교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불교의 혁명적인 개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티베트의 밀교는 넓게는 금강승으로 분류되지만 더 세분하면 구생승(俱生乘:Sahaja-yana), 시륜승, 딴뜨라승, 길상승(吉祥乘:Bhadra-yana) 등으로 세분되는데, 이 중 시륜승(時輪乘) 즉 ‘깔라짜끄라야나(Karacakra-yana)’가 바로 티베트불교의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체는 바로 11세기에 인도후기불교의 제일 마지막 단계로 성행했던 새로운 물결이었습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딴뜨라를 흔히 ‘4종류’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분류법은 티베트의 3대 역사서 중의 하나인『부똔불교사』의 저자인 부똔에 의한 분류이지만, 이 순서는 인도에서 명멸했던 이 사조의 발생순서와 맞아 떨어지고 있어서 현재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1. 크리야 딴뜨라[kriya-tantra, 所作]는 불보살에 공양하거나 예배드리는 의례, 진언(眞言:Mantra) , 계인(契印:Mudra) 등의 외형적인 행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이른바 잡밀(雜密) 또는 주밀(呪密)이라 부릅니다. ‘크리야’는 금기(禁忌) ·부적(符籍) ·주법(呪法) 등의 다양한 종교적인 행위에 초점을 두는데, 주로 현세이익적인 내용, 즉 중생들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는 기복(祈福)적인 수법을 말합니다.
2, 챠리아 딴뜨라[Cariya-tantra, 行]는 크리야에 다시 내면적인 명상법을 덧붙인 것으로 밀교경전「대일경(大日經)」에 근거한 것으로 티베트 전승의 제2기에 해당됩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선무외(善無畏:Subhakarasingha) 삼장에 의해 「대일경」이 번역되어 밀교의 양대 산맥의 한 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3, 요가 딴뜨라[Yoga-tantra, 瑜伽]는 요가의 명상법을 중심으로 불보살과 수행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론을 설한 것으로,「금강정경(金剛頂經)」에 근거한 것으로 이른바 순밀(純密) 또는 통밀(通密)이라 부릅니다. 요가 또는 삼마디(三昧:samadhi)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닦아 정신통일을 하고 그 속에서 붓다와 내가 합일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는 챠리아 보다는 늦지만 내용적으로 대일여래가 ‘즉신성불’을 설하는 등의 의미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순밀로 분류하기는 합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선무외와 동 시대에 당나라로 들어온 금강지(金剛智:Vajrabodhi) 삼장에 의해「금강정경」이 번역되어 역시 밀교의 양대 산맥의 한 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금강지의 법맥은 불공(不空:Amogha vajra)삼장으로, 다시 신라의 혜초(慧超)로 이어졌다는 점은 본고의 주제 이외의 관점이지만, 특기할만합니다.
4, 아누타라 요가 딴뜨라[Anuttarayoga-tantra, 無上瑜伽]는 요가행법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하여 인간의 호흡, 기(氣), 혈맥 등의 육체적 생리작용을 응용하여 불보살과 합일을 추구하는 사조입니다. 대략 8, 9세기 한 때 인도대륙을 풍미한 이 최후의 딴뜨라는 다시 <방편(方便)-부(父)딴뜨라>과 <반야(般若)-모(母)딴뜨라>로 나누어지는데, 이중 후자인 ‘반야’는 불교적이라기보다 여전히 힌두교적 색채가 짙은 것으로 여기에는 헤바즈라와 삼바라의 두 종류가 성행했습니다.
한편 ‘반야’에 대립되는 나머지 <방편>계열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일명 <비밀집회딴뜨라>로 불리우며 티베트에서 크게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력(性力:sakti)적인 소재가 등장하기에 잘못 해석된 부분이 생기면서 북방 불교권에서는 좌도밀교(左道密敎)라고 현재까지도 폄하되기도 합니다만, 이런 오해를 받게 된 원인으로는, 시각적인 방편으로 미투나상(Mituna) 같은 모습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티베트어로 ‘야붐’ 즉 남신(Yab)과 여신(Yum) 합성어인 이 불상은 사실상 유교적 관습에 젖어 있는 북방불교도의 눈에는 해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형상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모든 상반되는 원리의 합일”에 있기에, 다만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응기방편으로써, 상반되는 원리의 상징인 남녀가 껴안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이해했다하더라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당시나 현재 사회의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정리를 한 번 더 하자면, 티베트불교의 에센스인 ‘깔라짜끄라 딴뜨라 야나’는 인도후기밀교의 최후의 산물로써 위의 4번째 딴뜨라인 ‘아누타라 요가’ 의 핵심사상으로 이 두 요소, 즉 <반야와 방편>을 합일시키려고 시도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조였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인도대륙에서 불교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에 세계적으로 오직 설역고원에만 그 사조의 영향을 받은 조소, 불상, 만다라, 회화, 음악, 의례 속에서 남아 있어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서만 지난날의 인도후기불교의 원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만다라
아마도 요즘처럼 이 <만다라(曼茶羅:Mandala)>라는 말이 자주 들먹여지는 때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시대적 화두처럼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습니다. 정확히 하자면 이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의 '만다라'의 음역으로 사전적 의미로는 ‘만다’와 ‘라’의 합성어로 “본질을 소유한 것”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냥 ‘둥근 원(圓)’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밀교의 세계를 형상으로 표현한 그림” 이라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겹의 원 또는 사각형 안에 4개의 문을 가진 여러 겹의 사각형 또는 원형의 누각이 있고, 그 누각 안에 여러 개의 불보살들의 방이 있는 구도를 가진 일종의 기하학적 구도를 한 우주도(宇宙圖), 즉 “신들의 궁전도” 라고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현대언어로 정리해보자면 “원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큰 탑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조감도(鳥瞰圖)” 또는 “3차원의 공간의 모형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 넣은 우주설계도(宇宙設計圖)”라고 보면 이해하기 차라리 편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주는 영원한 진리를 뜻하는 “자연적 질서의 상징”으로 대변됩니다. 그리고 또한 만다라의 주인공인 대일여래(大日如來)와 4방불(四方佛)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무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날아다니는 우주선의 선장과 선원들에 해당된다고 비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예술이 상당히 중대한 의미와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다라>는 전문수행인에게는 그것을 화두로 삼아 바라보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한편 일반인들에게는 예배의 대상으로 쓰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불교의 우주관은 4세기 북인도의 대승학자인 세친(世親)의「구사론(俱舍論)」에서 한 학문으로 정립되었는데,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Sumeru)를 중심으로 4대주가 펼쳐져 있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다라>는 이 경전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 우주의 모양을 누구나 이해하기 편하게 시각화시킨 것이기에 언어와 문자로 되어 있는 우주과학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실질적 불교를 표방하며 인도대륙을 주름잡는 사조를 만들어낸 밀교의 주도세력이었는데, 물론 그들은 이 그림에다 똑똑한 현대인들도 풀기 힘들 정도의 훨씬 복잡한 수수께끼를 감추어 놓았습니다. 마치 오묘한 퍼즐게임 같이 말입니다.
만다라는 일반 불화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기존불교에는 없는 밀교 특유의 자비나 분노를 상징하는 ‘존상(尊像)’이 다수 출현한다는 점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외에도 기존의 종교그림이 대개 장엄용에 알맞은 구상화(具象畵)인 것에 반해 만다라는 설계도에 가까운 반추상계열의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지적할 만합니다.
원래 만다라의 기원은 법석용의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다 오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우려 오색모래(五色沙)로 만다라도형을 그린다음 그 곳에서 ‘푸쟈’의식을 행하고는 그 오색모래를 바로 모래의 고향인 강에다 버리는 일회용의 의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힌두사상의 핵심인 “생성과 유지와 소멸”의 과정을 충실히 실현하는 행위였는데, 후에 만다라가 수행용과 예배용의 대상이 되면서 회화로 표현되기 시작하여 벽화나 걸개용 탕카로 만들어져 사원의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변했고 흔치는 않지만 동(銅)으로 주조된 입체적 만다라도 가끔 오래된 사원에서 목격되기도 합니다.
<만다라>가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하여는 정설이 없지만, 대개 4세기부터 힌두교에서 <얀트라(Yantra)>로 시작되어 6-7세기에 자인교와 불교에 차용되면서 좀 더 복잡한 구도로 변해갔는데, 11세기 이후에는 딴뜨라의 전유물이 되면서 크게 만개하였다가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대륙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인도불교가 그 수명을 다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타올랐던 최후의 찬란했던 불꽃 놀이었다고나 할까요?
흔히 우리나라에서도 <만다라> 이야기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태장계만다라> 와 <금강계만다라> 가 튀어나오게 마련이지만, 제 개인적 사견으로는 이는 일본식의 분류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원에서 중국식 밀교가 만개를 할 때인 8세기, 일본의 유학승 공해(空海)화상이 장안에서 위의 두 종류의 <만다라>를 가지고 돌아와 지금까지 그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이후로 일본은 이 두 종류의 만다라를 중심으로 밀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티베트나 중국의 경우처럼 밀교의 시대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절름발이 분류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4. 티베트불교의 중국화
티베트불교에서 3번째로 등장한 싸갸빠 종파의 꾼가갤첸(1181-1251)과 조카인 최갤팍빠(八思巴1235-1280)는 함께 신흥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이 중원에다 세운 원(元)나라 황실에 들어가 당시 무속신앙만을 믿던 그들에게 티베트불교를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삼촌에 이어 조카 팍빠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국사(國師)로 책봉되기에 이르렀고‘싸갸법왕(法王)’이란 칭호와 함께 13만호의 봉록을 받고 티베트의 통치권까지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팍빠국사는 문자가 없어 곤란을 겪던 원나라를 위해 티베트의 문자를 변형해 공문서에 사용할 문자(팍빠문)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후에 성종 테무르에 이르러서는 승려들에게 파격적인 조치를 내려 나라의 전폭적인 보호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원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티베트불교는 세계로 뻗는 전기를 맞게 되어 티베트불교는 당시 몽골제국이 점령한 광대한 아시아 대륙으로 전파되어 나가며 원이 존속했던 2백여 년 동안 아시아불교권의 맹주로써 동북아시아 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중원대륙에 전래된 당, 송시대의 전통적인 선교양종(禪敎兩宗)은 원나라의 정책적인 견재로 인해 헤게모니를 티베트불교에 내어주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상황은 몽골족이 중원에 세운 원나라를 밀어내고 다시 한족에 의해 건립된 명나라와 다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이르러서도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군대를 보내 설역의 각 종파들을 위협하거나 또는 세금을 강요하지 않았고 단지 명나라가 원나라의 제도를 계승함으로써 조정의 위상을 높이는 교묘한 정책을 썼습니다.
이런 상황은 다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들어와서도 별 변화가 없었는데, 오히려 청은 명보다 티베트에 적극적이었기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설역의 종파문제 뿐만 아니라 역대 달라이라마 선출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도 깊숙이 개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티베트불경을 인쇄하여 티베트 각 종파에 시주(施主)하기도 하였는데, 그 만큼 원, 청명대의 황제들도 역대 티베트의 법왕들의 지지를 얻는 시주자가 된다는 사실은 당시 황제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원, 명, 청대로 이어지는, 거국적인 <티베트대장경> 간행과 역대 법왕들과 각 종파의 고승들에게 내린 봉호와 조서의 정치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 “티베트불교가 중원대륙과 나아가 몽골, 한국, 일본 같은 주변문화권에 끼친 영향이 얼마만큼 이었나?” 하는 명제제기는 굳이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도 중국에서 황교(黃敎) 또는 장전불교(藏轉佛敎)란 이름으로 불리는 티베트불교의 중국화의 결과로 기존의 찬란했던 백가쟁명했던 선교양종의 중국불교는, 붉은 중국당국의 종교정책과 티베트불교의 견제로 인해 청교(靑敎) 또는 현교(顯敎)란 이름으로 묶여져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한국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에서 요즘 티베트불교 특히 싸갸빠 종파가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해동불교사에 끼친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잘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몽골족이 중원에다 세운 원(元)나라는 전 아시아뿐만 아니라 고려까지 한 세기 정도 지배하였습니다. 당시 원 황실은 티베트불교에 심취하여 국교로 인정하여 적극 장려할 때였으니 만큼 “원나라를 경유하여 티베트 불교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은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재 우리불교에 혼재되어 있는 티베트불교적인 요소가 적지 않음에도 불고하고 그 동안 우리는 그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일부러 외면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불교사 연구가 그간 선종(禪宗) 일변도에 치우쳐 있었기에 아직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여 그 영향력을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나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현재 파악되고 있는 티베트와 몽골 그리고 한국불교의 연결고리만 화두로써 제시하는 것으로 하고, 좀 더 본격적인 연구는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두 나라 간의 문명교류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강조할 일은 우리나라와 티베트의 인연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기 이미 인도까지 갔었던, 구법순례승 중에도 티베트와 연결고리를 가질 기회를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혜초(慧超)의「왕오천축국전」에서는 비록 토번(吐蕃)에 관한 기록이 많이 눈에 띠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티베트와 부딪혔다는 사실은 좀 모호합니다만, 그러나 같은 시기의 의정(義淨)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의하면 혜초보다 반세기 먼저 천축행을 감행한 17명의 해동의 구법승 중에서 신라의 혜륜(慧輪)․혜업(慧業)․현각(玄恪)․현태(玄太)가 티베트고원을 횡단하는 직행로를 통해 천축을 들락거렸고 그중 오진(悟眞)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입니다. 그러나 쉽게도 이들은 혜초처럼 여행기를 남기지 않았기에 구체적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중국, 티베트의 기록에 의해 그 대략적인 면모는 찾을 수는 있습니다.
특히 몇몇 구법승들의 경우 그들의 행로가 기존의 실크로드 루트가 아니고 티베트고원을 통과하는 ‘직행로’를 이용하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당시 토번에는 7세기 초 송쩬감뽀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하여 통일왕조를 이룩하며 국력을 아시아 전역에 과시하던 때였기에, 당 태종(太宗)을 비롯한 주위 여러 강대국한테 정략결혼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토번으로 시집온 당나라 문성공주의 주선으로 현조, 혜륜 일행은 티베트를 횡단하여 천축을 들락거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근래 중국 선차(禪茶)의 비조로 부상하고 있는 무상선사(金無相, 684∼762)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당 현종(玄宗)의 칙명에 의해 사천성(四川省) 정중사(淨衆寺)에 머물고 있던 무상은 754년 장안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토번의 사신들을 만났는데, 1개월여를 함께 생활하면서 사신들은 무상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거리는 티베트 정세와 불교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때 선사는 인도불교가 설역에서 주류를 이룰 것이며, 훗날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기에 무상스님은 ‘김화상(Kims,金和尙)’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티베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려시대의 연결고리를 추적해보겠습니다. 고종 18년(1231년)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가면서까지 30여 년간 항쟁을 벌이지만, 결국 강화조약에 이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본토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원과 고려의 관계가 정착되면서, 충(忠)자 돌림자로 이어지는 국왕들이 이어지면서, 두 나라의 교류가 시작합니다.
1275년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가 원 세조 쿠비라이칸을 만나 송광사의 사전(寺田)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한 일이 있는데, 이때 티베트어로 쓰인 통행증명서인 <송광사티베트문법지(松廣寺文法旨:보물제1376호)>가 현재 송광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정황을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나라의 문물교류가 물꼬를 트면서 티베트의 문물, 특히 불교문화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합니다.「고려사」의 기록을 찾아보면, 1294년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오고, 1314년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8,000권을 고려에 전해준 일이 있습니다. 또한 1320년에는 원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귀양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1346년에는 티베트 인에 의해서 연복사(演福寺) 범종의 명문(銘文)이 새겨지기도 했고 유명한 밀교의 만트라인 육자명왕진언(六字明王眞言)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승려 자사태마(刺思泰麻)와 사팔자(思八刺)에 의해서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선왕의 경우는 티베트와의 연결고리가 선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 황제는 충선왕에게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으로 보내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했다.” 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원이 명나라에게 쫓겨 다시 몽골초원으로 돌아가고 억불숭유를 정책으로 삼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기록상으로는 두 문화권은 별로 공식적인 접촉기록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연암(燕巖) 박지원의『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연암이 티베트의 고승을 만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성승(聖僧)이란 서번(西蕃)의 승왕이다. 반선불(班禪佛:빤첸라마) 이라 부르기도 하고, 장리불(藏里佛))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를 존숭하고 따르기 때문에 활불(活佛)이라 일컫는다. (운운) 지금 나이는 마흔셋이라고 한다. 황제가 지난 5월 20일 열하(熱河)로 맞아들여, 별도로 그를 위한 궁궐을 짓고 스승으로 섬기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외에도 우리문화 속에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티베트적인 요소가 불교뿐만 아니라 도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를 간략히 들어보면 다면체적인 밀교적 불보살상과 무서운 형상의 수호존상들 그리고 요즘 열풍이 일고 있는 <만다라>와 또한 불교의식 때 흔히 사용하는“옴마니반메훔” 같은 밀교적 진언(眞言),금강령(金剛杵), 금강령(金剛鈴) 그리고 걸개용 탕카식 탱화(幀畵), 범종, 산개(傘蓋), 마니륜통(摩尼輪筒)식 윤장대(輪藏臺), 초르텐식의 불탑, 금고(金鼓) 등등 도처에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문화이외에도 먹을거리로서는 미수가루, 육포, 순대 등과 입을 거리로는 처용무, 승무, 탈춤 등에 사용되는 가면들과 의상들 그리고 색동문양 등과 민간설화로는‘나무꾼과 선녀’같은 알타이설화들에 티베트적인 요소가, 마치 본래 우리 것인 양,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1967년에 제 14대 달라이라마 성하가 라싸판 『티베트대장경』한 질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일이 있고 역시 달라이라마의 성금으로 올해 동국대에 티베트장경연구소가 개원한바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티베트마니아가 형성되면서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냐?” 하는 ‘뜨거운 감자’ 같은 화두에도 불고하고, 한국 속의 티베트는 앞으로는 보다 자주 우리 입에 오르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6. 티베트학(Tibetanlogy)의 미래
현대에 들어와서 ‘티베트학’은 전 지구촌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티베트불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티베트문화의 구성요소는 불교이외에도 주목을 받는 분야가 많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티베트는 나라와 주권을 잃었지만 대신 티베트불교와 문화는 세계적으로 만개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 티베트학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것에 비해 요즘은 그 무게중심이 미국으로 건너온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여간 미국을 중심으로 한 티베트학의 발전은 괄목할만한데, 이런 추세에 힘입어서 티베트불교의 요체인 딴뜨리즘도 요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그 긴 천년의 기다림 끝에, ‘시간의 수례바퀴’ 즉 깔라짜끄라-時輪學을 필두로 딴뜨리즘은 지구촌 중앙무대인 미국으로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는 지구촌의 대부분의 영어권으로의 전파도 의미합니다. 알려진 바로는 티베트 망명객 체감트롱빠가 세운 나로빠대학(Naropa. Un)을 중심으로 티베트경전의 영어화의 데이터베이스가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시륜철학의 최초의 완성자인 나로빠가 예언한 대로, 현대의 '인드라망(Indra 網)'이라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전 지구촌을 누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딴뜨리즘의 제2의 번성기가 이미 도래한 것이니, 이는 고대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서구적 심리학 관점에 의하면, 프로이드에서 칼융과 에반츠 웬츠로 이어지는 티베트학파의 주류는 최근에는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트랜스퍼스널(Transpersonal psychology)이라는 대체적인 이론과 현대 서양의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는 캔 윌버(Ken Wilber)라는 기린아를 만나 동서양의 철학을 융합하는 통합사상의 새로운 모양새를 보이며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트랜스퍼스널은 서구 심리학이란 ‘하드웨어’에다 동양적이고 영적인 체험이나 초월의식 체계라는‘소프트웨어’를 통합하는 새로운 경향의 이채로운 학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기존의 실증적인 학문을 넘어서 금기시되어 왔던 혼(魂)과 영(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하여간 이 분야가 기존의 철학과 과학과 종교를 뭉뚱그려서 담아내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신선하기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티베트란 나라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머지않아 다가올 제14대 달라이라마 성하의 입적 후에 그 뒤 15대의 옹립으로 이어지는 5-6년간의 공백상태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티베트불교계 내의 헤게모니 쟁탈과 그간의 벌어질 티베트 국민들의 분열과 또한 그것을 부추길 것이 확실한 중국의 검은 속셈 같은 복잡한 요인으로 국가로써의 티베트의 미래는 밝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더라도 티베트의 불교와 문화는 이미 서구와 미국이란 무대를 중심으로 한 지구촌 전역을 무대로 가속도가 붙었기 때문에 ‘시간의 수례바퀴’ 처럼 구르는 것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은 가능합니다. 오히려 상생의 시대의 패러다임으로서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견되기에 마치 초월의식이 개화되는 짜끄라에서 1,080송이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생명 에너지로 승화되어서 피어날 것입니다.
7. 맺는말
이상으로 살펴 본대로, 스스로 ‘뵈’라고 나라 이름으로 대설산 뒤에 숨어있던 ‘눈의 고향-강쩬’이라 불리는 티베트는 해발 4천m가 넘는 지리적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독특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가꾸어 왔고 나아가 원나라를 경유하여 서로 수천수만리 떨어진 중원대륙과 나아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대륙 전체에 밝은 빛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티베트와 중원대륙 그리고 해동의 불교는 정보전달에 어두웠던 과거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종교는 문화를 실어 나르던 배다.”라는 사실은 재삼 일깨우게 하고 있습니다. (운운)
小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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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목요연한 정리에 감사드립니다.
엣날 것인데....'두제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