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를 가는 날 아침에 일산에는 비가 많이 내려서 걱정을 많이했는데 안성쯤 내려가다보니 비가 점점 그치고 보은에 도착하니 보은은 비가 오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단다.
오리숲을 걸어들어가니 바로 일주문이 보이는구나...일주문에는 호서제일가람이라는 편액이 있단다.
우리 고인돌 친구들 일주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지.
법주사 안에 도착하여 수업을 하기전에 우선 법주사에 대한 포괄적인 수업을 먼저 했단다.
나무쌤 친구들 쌤 설명도 잘 듣고...환하게 웃으면서 사진도 찍고.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다고 한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법주사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 이젠 법주사를 돌아보며 수업을 해야겠지? 날이 더워서 우선 감로수를 먼저 마시고...
물이 맑고 시원하더구나^^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현태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다.
안에 모신 부처님들이 무척 컷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라고 한단다^^
희견보살상
신라 33대 성덕왕 19년 (720년)경에 조성된 입상으로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한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고 있는 희견보살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약 2m, 붉은 화강석 재료의 조각상이다. 보물 제1417호
팔상전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1624)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금동미륵대불
금강문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어마어마한 금빛으로 칠을 한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법주사의 금동미륵대불이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석연지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잇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
마애여래의상
보물 제 216호,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당간지주와 철당간
당간이란 달리 찰 또는 찰주라고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걸었다고 한다. 한편 당간이란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는 솟대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7년에 조성된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약 16m에 이르렀다고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3년 국가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바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당시에는 22m높이로 복원되었고, 1972년에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철확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보물 제1413호
법주사 앞에서 우리는 맛있는 버섯전골로 점심을 먹은후 물놀이를 했지...
와우~~~~~~~~~~~~~ 신나는 물놀이다^^
정이품송
정이품송은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정이품송은 다음과 같은 속설도 전해지고 있는데,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조선의 세조는 하늘이 노한 탓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집권 내내 종양과 피부병으로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전국의 이름난 약수와 온천을 찾아 헤매던 세조는 어느 날 약수로 유명한 법주사 복천암을 찾아 가고 있었다. 세조는 행렬이 한 소나무 아래를 지날 때 가마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유를 물으니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세조는 고개를 내밀고 “무엄하구나! 연(輦) 걸린다!” 하고 꾸짖으니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특히 여긴 세조는 소나무에게 친히 옥관자를 걸어주고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소나무를 ‘정이품송’ 혹은 ‘연걸이소나무’라고 부른다.
또한 정이품송 아래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와 노인이 이 나무를 안고 돌면 죽을 때 편히 세상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