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설교 모음2
추석이 다가옵니다. 이웃을 돌아보며 또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는 좋은 날입니다. 함께 모여 추모예배를 드리는 일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회자를 정하고 추모예배를 선포합니다. 정해진 찬송가로 찬송을 올리고 대표기자가 기도를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그에 따른 설교를 읽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치면 복잡하지 않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족 중 목회자가 있으면 축도로 마치면 더욱 좋습니다. 이번 ‘추석설교’는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가도 선정했습니다. 주보 간지에 프린트해서 넣으면 각 가정에서 사용하기에 좋은 추모예배 실제가 될 듯합니다.
제목: 단정한 삶 성경말씀: 롬 13: 11~14 찬송: 새찬송가 235장(222), 543장(342)
1. 신분에 합당한 삶
군인은 군복을 입을 때 가장 멋있습니다. 경찰이 경찰복을 입고 단속을 해야지 경찰복을 입지 않고 단속을 하면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단정하다는 것은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결국 군인은 군인답고, 목사는 목사답고, 법관은 법관다운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분에 합당한 삶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 신분에 맞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신분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당신의 신분은 어떠합니까? 당신의 신분이 결국 당신의 생활을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오늘 본문 13~14절은 탕아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바꾸어 놓은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자신의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단정한 삶으로 바뀌기를 소원하면서 말씀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영화에 이르는 때는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잘 때가 아닙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도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 육신의 일 그리고 단정치 못한 행동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답지 않은 삶입니다.
방탕은 밤중에 골목길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배회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술 취한다는 것은 술이 가져다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금지된 성적인 장난을 일삼으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호색한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하고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철면피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쟁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시기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며 탐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삶의 양식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 단정히 행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욕에 눈이 어두워 육신의 일에 도취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종말에 대한 위기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습니다. 삶의 올바른 목표물을 선택하여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3. 깨어 준비하십시오.
밤이 깊어가고 낮이 가까워오고 있는데 아직까지 잠에 도취되어 있는 자가 없습니까? 이 세상의 역사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여명이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세상에 도취되어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이제 깨어나야 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는 잃어버린 기회들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기회들을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겠습니까?
이 세상 것을 영원히 누릴 것처럼 세상에 눈을 고정시키고 사는 자들은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은 놓고 가야하는 것임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당신이 잡으려고 달려가는 목표물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것을 목표물로 삼고 있다면, 영원한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을 향해 새롭게 달려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기도
언젠가 천군 천사를 동원하시고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오실 영광스러운 주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다가 깰 수 있게 해주옵소서. 단정치 못한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단정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주옵소서. 헛된 것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말게 하시고, 영원한 것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pp.432~435, 2005.
제목: 쉼 성경말씀: 마 11:28~30 찬송: 새찬송가 484장(533), 487장(535)
1. 참 안식
분주한 삶에 지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영원히 눈을 감고 쉬고 싶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인간이 갖는 쉼에 대한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인간은 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쉬어야 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쉬어야 하는데도 쉬지 못할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쉼,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도는 ~님을 생각하며) 인간이 누리게 되는 참된 쉼, 안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찾아가야 할 곳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슬픔에 잠긴 자,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자, 소망을 상실한 가운데 실의에 빠져 있는 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볼 때 그러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로 인해 분주하게 사역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사람들은 그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을 찾아가기고 하고, 권력 앞에 무릎을 꿇기도 하고 우상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 “나에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정서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가진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만 합니까?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 된 영광과 권력의 자리를 포기하시는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폭풍우와 같은 자연을 말씀 한 마디로 다스릴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신 분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변에서 그분께 고침을 받고 안식을 얻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듣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쉼을 주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에게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그분께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3. 참 안식의 기쁨을 주시는 분
어거스틴은 거의 20년의 삶을 방황했습니다. 그는 만족됨이라는 것을 찾아 다녔습니다. 술과 여자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깊이 있는 학문과 철학의 세계로 침잠해 보기도 했고, 종교적인 만족을 누리가 위해 마니교 등을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원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400년에 기록한 참회록에서 “주께서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빚으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참된 쉼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그것을 채워 안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더라도 헛수고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식, 만족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안기는 것입니다. 오늘 고 000(직분)님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우리의 안식의 처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그분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안으시고 영원한 안식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4. 기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주님. 오늘도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지치고 상한 우리의 심령과 육신을 받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와 위로를 허락해 주옵소서. 이제는 세상에서 쉼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몸부림을 그치게 하시고, 주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믿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pp.440~443, 2005.
제목: 절망을 극복하자
찬송: 새찬송가 359장(401), 314장(511)
성경말씀: 열왕기하 4:1~7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와 현실세계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 역시 현실세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을 갖고 있으며, 하늘을 소망한다면서도 이 땅의 유혹이나 시험, 자랑거리에 만족할 때가 많음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는 공급원도 두 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늘에서 공급하는 힘이 있음을 믿기보다 이 땅에서 얻는 것에 더 많은 기대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이 땅에서 공급 받는 것이 부조하다고 낙심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 여인은 불쌍하기 짝이 없었고, 절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 형편을 알아보면 첫째로 이 여인의 남편이 신학생이었는데 죽었습니다. 남편을 의지하고 고향을 버리고 신학교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남편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게다가 남편은 죽으면서 빚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저 혼자 죽은 것도 서럽고 괴로운 일인데 빚을 남겨 주고 있으니 얼마나 절망스럽습니까? 셋째로 앞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합니다. 아마도 어린 아들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성경에 ‘two boys’라고 표현했습니다. 넷째로 채주가 나타나 빚을 갚지 않으면 사랑스런 두 아들들을 데려다 종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환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말적인 상황에서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선지자를 찾았습니다(1절). 그 동안 일례로 볼 때 선지자 엘리사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2:15). 이미 이 여인은 이 사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물을 달게 만든 일도 있습니다(2:19~25). 한 번은 거리에서 엘리사를 저주하던 아이들 42명이 사자에 붙잡혀 죽은 무서운 일도 있었습니다. 또 모압이 공격했을 때 지혜로운 방법으로 물리치기도 했습니다(3장).
그러므로 이 여인은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엘리사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정말의 상태에 있습니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거나 고통이 있어도 주님밖에는 우리의 의뢰자가 없습니다. 이 시간 추모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들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찾아야 하겠습니다.
절망의 상태에서 부르짖었습니다(1절). 이 여인은 절마의 상황이었으나 그것을 기도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무엇이든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절한 자신의 환경을 돌아볼 때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 솔직하게 자신의 형편을 모두 말했습니다. 빚을 진 것과 아이 둘을 종으로 팔리게 된 것, 자신이 가진 것은 빈 밀가루 통과 조금 남아 있는 기름통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행여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가족들은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5절). 엘리사는 먼저 여인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빈 그릇을 빌리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절망스런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남에게 찾아가 무언가를 빌려오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이용하십니다. 도리어 믿음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물으시고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우리 가족들은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 되길 바랍니다.
넉넉한 믿음을 가져야 절망을 이깁니다. 선지자는 조금 빌리지 말고 모든 이웃에게 가서 많이 그릇을 빌리라고 당부했습니다(3절). 그릇은 믿음의 분량입니다. 넉넉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넉넉하게 채워집니다. 절망의 시대를 사는 비결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넉넉한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본문에서 보여주신 여인의 절망을 극복케 하는 프로그램에서 사용하신 것은 엘리사, 극한 환경, 그리고 그릇이었습니다.
그릇은 다 똑같지 않습니다. 큰 그릇이 있고 작은 그릇이 있습니다. 여인은 많은 그릇을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기름을 담았습니다만 언제 그쳤습니까? 빌려온 그릇에 기름이 다 찼을 때입니다. 여기서 보듯 믿음의 양은 중요합니다. 우리 가족들 모두 넉넉한 믿음을 소유한 큰 믿음의 사람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기적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여인이 선지자를 찾아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7절).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라고 알려줍니다. 이런 기적으로 인해 여인은 절망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함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에 처했으나 승리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절망~의뢰~간구~믿음~축복의 순입니다. 오늘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혹시 어려운 때를 산다 해도 엘리사와 이 신학생부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 왔을 때, 절망 가운데서도 주님께 부르짖어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이기게 하옵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주님의 역사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종인 외, <최신 추모설교집>, 청우, pp.178~182, 2005.
제목: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나는 날까지 요한계시록 21장 1~4절
찬송: 새찬송가 491장(543), 246장(221)
우리는 고 000성도의 0주기 추모의 날을 맞이하여 고인을 추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원근 각처에서 이렇게 모여주신 가족들과 고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먼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고인이 우리 곁에 있었을 때, 그는 언제나 하나님 사람으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고인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얼마 동안 예수를 믿었느냐? 그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느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지금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땅”이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예비하신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사랑하는 고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의 믿음의 열심과 중심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어려움과 위기도 있었지만, 가족들을 위하여 참고 견뎌야만 했던 인내의 시간도 있었습니다만,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고인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고인께서 우리 곁에 떠나기 전, 비로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입원하신 것이지만, 그 작은 병실에서도 쇠약한 병상에서도 그는 그를 붙잡아주시는 하나님,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기도했고, 하나님을 열망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아픔이 찾아오고 죽음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에도 고인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그가 끝까지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를 붙잡아 주셨고 그는 그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도 역시 믿음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추모하며 함께한 이 자리에서 우리 모든 사람은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은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오래 살고 싶어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합니다. 가족 중에 어떤 이가 먼저 갈 수도 있고 나중에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가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새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실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인이 우리의 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도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한 시 동안도 우리의 신앙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를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인이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했듯이 가족들 역시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함으로 인해 가정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인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고인의 몫까지 서로를 위해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고인의 자리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소중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이 화목하고 즐거움으로 생활한다면 고인의 말없는 교훈은 더욱 우리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가문의 전통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붙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인이 떠나가신 후, 가족들의 마음에는 “이제 어떻게 살까?”하는 불안과 초조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인이 있었던 자리가 얼마나 크게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었는지를 점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인의 죽음 이후, 장례식과 여러 가지 일로 인한 경황없었던 순간들이 지나고, 차츰 모든 일이 정리되었을 때 찾아오는 허전함과 내일에 대한 불안, 초조감 등이 현실이 되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고 우리는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사연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여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흔들리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사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힘 있게 일어나 천국을 소망하며 다시 한 번 힘주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정과 성도 여러분을 통해 지금도 안타까움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전해질 수 있기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이 시간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이 고 000의 0주기 추모의 날을 맞이하여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인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가족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 모든 가족들도 고인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재호 외, 최신 추모설교집, 청우, 2005, pp.199~203
제목: 나그네와 고향 히 11:13~16 찬송: 새찬송가 249장(249), 486장(474)
성경은, 인생은 나그네요 외국인과 같다고 합니다. 나그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고 외국인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성도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씀함으로(빌 3:20) 성도들의 본향이 천국임을 확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성도들에게 또 다른 고향이 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4:1~3). 오늘 추모일을 맞이하여 나그네 인생 같은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리며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고향 갈 날을 생각하며 미리 준비하는 삶
성도는 본향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고향 길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오갈 수 있지만 인생의 영원한 고향은 오직 한 번으로 끝날 뿐 아니라, 다시 와서 준비하여 갈 수 있는 고향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적어도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믿음의 차표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늘 고향 길은 자가용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라는 대중교통입니다. 예수라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예수 믿습니다”라는 차표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12에는 예수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둘째, 천국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갈 때 입는 옷은 수의가 아니라 세상에서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영적인 옷을 입고 가야 합니다. 이 세마포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값없이 입혀 주십니다.
2. 고향은 온 가족이 함께 가야 좋은 곳
우리가 영원히 살 천국 고향에는 부모형체뿐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가 같이 모이는 고향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내는 왔는데 남편이 오지 않았거나 부모는 왔는데 자녀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다 같이 가는 고향길이 되어야 기쁘고 즐거운 고향길이 되는 것입니다.
3. 환영받는 고향 길
이왕 가는 고향이라면 반기고 환영하는 사람이 있어야 좋습니다. 올림픽 때 마라톤 선수가 1등으로 운동장에 들어서면 모든 관중이 일어나서 환영합니다. 천국 고향에서 환영받는 선수가 누구입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천국 고향 길을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향 갈 날과 입고 갈 옷을 준비함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가고 또 우리의 천국길이 환영받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생활을 잘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