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전주 안디옥교회(기장) 홈페이지>
한국교회사 1 - 선교와 성장
1. 왜 교회사를 공부하는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찾기도 하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하는 데에 흥미를 느끼기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과연 우리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가 교훈을 얻게 되는 원천은 근본적으로 역사가 아닌 성경이 아닌가? 지나간 일들을 재구성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지 학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일 뿐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현실에 적용됨으로써 그 능력을 발휘한다. 성경을 해석하려 할 때, 성경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 사이에 있는 간격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아무리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적절한 성경해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 즉 교회사를 공부한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다. 특히,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왜 이렇게 나타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사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주위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역사적 시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시작 -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한국에는 카톨릭이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왔지만, 우리의 관심과는 좀 거리가 있으므로 개신교 선교를 출발점으로 삼기로 한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선교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시각이 있는데, 주로 1866년에 General Sherman 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다가 순교한 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를 든다.1) 그는 제대로 선교사역을 해 보지도 못하고 순교하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이 불러 일으켜졌다.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선교사가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에서는 John Ross와 John McIntyre가 신약을 한글로 번역하여2)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등을 통해 조선 내로 성경을 유포하고 있었다. 백홍준이 성경을 노끈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보더라도(1883), 성경을 배포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누가복음을 번역하기도 하였다.3)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한 선교사는 Horace N. Allen이다(1884. 9. 20. 美북장로교). 그가 입국한 해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칼에 부상을 당한 것을 고쳐주고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다음해 광혜원(제중원)을 세워 의료선교를 시작한다. 이후 Horace G. Underwood(1885. 4. 5. 美북장로교), Henry G. Appenzeller(1885. 4. 5. 美감리교) 등이 입국한다. 이후 호주의 J. H. Davies와 Mary Davies 남매가 입국(1889. 10.)하여 J. H. Davies가 6개월만에 병사하자 호주에서도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불러 일으켜졌으며, 1891년에는 언더우드와 윤치호가 Nashvill에서 열린 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ISFM)의 강사로 참여하여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여 美남장로교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고(1892) 미남감리교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1896).4) 1888년에는 캐나다인 J. S. Gale이 입국하였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외에도 1907년 동양선교회(일본)에서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 정빈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고, 1908년 구세군 선교사가 입국하기도 하였다.5)
이렇듯 1884년에서 한일합방(1910) 이전까지 약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미감리교, 미남감리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등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각자의 선교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또한 이들 선교사들은 신앙 뿐아니라 학문 역시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빠른 성장을 보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에서 D. L. Moody를 중심으로 일어난 각성운동과 그에 의해 일어난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이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 이렇게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 한국 교회가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게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3. 선교방법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는 단순히 복음만 전파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김영재는 의료활동, 교육활동, 문서운동과 한글보금, 청년운동 등을 들고 있으며,6) 이만열은 이외에도 교회가 사회의 구습개혁(술?담배?아편 금지, 미신타파, 관혼상제 개혁, 여권신장), 사회개혁(인권주장, 부정부패 항거), 민족운동 등을 실천했음을 지적한다.7)
특히 초창기 한국의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이는 William Carry의 선교방법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또한 선교사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입국하기도 전에 한문성경이나 Ross, McIntyre의 번역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상당수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교사들만의 열심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했다. "1897-1899 사이의 신문에는 종종 번역 재촉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평양에 사는 교우 한 분이 편지하였기로 좌에 기재하노라... 한문 성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일은 어찌나 되었는지 답답하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양식은 성경이온대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남녀간에 국문으로 번역한 성경 나려 보내시기를 배고픈 자의 밥과 목마른 자의 물과 같이 기다리오니' '... 오는 길에 성경 파는 집에 들어간즉 언문으로 번역한 성경책들이 많은데, 한 달에 책 매매되는 것을 평균하여 본즉 20여 원이 된다 하며, 그 주인의 말이 신약전서를 왼통 번역한 것을 서울서 나려오기를 가무는 때에 비 기다리는 것같이 기다린다 하더라'"8)
또 한가지 한국 선교의 특징은 선교지를 분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교사들끼리 영역다툼을 하지 않고 각자의 맡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이는 각 선교회들이 연합하여 뜻을 모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당시 선교사들이 그만큼 연합될 수 있었기에 한국 교회는 아직도 성경, 찬송이 통일되어 있는 양상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선교지 분할은 그 당시에는 매우 효율적이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한국교회가 강력한 지방색을 갖게 된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선교, 특히 장로교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립, 자전, 자치"라는 말로 대표된다. 즉 선교사가 교회를 세워서 이끌기 보다는 현지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접 세우게 하고, 선교사가 전도해서 교회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로 하여금 전도할 수 있도록 훈련하여 직접 전도하게 하고, 또 교회를 선교사가 대표로서 이끌지 않고 현지인들 중에 지도자를 세워 자치를 할 수 있게 하는 선교법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무조건 맡긴다고 해서 그들이 그 일을 해 낼 수는 없다. 자립, 자전, 자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기존 현지인 신자들에 대한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는데, 이는 성경공부 운동으로 나타났다. 선교사들은 기존의 소수의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성경을 배운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임받았다.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되지만,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을 가르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사경회인데, 선교사들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맹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교과서로 삼아 읽도록 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여자 사경회를 했는데 평양에서 뿐만 아니라 150리 내지 300리 이상이나 떨어진 삭주, 창성, 의주 지방에서도 참석하였는데 이 자매들이 몇 주일 동안 먹을 쌀과 옷도 짊어지고 왔다고 한다. 평양에서 1902년 '사나히 사경회'를 했는데, 약 400명 가량이 모였으며, 물론 의주, 삭주, 창성 지방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황해도 각처와 서울에서도 왔고,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도 올라왔다"9)는 사실은 이 시대에 얼마나 성경공부가 번성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4. 대부흥
1903년에 원산에 모인 선교사들이 강한 부흥의 체험을 한 이후, 1907년 1월 6일부터 열흘간 열린 평양 장대현 교회 사경회에서 대부흥이 일어나게 된다. 첫날 저녁부터 남자만 1500여명이 모인 부흥의 물결은 평양의 학교와 시내에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부흥의 물결은 1907년 이전에도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없지 않으나,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신에 거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정화되었으며, 열심히 전도할 힘을 얻게 되었다."10) 교회는 이에 힘입어 더욱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완전한 자립을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다.
5. 교회의 자립
한국 장로교는 1901년 평양신학교가 설립된 이후,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최초의 장로교 노회(독노회)가 설립되었다. 1912년 9월 1일에는 총회가 조직되어 장로교회의 치리회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1884년이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라고 볼 때, 28년만에 총회가 조직되었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놀라운 속도의 성장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제도적으로도 자립한 교회는 더욱 그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교회는 성장을 계속하였다. 특히 장로교회는 네비우스 선교법을 바탕으로 감리교회에 비하여 훨씬 효과적인 성장을 가져왔다.11) 특히 1900년부터 한일합방 이전까지 장로교회는 급속도로 발전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적인 성장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한국 교회는 선교가 이루어진지 30여년만에 거의 완전히 자립했을 뿐 아니라 놀라운 속도의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6. 결론
한국 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교회이다. 이는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훈련된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헌신된 사역을 펼친 것과, 이에 발맞추어 현지인들 역시 헌신된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의 원인으로 주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꼽고 있는 것을 보아도,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이 함께 헌신하여 교회를 세워 갔으며, 양적인 성장 뿐 아니라 훈련된 신자들이 늘어가는 내실있는 성장을 이루어 갔음도 알 수 있다. 특히 성경공부와 자립, 자치, 자전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모습 위에 부어진 부흥의 물결은 당시 한국 교회가 그토록 놀라운 성장을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교회는 제도적인 위상을 정립하여 자립한 교회로서 다시금 성장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 김영재는 Karl A. F. Gützlaff를 최초의 선교사로 꼽는다. Gützlaff, Thomas 등은 한국 내에서 공적으로 사역을 하지 않았기에 누가 먼저냐를 생각하는데에는 사실 어려움이 있다. 김영재, 한국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6), pp. 59-63 참조.
2) Ibid., p. 64 참조.
3) Ibid., pp. 65-66 참조.
4) 박용규, 한국장로교사상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4), pp. 51-52 참조.
5) 김영재, op.cit., pp. 67-71, 박용규, op.cit., pp. 49-53 참조.
6) 김영재, op.cit., pp. 71-83 참조.
7) 이만열, 한국기독교사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9), pp. 104-124 참조.
8) Ibid., pp. 100-101.
9) Ibid., pp. 81-82.
10) 김영재, op.cit., p. 118.
11) Ibid. p. 120 참조.
http://www.antiochia.org/family/icc/lecture/history/kc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