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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남북으로 뻗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경북(慶北)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개단리(皆丹里) 1번지 문수산(文殊山) 기슭 해발 800m 고지의 명당에 자리잡 은 축서사는 동에는 화산(花山)이 있고, 서에는 저 멀리 명산 소백산(小白山)이 병풍처럼 드리 워져 있으며, 남에는 청량산(淸凉山)이 우뚝하게 서있고, 안산으로는 학가산(鶴駕山)이 훤칠 하게 솟아있다. 해발 1,206m의 산자수명한 문수산은 한때는 수 많은 사찰과 전설이 풍성한 명산이었으나 지금 은 우람했던 가람은 볼 수 없고 여기저기 골짜기마다 불적만 남아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 이다.
축서사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 깃들 서(捿), 즉 독수리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 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란 이름을 붙인 듯하다. 한편 험준한 뒷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가 날려는 형국이므로 축서사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축서사는 신라(新羅) 제30대 문무왕(文武王) 13년(서기 673년)에 의상(義湘)조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문수산 쪽으로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고 한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보광전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고 해서 문수산이라 한 듯하다. 의상대사께서는 3년 뒤에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 제일도량(東國華嚴第一道倆)인 부석사(浮石寺)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출처:koreatemple.net-
부석사 순례를 마치고 18차 3번째 순례 고찰인 축서사에 도착하자 청정한 기운에 단원들의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절아래 펼쳐지는 정경에 고찰순례단원들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바다처럼 펼쳐지는 산능선과 멀리 운해는 여기가 극락인듯 하다.
보탑성전 /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층 사리탑과 주차장 사이의 계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있다.
사리탑 / 축서사 괘불탱화 복장낭에서 나온 적사리 2과와 미얀마로 부터 기증 받은 사리가 봉안 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수산 단풍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다.
선열당
심검당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좌상과 좌협시 문수보살 우협시 관세음보살 萬代輪王三界主 만대륜왕삼계주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三世如來一體同 삼세여래일체동 雙林示滅幾千秋 쌍림시멸기천추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만대의 륜왕 이요 삼계의 주인이신 석가모니부처님 부처님께서 시방세계에 두루 계시니 광대한 서원은 구름같이 다함없고 삼세의 여래가 모두가 한 몸일세 쌍림에서 열반하신 지 몇 해 이런가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끝이 없어라 대웅전
보광전 / 조선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문무왕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료망연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千江流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보신과 화신은 참몸이 아니라 인연인 것을 알고 법의 몸 깨끗하여 가없이 두루 비치느니 일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일천의 달이 나투고 일만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푸른 하늘 끝이 없도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石造毘盧遮那佛坐像 및 木造光背) 보물 제995호 /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 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
석양과 단풍이 어우러지니 짙어가는 가을이 느껴진다.
축서사괘불탱(鷲棲寺掛佛幀) 보물 제1379호 / 축서사에 있는 이 괘불탱은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고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하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괘불탱에 걸려 있던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1구)을 비롯하여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되었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과 조성내용을 밝혀주는 ‘괘불원문(掛佛願文)’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定一)스님 등 10명이 참여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서사 괘불탱화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인물과 문양의 세련된 표현 및 화려 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의 사용 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복장 주머니에서 사리를 비롯한 복장품과 함께 다른 불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괘불원문’ 이 발견되어 학술적으로도 자료 가치가 높다. -출처: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
축서사석등(鷲棲寺石燈) 문화재자료 제158호 (봉화군) / 축서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8각 석등으로,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조각이 달려 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윗받침돌의 밑면 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조각을 두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창을 두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는데, 짧은 가운데기둥에 비해 몸집이 커보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심하게 부서진 지붕돌은 특별한 조각을 두지 않았고,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는데 여덟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
범종각 願此鍾聲遍法界 (원차종성변법계)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유암실개명) 三途離苦破刀山 (삼도이고파도산) 一切衆生成正覺 (일체중생성정각)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산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밝아지며 삼도의 고통 일체 여의옵고 도산지옥 무너지며 일체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이로써 18차 고찰순례가 마무리되고 19차 관룡사, 해인사, 용연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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