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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
서론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세워 가시는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나가신다(HC 50).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세워나가시는가?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직분자를 세우심으로 교회를 세우신다(마 28:19-20; WCF 30:1). 하늘에 계셔서 이 땅의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에 당신의 직분자를 세우심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신다(엡 4:7-13). 그렇기에 교회건설이란 다름 아닌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명칭 “장로교회”는 침례교회나 성결교회 등과 달리 장로(목사와 장로)라는 ‘직분’을 명칭으로 삼았다. 이것은 장로교회가 직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로교회인 고신교회가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의 한 방법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분은 교회를 세우는 기둥과 같다(참조. 갈 2:9). 직분자가 잘 세워져야 교회가 바로 서고, 직분자를 잘못 세우면 교회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다.
그렇다면, 직분자(목사, 장로, 집사)는 어떻게 세울까? 직분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세우면 될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조건 직분자가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교인들 전체가 적당히 돌아가면서 하면 안 될까? 직분자를 세움에 있어서 마땅한 절차와 질서가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직분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려고 한다. 직분자를 세우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절차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하면,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은 ‘은사-부르심(소명)-교육-고시(시취)-임직-직분수행’의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각 단계별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 연재되는 기획기사를 통해 다뤄질 것이다.
본론:
은사
직분자가 될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은사가 있어야 한다. 은사는 최소한의 자격이다. 목사라는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목사로서 갖추어야 할 은사가 필요하다. 장로라는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장로로서 갖추어야 할 은사가 필요하다. 집사라는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는 집사로서 갖추어야 할 은사가 필요하다.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을 “맡기면 잘 할 거야”라는 식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될 사람은 설교자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로서 필요한 은사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딤전 4:13), 전하는 자다(딤후 4:2).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가르치고 전할 수 있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딤전 4:16). 이러한 은사가 있는 사람만이 설교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잘 못 읽는다든지, 독해력이 부족하다든지, 공부와 연구에 관심이 없다든지, 말을 거의 할 줄 모른다든지, 성경과 그 밖의 지식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든지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자격미달이다.
장로가 될 사람은 교회를 치리할 사람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구성원들을 다스릴 만한 리더십과 모범이 있어야 한다. 본인의 신앙도 잘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장로의 은사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자다. 그러므로 권위가 있어야 한다. 교회의 다스림은 섬김의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권위는 있어야 하되, 권위의식은 없어야 한다.
목사와 장로가 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은사와 자격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3:2-7과 디도서 1:5-9에서 ‘감독’(감독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장로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빌 1:1; 행 20:17,28). 그리고 장로는 목사와 장로를 가리킨다(딤전 5:17).)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고 있고, 집사의 경우 디모데전서 3:8-10에서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간혹 보면 설교자인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 가운데 “찬양에 은사가 있어서” “(목회하기에) 성격이 좋아서” “전도를 잘해서” 심지어는 “스포츠를 잘 하기 때문에” 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해당되는 직분에 적합한 은사가 있어야 직분자가 될 최소한의 자격이 있다.
나중에 다루겠으나, 이때의 은사는 이후 ‘교육’을 통해 더욱 보충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목사후보생은 목사와 동등한 은사가 필요하지 않다. 앞으로 교육을 통해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잠재적’인 것을 말하며, 앞으로 교육을 통해 개발될 것을 염두에 둔 정도를 말한다. 조금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르심(소명)
은사가 있다고 해서 다 직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은 많다. 그렇다고 모든 은사 가진 사람이 직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calling)이 있어야 한다. 직분을 가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은사를 가진 사람이지만, 은사를 가진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직분자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직분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얕게 볼 수 없다.) 은사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을 뿐인 사람이 많다. 은사를 가진 사람이 직분으로의 부름이 없었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부르시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서 11:29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은사가 있는 사람 중에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직분자는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이 분명히 확인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은 먼저 그 사람의 내적인 마음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 내적 소명(internal calling)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고자 하신다는 강한 내적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를 섬기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은사와 더불어 내적 소명이 있는 사람이 직분자가 될 기본적인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내적 소명은 주관적이다. 자신이 잘못 이해했을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착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직통 계시로 그 뜻을 알려주시는 시대가 아니므로 잘못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불렀다”라고 이사야(사 6:8)나 예레미야(렘 1:5)를 부르시듯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는 시대가 아니므로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내적 소명만으로는 안 된다. 외적 소명이 있어야 한다. 거듭난 신자라면 누구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기 마련인데, 너도 나도 직분자가 되고 싶다는 소명이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전 교인의 직분자화가 될지도 모른다.이러한 주관적인 성격을 가진 내적 소명을 객관화하는 방식이 외적 소명(external calling)이다. 직분자가 되고자 하는 당사자가 확인하는 소명이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확인되는 소명이다.
그렇다면 외적 소명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구약시대에는 제비를 뽑아 확인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선거를 통해 확인한다.1) 성령님께서 성도 각 사람을 통해 직분자의 내적 소명이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것인지를 확인케 해 주신다. 외적 소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직분이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개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
은사가 있고, 내외적 부르심이 확인된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은사만으로는 직분을 수행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치리회 주관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통해 직분자에게 필요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
직분자를 세우는 주체인 당회의 주관에 따라 교육을 받는다. 장로와 집사로 세움 받을 자의 경우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성경, 교리, 교회정치 등을 배운다. 이를 통해 원래 가진 은사가 더욱 보충된다. 성경, 교리, 교회정치는 직분자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지식이다.
집사의 경우 교회의 서무와 재정을 맡을 것이기에 그와 관련해서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혹 직업이 은행원이나 회계사라 하더라도 재정에 있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직업이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서무에 있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회의 서무와 재정은 세상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방식은 비슷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원리는 전혀 다르다.
목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조금 차이가 있다. 신학교육이라는 특수한 교육을 받는다. 1년 정도의 교육을 받는 장로, 집사와 달리 최소 3년 이상의 교육을 받는다. 이는 목사직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목사직이 다른 직분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설교자로서의 직임은 은사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교육을 통해서 개발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장로교회는 ‘교육받은 목사’(an educated ministry)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설교자로서 목사의 일은 성경의 진리를 권위를 가지고 여러 계층의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인데, 이 일에는 균형 있는 판단력과 그 업무를 위해서 훈련과 실천으로 단련된 정신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2) 특별히 청교도들이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신학교를 설립하여 언어와 인문학과 신학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교육받지 않은 무지한 목사를 급조(急造)하여 목사로 세우는 것은 종교개혁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했다.3) 그래서 성경, 성경언어, 신앙고백, 조직신학, 교회사, 인문학(논리학과 철학)을 중요하게 가르쳐왔다.
위와 같은 이유에 따라 장로교회는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교회의 중요한 역할로 여겼다.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설교를 위해서 교회는 말씀을 증거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양성해야 했으니, 그 이유는 말씀을 순수하게 잘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나 설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할 수 있음을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총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일이다(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헌법(2011년판) 교회정치 제12장 제145조 제7항). 각 노회와 당회가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더 넓은 치리회인 총회가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고시(시취)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교육 받은 것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을 치른다. 목사고시, 강도사고시, 장로고시, 집사고시 등이 있다. 목사와 장로의 고시는 노회가 주관한다. 집사의 고시는 당회가 주관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상 고시에 한 두 차례 탈락하는 경우는 있어도 거의 다 붙여준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해서 될 성질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관행이나 인간적인 연민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임직
고시에 합격했다고 해서 직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최종 절차가 하나 남았다. 임직(任職, induction)이다. 임직이란 교회적인 의식으로 그 교회를 섬길 자들을 세워(將立) 그 직무를 위해 따로 구별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일이다. 간혹 ‘안수식’이라 부르는 분들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임직식’이다. 안수는 임직의 한 부분이다. 임직식에는 서약, 안수, 악수례, 권면, 선포 등의 요소가 있으므로 임직식이 더 바람직한 표현이다.
임직을 통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직분을 위임받게 된다. 이제 직분을 맡았다. 임직의 한자어 맡길 임(任)은 좋은 번역어다. 직분자는 자신이 직분을 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교회가 맡긴 것이다.
치리회의 결의
위에 언급된 절차 중 외적소명확인, 교육, 고시, 임직의 경우 치리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치리회가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한 뒤에 선거를 하고, 치리회가 선거결과를 공포해야 하고, 치리회가 교육과 고시를 주관하며, 치리회가 임직을 결의하고 임직식을 거행한다. 이 모든 절차에 치리회가 주체가 되는 이유는 직분은 교회를 위한 것이며, 교회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직분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직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직분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다.
하나도 빠지면 안 됨
‘은사-부르심-교육-고시-임직, 그리고 치리회의 결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직분자가 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가 빠졌다면 무효다. 은사, 부르심, 교육, 고시, 임직이 잘 연결되어 있어야만 정상적인 직분이라고 할 수 있다(cf. 롬 11:29).4) 은사가 없어도 안 되고,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의 부르심이 없어도 안 되고 교육이 없어도 안 되고 임직이 없어도 안 된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가 있어도, 은사를 확인하는 부르심, 그 부르심에 근거한 교육, 이 모든 것을 마친 뒤의 교회적 확인이 없다면, 직분자로 세워질 수 없다. (참고로 피택장로, 피택집사 등의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다. 직분으로의 택함 받음은 선거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임직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모든 직분자는 피택자다.)
결론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은 원칙상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점점 간단해 지려고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타락한다. 교회가 세속화된다. 교회의 기둥이 약해진다. 직분자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리고 왜 이런 엄격한 절차들이 있는지, 각 절차는 왜 이루어지는지 그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렇게 알고 세워진 직분자를 통해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게 될 것이다.
1)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글을 참고하라. 손재익, “왜 선거를 하는가?,” 『코람데오 닷컴』(2010. 11. 18)
2) John MacPherson, Presbyterianism (Edinburgh: T&T Clark, 1949), 이종전 옮김, 『장로교회의 정치원리』(인천: 아벨서원, 1998), 103; 박윤선, 『헌법주석』(서울: 영음사, 1983), 35, 37; 유해무, “신학과 신학교육Ⅰ,” 『개혁신학과 교회』, 제16호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2004), 181, 187, 201.
3) MacPherson,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131.
4) Edmund Clowney, The Church (Leicester: IVP, 1995), 황영철 역, 『교회』(서울: IVP, 1998), 235;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6-1982),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Ⅱ』(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366; MacPherson, 『장로교회의 정치원리』, 41.
▲손재익 목사/한길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