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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성령한국 '김종익' 논문 발췌)
1. 당시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
2. 대부흥 운동의 기원과 진행
3. 부흥운동의 계속적인 발전
4. 대부흥 운동의 결과와 영향
1. 당시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
국가적인 위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낙심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곳은 이제 교회 밖에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 교회는 자립, 자주적인,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한 민족 교회를 형성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성장의 모멘트가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이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수상 가츠라 다로(桂太郞)로 하여금 7월 27일 루즈벨트(Theodore Roosebelt를 말함)의 밀지를 받은 미육군성 장관 테프트(W. H. Taft)와 '가츠라-테프트 메모'라는 비밀협정을 조인케 한 후, 그 해 11월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압적으로 선포하였다. 서울에 조선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2월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하였으며, 1907년에는 정미조약을 강압적으로 맺어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하여 고종까지도 강제로 퇴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 중에서도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전조(前兆)들이 교회의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숫적인 성장도 그러하려니와 전도의 열의도 뜨거웠다. M. 헌트리(Martha Huntley)의 "개종을 하면 그 순간부터 즉시로 제자가 되어서 전도자로 나서며 자신으로부터 새 신자를 증식시키고 또 시키는 한국인들이야말로 교회 성장의 참된 비밀"이라는 지적처럼 한국 교회의 성장은 전적으로 한국인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가 사용한 십자가의 깃발 이후 단순히 교회에 내건 깃발이 복음 전파의 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고, 시계가 없던 당시에 교회의 종소리는 교회의 예배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의 강렬한 선비 기질과 대부흥 운동을 통한 성령 체험은 결과적으로 보더라도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분명하신 은혜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선비의 나라로 학자와 학자를 희망하는 사람들만이 득세할 수 있는 나라였다. 유학(儒學)의 고전들이 한국의 중추를 구성하였던 것처럼 성경은 또 하나의 새로운 책으로 한국을 뒤흔들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은 선비적인 자세와 기질로 성경을 읽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성도들이거나 이기적인 동기, 혹은 애국적인 동기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2. 대부흥 운동의 기원과 진행
한국 교회를 교회되게 한 이 부흥운동을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의 두 가지로 본다.
그 기원을 멀리 1903년 함경남도 원산지방에서 있었던 선교사들의 기도회까지 올라가게 된다.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스웨덴 목사 프란슨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를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인들도 동참하게 된 연합기도회로 확대되어, 그곳 창천(倉前)교회에서 매일 밤 집회가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다. 이 부흥 운동의 불씨가 된 것은 이 기도회에 참석한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R. A. Hardie)목사의 통회 자복 기도이다. 수년간 강원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한 데 대한 자기 무력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의 기도였다. 그곳에 모인 모든 선교사들이 이러한 하디의 성령 체험을 목도하게 되자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서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인 1904년 원산의 사경회는 계속되어 장로교 선교사인 로브(A.F. Robb)는 특별한 은혜를 받아 한국인 전계은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하였고, 감리교의 정춘수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원산 지방 부흥의 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은 1906년 여름 하디를 강사로 장·감 연합으로 일 주일 동안 기도회로 모임으로서 성령 체험을 갖고자 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열린 북장로교 연차 총회에서 방한 중이던 뉴욕의 존슨목사는 인도와 웨일즈의 부흥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특기할 일은 그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한국교인을 상대로 집회 하던 중 한국 부흥을 위한 헌신자 결단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길선주장로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동기는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평안남도 남자 도 사경회에서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정월 6일부터 시작된 사경회는 주로 성경공부를 하였으나 저녁에는 전도 집회로 모였다. 이 사경회가 이렇게 뜨겁게 불붙게 된 것은 장대현 교회가 이 사경회를 새벽기도회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새벽 기도회는 그 전 해(1906년) 길선주 장로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결국 1907년의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선교사의 말씀 공부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기도가 어우러져 이룩된 성령의 역사였다.
결정적인 마지막 이틀 밤은 1월 14일과 15일 이었다. 대개 낮 성경 공부반은 대부분 시골에서 모여 든 900여명의 남자들이었으나 저녁 성경 반은 시내에서 몰려든 약 1,500여명이었다.9)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의 인도로 배위량(W. N. Blair) 선교사가 간단히 설교하고 난 다음 강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뜨거운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흐느낌 소리와 함께 평양에 오셨다"
"마치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눈사태처럼 우리 위에 무겁게 내렸다"
"우리 선교사들은 즉시 강단 위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의논하였다".
"우리는 각각 갈라져서 강단에서 내려와 가장 애통해 하고 번민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주고, 마룻바닥에 엎딘 사람을 일으켜 앉혀주면서, '걱정 마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부흥 운동을 사실상 이끌고 간 사람은 길선주였다. 길선주는 그 해 6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므로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직 장로였다.
3. 부흥 운동의 계속적인 발전
정월에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2월에 각급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여러 학교로 퍼졌다. 숭실 전문과 숭실·숭덕·광성 중학교와 숭의 중학교 학생 약 2,500명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어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부흥 운동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사경회에 참석하였으며, 3월에는 장로교회의 부인 사경회가 12일간 열렸고, 5월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개월 만에 개강하는 교육을 받기 위하여 학교에 모였을 때 교수(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특별 사경회를 열었다.
봄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 온 학생들에게 회개 운동이 지속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새 학기를 시작하여 첫 한두 주간은 부흥회로 휩싸였다. 베어드(Annie Laurie Baird) 부인의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일 오후 4시에 집회는 시작되었다. 이런 집회를 열기 위해서 힘쓸 필요가 없었다. 참으로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서 될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경회를 통한 대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져 나갔다. 서울에서 있었던 길선주의 경기도 사경회는 서울 지방의 교회에 대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이길함선교사는 선천으로, 헌트(W.B. Hunt)는 대구, 스왈론(W.L.Swallen)은 전남 광주로 가서 동일한 성령이 역사하는 힘 있는 집회를 계속하였으며, 특히 놀라운 일은 이 부흥의 열기가 중국에까지 퍼져 나가서 만주 지방에서 일하던 중국 교회 목사들이 평양에 와서 부흥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본국에 돌아가서 부흥을 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르러, 이 부흥의 열기는 봉천, 요양, 만주, 그리고 북경에까지 확대되었다. 김인수 교수의 지적처럼 중국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기만 했던 우리 민족이 복음과 부흥을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도움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더욱 힘차게 민족의 가슴 가슴을 적시며, 전국 방방곡곡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4. 대부흥 운동의 결과와 영향
대부흥 운동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교회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중에서 몇 가지를 김인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대부흥 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 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부흥 운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된 회개와 성신의 감동,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결단하는 삶, 즉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었다. 사당을 헐고, 축첩, 노비 소유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함으로 첩과 소실을 정리하고 노비를 해방시키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교회의 급격한 성장이다.
*다음은 언더우드에 의해 제시된 대부흥 기간 중의 성장 통계 자료이다.
연 도 |
장로교 세례자 |
장로교 원입자 |
장로교 교인수 |
감리교 교인수 |
1906 |
12.506명 |
44.587명 |
54.987명 |
18.107명 |
1907 |
15.097명 |
59.787명 |
73.844명 |
39.613명 |
증가율 |
29% |
34% |
34% |
118% |
무엇보다 부흥운동은 기독교 학교의 증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06년 6월에 208개의 학교가 이듬해 같은 달에 344개로 160개나 늘었으며, 학생 수도 3,456명이 7,504명으로 늘어났다. 이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3·1 독립운동이 촉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셋째,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더 이상 서양 종교가 아니었다.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 기도회'는 한국의 독특한 기도 형태로 정착되었으며, 이 기도회를 통하여 한국의 목회자들과 일반교인들은 영적인 힘을 얻게 되었으며,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기도하는 통성 기도였다. 동시에 이 기간 중에 시작된 철야기도 역시 새로운 형태의 기도였다. 멀리서 온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철야하면서 기도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에큐메니칼 정신의 구현이었다.
특히 선생의 입장에 서있던 선교사들과 배우는 위치에 있던 한국 교회 지도자들 간의 관계가 대부흥 운동 이후 동등한 형제의 관계로 변화되었다. 이 해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일곱 명이 졸업하여 당당한 한국인 목사로 안수 받게 되었고,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부흥 운동은 교파를 초월하여 장·감이 연합으로 모이고, 강단을 교류하고, 사경회 역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띄면서 교파간의 갈등과 간격이 해소되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과는 달리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즉 부흥 운동이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非政治化)하고 몰역사화(沒歷史化)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부흥 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항일 정신이 희박해졌고, 교인들도 내적인 신앙에만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곡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성령 운동이 인간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정교 분리 정책'은 구미 여러 나라의 역사 속에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천도교의 역사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민족이 고난에 처하였을 때나 3·1운동과 같은 민족적인 거사에 기독교인들이 먼저 나섰던 것을 볼 때에 기독교인들이 무력항쟁에 앞장서지 않는다고 해서 속단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평가이다. 혹 민족 지도자급 신자들 중 교회를 떠난 일에 대하여 논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부흥 운동을 잘못 이해한 단견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1907년의 부흥 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로 역사하신 성령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한국 교회가 비로소 민족 교회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