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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1년 11월 18일(금)
장소 : 여주 일원(세종왕릉. 효종왕릉. 신륵사. 여주박물관. 명성왕후생가)
반월당(08:00 출발)-(214.8km. 2:20)-영릉英陵(세종왕릉 10:20도착. 관람 1시간. 11:20출발)-(1.6km. 0:10)-영릉寧陵(효종왕릉 11:30도착. 관람0:40. 12:10출발)-(6.4km. 0:15)-신륵사 주차장(12:25 도착. 점심 1시간)-신륵사(1:25 도착. 관람 1시간. 2:25 출발)-여주박물관(2:25도착. 관람 30분. 2:55 출발)-(6.9km.0:20)-명성황후생가(3:15도착.관람1시간.4:15출발)-(212.3.km. 2:20)-반월당역(6:35 도착)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제4대 세종대왕(第4代 世宗大王)과 동비 소헌왕후 심씨(同妃 昭憲王后 沈氏)의 릉(陵)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태종(太宗)의 제3자(第3子)로서 태조(太祖) 6년(1397년) 4월 10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漢城府 北部 俊秀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모후(母后)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이다. 태종(太宗) 8년(1408년)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封)해졌다가 태종(太宗) 12년(1412년) 5월 3일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이 해 8월 8일 태종(太宗)의 선위(禪位)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으며 춘추(春秋) 21세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역사(歷史) 문화(文化) 등 각 분야(分野)에 대한 통찰력(洞察力)과 판단력(判斷力), 학문적 노력(學問的 努力)을 겸전(兼全)하였고 천성(天性)이 관후 강건(寬厚 强健)하고 자질(資質)이 총민(聰敏), 독실(篤實)하였으며 태종대(太宗代)의 안정(安定)된 왕정(王政)을 기반(基盤)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등의 명사(名相) 이종무(李從茂) 김종서(金宗瑞) 등 무신(武臣),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등 현재(賢才)의 보필(輔弼)을 받아 조선문화 황금기(朝鮮文化 黃金期)를 이룩한 영주(英主)요 성군(聖君)이었다. 서운관(書雲館)을 설치(設置) 장영실(張英實)을 주도(主導)로 한 천문기계(天文器械)의 계발(啓發), 박연(朴堧)에 의한 음악체계(音樂體系)의 정비(整備),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반포(頒布), 《농사직설(農事直說)》,《고려사(高麗史)》,《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의방유취(醫方類聚)》등 각 방면(各 方面)의 서적 찬간(書籍 纂刊)이 있었고 육진(六鎭)의 개척(開拓), 대마도 정벌(對馬島 征伐) 등 내정(內政)과 외치(外治)에 헤아릴 수 없는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는 불후(不朽)의 업적(業績)이다. 세종(世宗) 32년(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제 동별궁(私第 東別宮)에서 환후(患候)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54세였고 재위(在位) 32년이었다. 문종(文宗) 즉위년(卽位年)(1450년) 5월 21일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으로 릉호(陵號)를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이 해 6월 12일 경기도 광주 대모산(京畿道 廣州 大母山) 아래 헌릉(獻陵) 서쪽 산줄기 소혜왕후 심씨(昭惠王后 沈氏)의 영릉 서실(英陵 西室)에 합장(合葬)하니 이는 유명(遺命)에 의한 것이다. 세종(世宗) 28년(1446년) 3월 24일 소혜왕후 심씨(昭惠王后 沈氏)가 승하(昇遐)함에 헌릉 서강(獻陵 西岡)에 장사(葬事)지내고 영릉(英陵)이라 하였으며 현궁(玄宮)은 같이 하고 석실(石室)은 달리하여 동실(東室)은 왕후(王后)의, 서실(西室)은 대왕(大王)의 수실(壽室)로 하였던 것이며 대왕(大王)의 승하(昇遐)로 합장(合葬)하였던 것이니 조선왕릉 중 최초(朝鮮王陵 中 最初)의 동봉이실(同封異室)의 합장릉(合葬陵)이다. 이후 영릉 불길론(英陵 不吉論)이 있어 천릉(遷陵)이 거론(擧論)되었으나 실현(實現)을 보지 못하다가 예종(睿宗) 즉위년(卽位年)(1468년) 12월 경기도 여주 서방 북성산(京畿道 驪州 西方 北城山)의 이계순(李季旬)의 묘소지(墓所地)로 천릉(遷陵)키로 정(定)하고 그 이듬해 3월 6일 지금의 여주 신릉(驪州 新陵)으로 천릉(遷陵)하였다. 구릉(舊陵)의 상석(床石), 명등석(明燈石), 망주석(望柱石), 문(文) 무인석(武人石), 마석(馬石), 신도비(神道碑) 등은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도에 이화대학교 박물관(梨花大學校 博物館)에 의해 발굴(發掘)되어 그 일부(一部)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東大門區 淸凉里洞 世宗大王記念館)에서 보존(保存)하고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두전(頭篆)을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라 하였고 비명(碑銘)과 음기(陰記)는 풍화(風化)와 마모(磨耗)가 심(甚)하여 수십여자(數十餘字)를 판독(判讀)할 수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비 소헌왕후 심씨(世宗大王妃 昭憲王后 沈氏)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으로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 심온(領議政府事 靑川府院君 沈溫)의 여(女)로서 태조(太祖) 4년(1395년) 9월 28일 양주 사제(楊州 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夫人 安氏)다. 태종(太宗) 8년(1408년) 2월 16일 충녕군(忠寧君)에 출가(出嫁)하고 그 익일(翌日)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封)하여졌으며 태종(太宗) 18년(1418년) 6월 17일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됨에 경빈(敬嬪)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세종(世宗) 즉위년(卽位年)(1418년)에 공비(恭妃)로 책봉(冊封)되었고 동(同) 14년(1432년)에 왕비(王妃)로 개봉(改封)되었다. 소생(所生)으론 문종(文宗) 등 8남2녀를 두었고 환고(患故)로 세종(世宗) 28년(1446년) 3월 24일 수양대군 제택(首陽大君 第宅)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52세였다. 시호(諡號)를 소헌(昭憲)이라 하고 이 해 7월 19일 경기도 광주 헌릉 서강(京畿道 廣州 獻陵 西岡)에 예장(禮葬)하고 릉호(陵號)를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세종(世宗) 32년(1450년) 2월 세종(世宗)이 승하(昇遐)함에 그해 6월 영릉(英陵)에 합장(合葬)하였다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1469년)에 현 여주 영릉 자좌오향(現 驪州 英陵 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 언덕으로 천릉(遷陵)하였다. 영릉(英陵)은 조선왕릉(朝鮮王陵) 최초(最初)의 합장릉(合葬陵)으로서 릉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현궁(玄宮)의 석실제도(石室制度)는 회격(灰隔)으로 바뀌었으니 개천 영릉(改遷 英陵)의 조영년대(造營年代)가 예종 원년(睿宗 元年)으로서 예종(睿宗)의 부왕 세조(父王 世祖)의 광릉 조영시(光陵 造營時)(1468년) 세조(世祖)의 유명(遺命)으로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석실(石室)을 회격(灰隔)으로 바꾼 뒤여서 이를 따랐던 것이다. 릉침 주위(陵寢 周圍)로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동자석주(童子石柱)엔 광릉(光陵)이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부조(浮彫)하였으나 영릉(英陵)에선 문자(文字)로 바뀌었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雙)이 교호배치(交互配置)되고 릉전(陵前)에는 상석(床石) 2좌(座)를 설치(設置)하였다. 상석 양측(床石 兩側)으로 망주석(望柱石) 1쌍(雙)이 설치(設置)되었으며 3면(面)의 곡장(曲墻)이 있다. 한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 마석(馬石) 각 1쌍(雙)이 상면 배치(相面 配置)되고 그 중앙(中央)에 명등석(明燈石) 1좌(座)로 중계(中階)인 제2계(階)가 이루어졌고 그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馬石) 각 1쌍(雙)이 문석(文石)의 례(例)와 같이 배열(配列)되어 제3계(階)인 하계(下階)를 이루었으며 릉상(陵上) 및 상설(象設)은 단릉(單陵)의 형식(形式)이다. 릉(陵)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엔 비각(碑閣)이 있다. 구 영릉(舊 英陵)의 신도비(神道碑)는 이곳 천릉시 영릉지(遷陵時 英陵址)에 묻었으며 신비(新碑)는 영조(英祖) 21년(1745년)에 세운 것으로서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 좌(朝鮮國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 左)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다. 비각 남측(碑閣 南側) 아래로 수직방(守直房)이 있으며 정자각 서측(丁字閣 西側)엔 수자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으며 홍살문 서남방(紅箭門 西南方)에 방형(方形)의 연지(蓮池)가 있고 더 남측(南側)으로 내려와 영릉 참배로 옹편(英陵 參拜路 東便)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1972년에 복원(復元)된 것이다. 1977년도 대통령(大統領)의 지시(指示)로 영릉정화사업(英陵淨化事業)이 있었으며 훈민문(訓民門), 세종대왕동상(世宗大王銅像), 세종전(世宗殿) 등은 이때에 세운 것이다.
효종대왕릉
녕릉(寧陵)은 제17대 효종대왕(第17代 孝宗大王)과 동비 인선왕후 장씨(同妃 仁宣王后 張氏)의 릉(陵)이다.효종대왕(孝宗大王)은 인조(仁祖)의 제2자(第2子)로서 광해군(光海君) 11년(1619년) 5월 22일 한성부 중부 경행방(漢城府 中部 慶幸坊)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 호(號)가 죽오(竹梧)이며 모후(母后)는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이다.인조(仁祖) 4년(1626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封)하여졌으며 병자호란 후(丙子胡亂 後)인 인조(仁祖) 15년(1637년) 왕세자(王世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淸)의 심양(瀋陽)에 인질(人質)로 있다가 인조(仁祖) 23년(1645년) 환국(還國)하였으며 이 해 4월 26일 형(兄)이며 왕세자(王世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병서(病逝)함에 9월 17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인조(仁祖) 27년(1649년) 5월 인조(仁祖)가 승하(昇遐)함에 이 해 5월 13일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효종(孝宗)은 대군시절(大君時節) 청(淸)의 심양(瀋陽)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있으면서 고초(苦楚)를 겪었고 부왕 인조(父王 仁祖)의 삼전도치욕(三田渡恥辱)을 설욕(雪辱)하고자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세우고 이를 추진(推進)하였으나 재정(財政)의 빈약(貧弱)과 청(淸)의 강성(强盛)으로 북벌(北伐)을 실행(實行)하지 못하였고 임진(壬辰) 정유왜란(丁酉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피폐(疲弊)한 민생(民生)의 안정(安定)을 위하여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 근해지역(全羅道 近海地域)에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擴大 實施)하였으며 필생(畢生)의 간원(懇願)이던 북벌(北伐)을 실행(實行)치 못한 채 효종(孝宗) 10년(1659년)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10년이었고 춘추(春秋) 41세였다.현종(顯宗) 즉위년(卽位年) (1659년) 5월 11일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이라 하고 릉호(陵號)를 녕릉(寧陵)이라 하였으며 이 해 10월 29일 양주 건원릉 서측(楊州 健元陵 西側) 산줄기에 예장(禮葬)하였다. 녕릉 석물(寧陵 石物)에 틈이 생겨 릉침(陵寢)의 누수우려(漏水憂慮)로 인한 천릉론(遷陵論)에 따라 현종(顯宗) 14년(1673년) 10월 7일 여주 영릉 동측(驪州 英陵 東側) 언덕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에 천릉(遷陵)하였으며 천릉(遷陵)에 앞서 릉역내(陵域內)의 민가(民家)와 총묘(塚墓)를 옮기게 하였다.효종대왕(孝宗大王)의 비 인선왕후 장씨(妃 仁宣王后 張氏)는 본관(本貫)이 덕수(德水)로 우의정 신풍부원군 장유(右議政 新豊府院君 張維)의 녀(女)로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산 촌사(京畿道 安山 村舍)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이다. 인조(仁祖) 23년(1645년) 효종(孝宗)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됨에 9월 27일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冊封)되었고 효종(孝宗) 즉위년(卽位年)(1649년) 5월 13일 왕비(王妃)로 진봉(進封)되었으며 현종(顯宗) 즉위년(卽位年)(1659년) 5월 9일 왕대비(王大妃)로 되었다. 현종(顯宗) 15년(1674년) 2월 24일 경희궁 회상전(慶熙宮 會祥殿)에서 승하(昇遐)하였으니 춘추(春秋) 57세였으며 소생(所生)은 현종(顯宗)을 비롯한 1남 6녀(1南6女)다. 이 해 3월 2일 시호(諡號)를 인선(仁宣)이라 하였으며 6월 4일 효종릉(孝宗陵) 아래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正北)에서 정남향(正南向))에 장례(葬禮)지냈다. 현종(顯宗) 14년(1673년)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을 양주 검엄산(楊州 儉嚴山)에서 천봉(遷奉)한 익년 인선왕후(翌年 仁宣王后)의 릉(陵)을 영릉 영역(寧陵 塋域)에 봉릉(奉陵)함에 있어 양릉(兩陵)을 좌우(左右)로 나란히 하지 아니하고 왕릉(王陵)의 아래에 설릉(設陵)하여 왕(王)과 비(妃)의 릉(陵)이 상하(上下)로 쌍릉 형식(雙陵 形式)을 취(取)하고 있으니 이는 풍수지리상 생기왕성(風水地理上 生氣旺盛)한 정혈(正穴)에 릉침(陵寢)을 두고자 한 것으로서 양릉(兩陵)을 좌우(左右)로 설릉(設陵)할 경우 정혈(正穴)에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원상하이봉릉(同原上下異封陵)은 조선왕릉 중 최초(朝鮮王陵 中 最初)의 형태(形態)이고 제20대 경종대왕(第20代 景宗大王)의 의릉(懿陵)이 또 한 예(例)이다. 개천 영릉(改遷 寧陵)의 왕릉(王陵)엔 3면(面)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고 릉침(陵寢)엔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며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설치(設置)하고 동자석(童子石)에 십이방위 문자(十二方位 文字)를 새겼다. 이는 조선조 릉제상(朝鮮朝 陵制上) 한 전환기(轉換期)가 되었으니 여주(驪州)의 천장 영릉(遷葬 英陵)과 양주 광릉(楊州 光陵)으로부터 세조(世祖)의 유교(遺敎)로 릉침(陵寢)에 병석(屛石)을 세우지 아니하다가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서 다시 시작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이 새겨진 병석 설치제도(屛石 設置制度)가 영릉(寧陵)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며 또 하나가 현실 회격(玄室 灰隔) 바닥에 지회(地灰)를 깔게 된 것이며 병석(屛石)은 조선 말기 홍릉(朝鮮 末期 洪陵)과 유릉(裕陵)에서 있게 된다.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 호석 각 2쌍(虎石 各 2雙)이 외향 배치(外向 配置)되고 릉전(陵前)에 상석(床石)이 1좌(座), 그 양측(兩側)으로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설치(設置)되어 상계(上階)를 이루고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과 중앙(中央)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가 있으며 하계(下階)에는 무석(武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문석(文石)과 같은 배열(配列)로 설치(設置)되어 있다. 왕릉(王陵) 아래의 비릉(妃陵) 곡장(曲墻)만 설치(設置)되어 있지 아니할 뿐 릉상 의물(陵上 儀物)은 왕릉(王陵)과 같이 되어 있어 단릉(單陵)의 형태(形態)를 갖추고 있다. 정자각(丁字閣)은 비릉(妃陵) 언덕 아래에 있고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으며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서 조선국효종대왕녕릉(朝鮮國孝宗大王寧陵)이라 썼으며 음기(陰記)는 인선왕후부장재하(仁宣王后 葬在下)라 썼다. 정자각 남측 삼도(丁字閣 南側 三道) 시작 부분(部分)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는데 홍살문(紅箭門)과 정자각(丁字閣) 사이에 삼도(三道)를 가로 질러 금천(禁川)이 흐르고 있는 바 금천(禁川)은 홍살문(紅箭門) 밖으로 흐름이 상례(常例)임이 비(比)하여 특이(特異)하다. 홍살문(紅箭門) 아래의 소로 동편(小路 東便)에 영릉 재실(寧陵 齋室)이 있다.
신륵사
경기도 여주군 신접리 고인돌(여주군 향토유적 제14호.여주읍 천송리 297-20)
북내면 신접리 56-1번지에 위치하는 이곳은 접줄마을의 입구이다. 탁자식인 이 고인돌은 2003년 6월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를 실시하기 전의 모습을 보면, 덮개돌과 양쪽에 굄돌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파괴가 많이 된 상태였다. 즉 고인돌의 서쪽 굄돌이 무덤방의 안쪽으로 쓰러지면서 덮개돌이 20°쯤 기울어진 모습이었다. 덮개돌의 재질은 거정화강암 계통이고 크기는 200×184×30~40㎝이며 무게는 2톤쯤 된다. 평면 생김새는 마름모꼴이고, 윗면은 편평하다. 그리고 가장자리에는 손질을 많이 한 흔적이 관찰된다. 놓인 긴 방향은 남북쪽이었다. 굄돌은 덮개돌의 동쪽과 서쪽에 놓여 있었으며 가운데 부분이 조금 두툼한 느낌을 준다. 재질은 양쪽 모두 덮개돌과 같은 거정화강암이었다. 동쪽 굄돌의 평면 생김새는 한쪽이 긴 육각형 모양이다. 겉면과 가장자리에 비교적 손질을 많이 하였다. 크기는 200×185×20~30㎝이며, 무게는 덮개돌보다 약간 무거운 2.1톤쯤 된다.서쪽 굄돌은 평면 생김새가 모를 죽인 삼각형이고 동쪽 것처럼 가장자리에는 손질이 많이 되었다. 크기는 197×150×30~40㎝이며 무게는 2.1톤쯤 된다.이 고인돌은 발굴조사 결과, 후대에 무덤방이 파괴되면서 서쪽 굄돌이 기울어져 고인돌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쪽으로 비스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동쪽 굄돌의 가장자리에서는 굄돌이 쓰러지지 않도록 벽면 주위에 보강한 돌과 바닥에서 찰흙다짐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이렇게 탁자식 고인돌의 굄돌을 보강한 경우는 연천 학곡리 2호와 북한지역의 연탄 송신동 4·10호 고인돌에서 보고되었다.무덤방은 후대에 파괴가 심하여 전체적인 크기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굄돌의 위치로 보아 긴 네모꼴로 여겨지며, 출토 유물은 없었다.현재 이 고인돌은 발굴조사된 다음 신륵사 관광단지로 이전하여 복원 전시하였다.(여주군청 자료)
조포나루터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나루는 한강 4대 나루로 불릴 만큼 유명한 나루다. 1963년 10월 23일 오후 2시 50분 신륵사에 수학여행 왔다 귀향하던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탄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사고는 강을 거의 건너 연양리 선착장 5m 전방에서 일어났는데 사고 원인은 정원 70명에 67명을 초과하여 총 137명이 승선한 나룻배를 밀어주던 모터보트가 선착장에 도달하면서 떨어지자 그 충격으로 학생들이 앞으로 몰리면서 과중한 중량을 못 이겨 배가 침몰한 것으로 언론은 보도했다. 사고 직후 모터보트에 매달려 구조된 88명은 생존하였으나 흥안초등학교 유선무 교장을 비롯한 49명은 심장마비로 익사하였다. 사고지점은 수심이 2m로 이날은 통행인이 적어 임관 경찰관이 없었던 관계로 사공이 정원을 초과해 승선시킨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날 오후 3시 15분경 급보를 받은 여주경찰서는 경찰관과 의용소방대원, 여주읍 시내 의사가 총동원되어 구조작업에 나섰으나 대부분이 심장마비로 익사하였으며, 당일 오후 4시경에 49구의 시신을 모두 인양하여 여주읍사무소 등 시설에 안치하였다가 당일 자정경에 버스 2대와 트럭 2대가 동원되어 안양으로 이송했다. 안양 흥안초등학교는 총 11개 학급 631명으로 경기도 향토교육학교로 지정되어 10월 21일부터 3일간 농번기 휴가를 끝내고 23일 신륵사로 소풍을 왔다 귀교 길에서 참변을 당한 것이다.
언론에 의하면 이 학교는 5학년 1반 65명과 2반 64명, 6학년생 611명 등 총 190명이 참가대상이었으나 이중 63명은 교통비 120원을 내지 못하여 소풍에 참가하지 못하였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시흥군(현 안양시)은 24일 오전 11시 군청 회의실에서 기관장 긴급회의를 열고 사고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29일 오전 10시 흥안초등학교 강당에서 위령제를 갖기로 하였으며, 합동장례를 하지 못하는 유족에게는 1가구당 2만원의 위로금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사고가 난 조포나루는 신륵사 관광을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나루로, 1959년 여름에도 9명이 익사한 나룻배 사고가 있었으며, 사고를 낸 나룻배는 폭 2m, 길이 20m로 3년이 지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낡은 배라고 신문은 보도했다.(자료 : 여주군史에서 발취)
신륵사
신륵사는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절 앞으로는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창건 시기를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는 상황이다.
신륵(神勒)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대사)이 신기한 굴레(勒)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한다. 흔히 용(龍)은 물속에 사는 것으로, 또 구름 속을 날며 비를 불러오기도 하는 물과 매우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전설의 동물로 이야기 된다. 용마가 출현하여 사납게 날뛰었다는 것은 곧 강물이 범람하여 휩쓸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용마가 출현했다는 마암(馬巖)의 역할이다. 이색(1328~1396)은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이 높다”고 하였고, 임원준(1423~1500)은 “마암은 강을 요긴한 곳에서 막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사납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막아주는 마암의 역할을 칭송하고 있다. 만약 용마의 출현이 강물의 범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물을 막아주는 마암에서 용마가 출현했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러나 한때 물길을 막아주는 마암의 구실에도 불구하고 강의 심한 범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문에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에 의하여 지세(地勢)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신륵사를 창건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용마의 출현은 강이 홍수에 의해 범람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따라서 용마를 제압했다는 것은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을 피하기 원하는 대중의 바람이 설화화했다는 견해이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 말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즉 김수온(1409~1481)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불우조(佛宇條)에서 “옛날 현릉의 왕사 나옹과 목은선생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와서 (신륵사에서) 놀았다. 이로부터 이 절이 드디어 기좌(畿左)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나옹과 신륵사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1376년(고려 우왕 2)에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옹 입적 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색에게 선각탑명(禪覺塔銘)을 짓게 했다. 그리고 입적 3개월 후인 1376년 8월 15일에 나옹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륵사 북쪽 언덕에 나옹의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석종형의 부도를 세웠으며 동시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아마도 이때의 중창이 신륵사의 골격을 분명히 한 계기일 것이다. 후에 조선시대에 또 한 번의 중창이 있었지만, 고려 말의 모습을 크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가정해 본다면 지금 남아있는 극락보전과 좌우의 건물, 그 앞의 누각이 나옹 입적후의 중창 모습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 말의 신륵사에 관한 일로서 첨가할 일은 2층으로 된 대장각을 건립하고 대장경 일부를 봉안한 것이다. 이것은 1382년(우왕 8)의 일로, 도은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시대 들어 신륵사는 영릉(英陵)의 원찰이 되면서 또 한 번의 중창의 기회를 맞게 된다. 본래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천장한 것이 예종 원년(1469)의 일이다. 곧 이어서 영릉의 원찰을 짓는 일이 거론되다가 한명회 등의 건의에 따라 가까이에 있는 신륵사를 원찰로 하여 중수하게 된 것이다. 중수공사는 1472년 2월부터 8개월간 진행되어 200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영릉을 원찰로 세우고자 처음 발원을 했던 것은 세조로서 그 유지를 계승하여 실현시킨 것은 당시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이다. 신륵사의 중수불사가 끝난 다음해 정희왕후는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신륵사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게 하고 세종대왕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조선중기에는 임진·정유란의 병화로 피폐된 신륵사를 1671년(현종 12)과 1702년(숙종 28)에 여러 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그리고 1726년(영조 2)에 동대(東臺)에 있는 전탑을 중수하고 중수비를 세웠다.
조선말기인 1858년(철종 9)에 신륵사는 헌종의 조모이며 익종의 어머니인 순원왕후가 발원하여 왕실의 내탕금으로 불전·종루 등을 중수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주지승 성인(性仁)이 명부전을 중건하였고, 1955년에는 용주사의 말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신륵사의 각종 수리실적을 살펴보면 1980년에 다층전탑 보수와 조사당 고막이보수·기단보수를 하였고, 1981년 대장각기비 신축, 1982년 조사당 번와 보수, 벽체 보수, 1988년 소화전 및 격납함을 설치하였다. 한편 매표소 바로 지나 서 있는 높이 3.05m의 신륵사 사적비는 1985년 정무(주지승) 당시 세워진 비석이다. 전면에 신륵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면에 효사상 고취를 위해 부모은중경을 조각하였다.
1990년대에는 1993년 일주문 보수, 1994년 매표소 이전 및 보호책 설치, 1996년 신륵사 조사당 진입로 정비 및 보수, 1997년 적묵당 보수, 극락보전·대장각·조사당의 방충방연재 도포를 실시하였고, 1998년 대장각비·종각·명부전의 지붕번와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0년 심검당 보수공사, 2001년 화장실 보수공사, 소화시설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3년에는 기존의 일주문은 헐고 원래 위치보다 전방 30m 앞에 새로운 일주문을 건립하였다. 기존 일주문은 정면 1칸, 폭 7.56m, 높이 10.9m의 규모였으나 새로운 일주문은 정면 1칸, 폭 4.5m, 높이 8m의 규모이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대장각기비, 보제존자석등, 조사당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보전, 팔각원당형석조부도 등이 있다.
여주 신륵사다층전탑
신륵사 경내의 동남 편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2층 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단 전체를 화강암으로 축조한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용례라 생각된다. 기단의 상면에는 여러 장의 화강암으로 구축한 낮은 1단의 탑신받침이 놓여있다.
탑신부는 모두 6층으로 마지막 층만 높이와 너비가 축소되었을 뿐 나머지 층에서는 일정한 체감비를 볼 수 없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된 채 고준(高峻)한 감만을 주고 있다. 아울러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 내에 당초문을 새긴 것과 무문(無紋)의 2종류가 불규칙하게 구축되어 있는데, 벽돌의 조립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탑과 같이 촘촘히 놓인 것이 아니라 벽돌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백토(白土)를 발랐다. 옥개석의 받침은 3층까지는 2단이며, 나머지 층은 1단씩 두었다. 낙수면 역시 1층은 4단임에 비해 나머지 층은 모두 2단씩 되어 있어 각 층의 경계선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露盤)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가 놓여있다.
이 전탑에 대해서는 금서룡(今西龍)이 고려 말의 건립설을 제기한 이래 고유섭도 이를 지지하고 있는데,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로 보아 1726년(영조 2)에 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비문의 내용 중 이 전탑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옛부터 벽돌탑이 있어 그 산정(山頂)을 누를 듯한 데 이를 나옹탑이라 전해지고 있다. (중략) 허물어진 때문에 절의 스님이신 덕륜(德輪)과 탁련(琢璉)이 모든 신도들이 모금을 하여서 새로 보수한 기둥 만도 백여 개가 되었지만, 오직 탑만은 보수하지 못했다.” (중략) 스님 영순(英淳)과 법밀 등이 발원하여 재물을 모아 금년 봄에 수리하기 시작하여 탑을 헐어 내려가다 밑바닥에 이르러 간직해 두었던 사리 5개를 얻었고 (마멸) 말하기를 부처님 사리도 문수(文殊)께서 보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보제(普濟)는 본사(本寺)에서 입적하시었고, 다비식도 이 언덕에서 거행하였으니 이 사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멸) 상고해 보면 거기에 이르기를 사리를 얻은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으니, 각신(覺信)의 무리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하였을 것이며 다시 그 나머지를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워 간직하고 석종을 만들어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마멸) 마침내 4월 8일에 맨 먼저 아래 석대(石臺)를 수리하고 다시 경감(瓊龕)을 안치하고 이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서 (마멸) 그 또한 성실하고 전력을 다한 것이다. (중략) 옛사람이 전한대로 모방하고 전후에 보수한 수고로움도 다 기록하기 어렵다. 영릉을 옮기고 이 절을 영릉 원찰로 삼고는 조정에서 보은(報恩)한다는 의미로 보은사(報恩寺)라는 현판을 내리셨다고 탑지(塔誌)에 기록되어 있다. 성화(成化)·만력(萬曆)간에도 관에서 재차 수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록은 다층전탑의 수리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나옹탑이라 불렸다는 기록은 전탑의 건립이 나옹화상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옹화상은 1376년(고려 우왕 2) 4월에 회암사에서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경상도 밀양군(密城郡)으로 추방되어 이송되던 중 신륵사에 이르러 5월 15일에 입적하게 된다. 따라서 나옹이 신륵사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한 달에 불과한 극히 짧은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기간 내에 전탑을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나옹의 입적 후 일어났던 신비로운 이적(異蹟)은 신륵사의 사세(寺勢)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전탑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다층 전탑은 신륵사와 나옹과의 관계를 보아 1376년을 건립 하한으로 설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塔誌)가 봉안되어 있었다.
셋째, 사리는 밑바닥에서 수습했다는 기록을 보아 기단하부에 사리를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1726년(조선 영조 2)의 수리시 경감(瓊龕)을 안치하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렸다는 기록을 보아 이때에도 사리는 기단부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제일 먼저 석대(石臺)를 수리했다는 기록을 보아 1726년 당시까지도 기단부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화강암으로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성화·만력 연간에도 관의 주도로 수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전탑은 건립 이래 성화 연간(1465~1487), 만력 연간(1573~1620)에 이어 1726년(영조 2)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전탑의 명칭은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륵사 다층전탑이 아니라 「신륵사 동대탑(神勒寺 東臺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현재는 6층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건립당시의 모습이 변화된 까닭에 층수가 불분명하여 다층전탑이라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해 우현 고유섭은 “7층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6층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매우 애매한 자태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 제목은 「여주 신륵사 오층전탑(麗州 神勒寺 五層塼塔)」으로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전탑은 본래 7층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탑파는 신라시대 모두 홀수의 층수를 이루고 있고, 고려 말에 건립된 안양사의 전탑 역시 칠층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6층의 모습에서 부재(部材)를 체감해 층수를 조절해 볼 때 7층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한강변에 인접한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있어 전통적인 가람배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유섭은 석탑의 건립 요인을
“첫째, 가람배치의 규약상 필수적으로 건립된 것, 둘째, 불체(佛體)와 동등가치의 것으로 취급되어 결연추복(結緣追福)을 위하여 일반 승려의 손으로 인하여 건립된 것, 셋째, 고덕(高德)을 표양(表揚)하기 위하여 묘표(墓標)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라고 분류하고 있다.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던 불가의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불교도에 있어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 초기에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탑의 건립에는 반드시 불교와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건립되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신라 석탑에 있어서는 9세기에 이르러 이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왕실 혹은 개인의 번영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건립하는 원탑(願塔)과 풍수지리설에 의해 건립된 예를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9세기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의 건립을 시발로 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 계폐탑의 석괴형기단(石塊形基壇)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석탑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안동 막곡동 삼층석탑, 안동 니천동 삼층석탑,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홍천 양덕원 삼층석탑, 영암 월출산마애불 전방 삼층석탑 및 용암사지 삼층석탑 등 상당수가 건립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석탑의 건립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팽배했던 산천비보의 사상에 의해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사찰의 동쪽 남한강변에 위치한 동대(東臺)에 건립되어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면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강에서 바라 볼 때 사찰은 가려져도 전탑만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탑이 지닌 입지조건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 풍수사상에 의해 건립된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에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신륵사가 위치한 남한강은 삼국시대 이래 충주와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의 하나였고, 이후 경상도 북부와 충청북도 지역의 산물과 세조미의 수송을 전담했던 주요한 수운이었다. 때문에 이 강을 통해 많은 배가 드나들었고, 이들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대상 역시 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생각은 이 지역에 전해오는 마암(馬巖)의 전설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는데, 인당대사(仁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의 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 했다.”
여기서 용마의 출현은 바로 강물의 범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리해 볼 때 신륵사의 주변을 흐르는 남한강의 물줄기는 분명 인근 주민과 뱃길의 안전에 많은 위험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뱃사공과 인근 주민은 이 탑을 바라보면서 강물의 평안함과 뱃길의 안전운행을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륵사 다층전탑의 건립에는 당시에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을 기반으로 불력에 의해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뱃길의 안전운행과 강물의 평안함을 기원하고자 하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이란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석탑 발생기로부터 전탑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실물로 전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전탑의 대부분은 경상북도 선산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에 비해 고려시대에 이르러 경기도 여주에 건립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지방에서는 그 예를 볼 수 없는 전탑이 앞서 언급했던 안양사 전탑과 더불어 2기가 건립되고 있고, 이들은 모두 문양전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신륵사 전탑에 문양전이 사용되었음은 이미 밝힌바 대로이고 안양사의 전탑에 대해서는 고유섭에 의해 그 편린이 소개된 바 있다.
“현재 총독부박물관에 그 탑에서 붕괴된 전편(塼片)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신라탑전(新羅塔塼)의 일양식(一樣式)을 모(模)하여 불상을 부조(浮彫)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안양사 전탑 부재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처럼 벽돌에 탑·상을 부조하여 전탑의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으로 그 예가 흔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신륵사의 다층전탑은 신라시대 이래 유문전(有紋塼)을 사용해 전탑을 건립하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 당시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주는 한 예라 생각된다.
신륵사 삼층석탑
다층전탑 인근의 강변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는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한 후 중앙에 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식했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잔존하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상과 같은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보제(普濟)는 본사(本寺)에서 입적하시었고, 다비식도 이 언덕에서 거행하였으니 이 사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멸) 상고해 보면 거기에 이르기를 사리를 얻은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으니, 각신(覺信)의 무리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하였을 것이며 다시 그 나머지를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워 간직하고 석종을 만들어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기록을 볼 때 나옹스님을 다비한 장소가 바로 전탑과 석탑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다비식을 거행한 장소에 건립된 탑은 앞서의 전탑과 이 석탑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님의 다비처에 건립한 탑은 3층 석탑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옹화상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고, 석탑 역시 같은 재료로 건립되었다. 아울러 화강암과 벽돌은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한 훼손 시 석탑은 내구성이 보장되지만, 전탑은 흔적도 없이 소멸된다는 재료상의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문에 명시된 다비처에 건립된 탑은 석탑이 더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화장이라는 장례법식을 보아 스님의 다비식을 거행한 장소로는 전탑의 위치보다는 석탑이 건립되어 있는 암반이 더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강변에서 화장을 하는 경우는 인도의 전통적인 장례의식에서 볼 수 있다. 인도에서는 갠지스강변에 “Gath”라는 화장터를 마련하고 이에서 화장한 시신을 갠지스강에 뿌리고 있다. 따라서 강변에 위치한 사찰에서는 이와 유사한 장소를 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화장이 승려들이 택하는 전통적인 장례법임을 감안할 때 나옹스님 역시 강변을 택해 다비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탑 역시 전통적인 가람배치법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나옹의 자취를 기념하고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화장지에 세워진 일종의 기념탑이라 하겠다.
신륵사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이다. 따라서 외형적인 면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층수가 불분명한 관계로 다층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석탑의 절대다수가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백대리석(白大理石)을 주성재료로 사용한 점이 기존의 석탑과 다르다.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의 각 층 부재는 각각 일석(一石)으로 조립되었는데, 이는 석재가 구하기 어려운 백색 대리석인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층기단의 하대석에는 단엽(單葉) 40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화문(花紋)으로 장식하였는데, 각 면에는 파도문을 조식하였다. 갑석(甲石)의 상·하면에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하였고, 중간에는 넓은 돌대(突帶)를 형성하고 있다. 상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화형(花形)과 연주문(連珠紋)으로 장식한 우주(隅柱)를 모각한 후, 각 면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하였다. 특히 구름무늬의 유려함과 용의 얼굴과 발가락과 더불어 몸체의 비늘에서 주는 사실적인 감각은 마치 승천하는 용이라 생각될 만큼 활기차게 조각하였다. 이처럼 상층기단 면석에 문양을 조식한 경우는 신라시대 이래 건립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석탑에서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식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탑에서는 용과 운문(雲紋)을 가득히 조각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9세기에 건립된 석불의 예로는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사나불좌상(863년)이 있고, 부도의 경우는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 부도(886년)를 필두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 부도 및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977년), 경북대학교 소장 석조 부도와 흥법사 진공대사탑(940년)이 있어 앞 시대의 양식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에 있는 무학대사부도(1407년)에서 탑신부를 원구형으로 조성한 후 전면(全面)에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한 예를 볼 수 있어 비록 시대를 달리하는 석조물이지만, 양식상의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갑석의 하면에는 앙련(仰蓮)이 조식되었고, 상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은 현재 8층까지 남아있는데 매층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평박하고, 옥개받침이 낮게 조출되었으며, 상면에는 각형 1단의 탑신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는데, 각 층의 체감율이 완만하다. 찰주가 관통된 8층 옥개석의 상면에 소형의 탑신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본래는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종 영릉(英陵)의 자복사(資福寺)로서 1472년(성종 3)에 중흥한 사찰인 점과 1467년(세조 13)에 낙성한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과 같은 석질(石質)인 점을 고려 할 때 대략 늦어도 1472년에는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은 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3기가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 지역에는 다층석탑 외에도 회룡사 오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용주사 천보루 앞 오층석탑, 묘적사 팔각다층석탑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 중 신륵사 다층석탑의 기단에 새겨진 운룡문(雲龍紋)은 당대의 석탑과 문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석탑의 기단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비롯한 비천상·안상·사자상 등 불교와 연관된 조각이 등장하는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다. 그런데 이 석탑에서는 이 같은 전통에서 벗어나 구름과 용이라는 조식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석비에서 귀부와 이수에서 등장했던 것으로 석탑에서 채용됨은 특수한 일례라 생각된다. 특히 운용문은 조각기법에 있어 얼굴과 비늘 그리고 발톱 등의 묘사에 있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있는 표현은 구름무늬와 잘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작례(作例)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장이었음을 볼 때, 신륵사가 지녔던 사격(寺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신륵사는 나옹화상의 부도와 대장경을 봉안했다는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 영릉(英陵)의 원찰로 확정되어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중수공사에서 200칸의 건물이 완공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신륵사의 사세(寺勢)는 이때가 최고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147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운용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은 영릉의 원찰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스님의 사리탑이다. 양식상에 있어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형식이 아니라 석종형부도(石鍾形浮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석을 깔아 마련한 묘역에 방형의 넓은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상면에도 박석을 깔고 중앙에 2매의 판석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석종형의 탑신을 놓았다. 기단의 전면과 양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면석에는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석종의 신부(身部)는 위로 갈수록 원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게 처리하였는데, 상면에는 보주(寶株)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둔중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건립되는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된다.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에 각각 건립되어 있다. 양 부도의 건립에 대해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에는
“8월 15일 부도를 사(寺)의 북안(北岸)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모시니 그의 입적하신 곳을 표시하려는 뜻이요 석종(石鍾)으로 덮었으니 감히 와전(訛傳)되는 일이 없기 위해서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 각각 두 곳에 건립되었고, 이 중 신륵사의 것은 석종으로 덮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암사의 부도는 선사의 입적 후 3개월 만인 1376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륵사의 부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인근에 건립되어 있는 「보제존자사리석종기(普濟尊者舍利石鐘記)」가 1379년(고려 우왕 5)에 각신(覺信), 각주(覺珠) 등의 주관으로 건립된 점으로 보아 이 부도 역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제존자의 석종은 외형상 방형의 기단위에 탑신을 안치함으로써 계단탑(戒壇塔)의 형상을 따르고 있지만, 2층의 방형기단을 구비한 점에서 자장(慈藏)이 확립한 전통적인 계단(戒壇)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진전사지 부도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김제 금산사 계단을 비롯해 불일사지 계단, 달성 용연사 부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의 양식에서 탈피해 통도사 금강계단의 양식을 계승한 부도의 양식이라 하겠다. 아울러 주인공을 알 수 없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역시 조선초기의 건립으로 추정됨에 따라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전형적인 부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조부도의 주류는 석종형부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예가 많지 않음을 볼 때 이 부도는 우리나라 석조미술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석등으로 나옹스님의 사리탑 앞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형의 높직한 지대석 상면에 각각 1석으로 조성한 기단부·화사석·옥개석·상륜부를 순차적으로 놓아 모두 5매의 석재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기단부가 다른 석등에 비해 낮게 조성되어 마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를 보는 듯하다. 지대석은 평면 8각의 형태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1석으로 조성된 기단부는 하대·중대·상대의 3부분으로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되어 부도 및 부상의 대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석에는 복엽 16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잘록한 간주석에는 각 모서리에 연주문(蓮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내면에 아(亞)자형의 안상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는 복엽 16판의 앙련을 조식했는데, 상면에는 아무 받침 없이 편평하게 다듬어 화사석을 놓았다. 팔각형의 평면을 지닌 일반형 석등의 화사석은 다른 부재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납석제를 사용해 높게 조성되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화창은 각 면에 1개씩 모두 8개를 개설했는데, 사라센 계통의 완만한 곡선의 화두창(花頭窓)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율동감 넘치는 반룡문(蟠龍紋)을 섬세하게 양각했고, 상면에는 평창과 창방을 조각해 목조건축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방과 화창 상면의 공간에는 하강하는 형태의 비천을 고부조(高浮彫)로 양각했다. 화사석에 다른 석등과는 달리 목조건축의 표현과 더불어 반용과 비천을 배치하고 있음은 납석을 재료로 선택한 까닭에 섬세한 조각이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팔각형의 옥개석은 비교적 낮게 조성되었는데, 우동이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반원형을 이루는 처마는 높직한데, 전각(轉角)의 반전이 예리해 둔중한 감을 면하고 있다. 하면에는 1단의 옥개받침과 낙수 홈이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는 옥개석과 1석으로 조성한 복발(覆鉢) 위에 연봉형의 보주(寶珠)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화상의 부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가람배치상의 석등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부도 앞에 건립되는 가평 현등사 부도 앞 석등, 회암사 지공·나옹·무학대사 부도 앞 석등, 중원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앞 석등의 조형(祖型)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무덤에 등장하는 장명등의 조형을 이루는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석등이라 하겠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나옹화상의 부도와 탑비가 건립되던 1379년(고려 우왕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지닌 양식에서 종래의 전형적인 석등에서 변화되는 모습으로는 기단부의 축소, 화사석의 사용된 석재 및 양식 그리고 성격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먼저 기단부의 변화로는 종래의 전형적인 석등에서는 간주석을 높게 조성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하고 상대석과 하대석을 넓게 조성해 마치 부도의 기단을 연상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복형 석등을 제외한 평면 팔각의 석등에서는 간주석에 아무 조식이 없는 반면, 이에서는 연주문과 안상을 조각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석등 간주석에서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부도 및 불상대좌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화사석에 있어 기존의 석등에서는 기단부와 같은 재질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에서는 납석을 사용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는 석등의 조성 시 이미 화사석에 많은 장엄을 가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조치라 생각되는데, 실제로 화사석에 베풀어진 많은 조각을 보아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하기보다는 비교적 무른 납석을 채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석등의 화사석에 표현된 조식은 사천왕상이 전부인데 반해 이에서는 우주(隅柱), 반룡(蟠龍),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해 목조건축의 요소인 창방과 평방까지 표현하고 있어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예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화창에 구현된 사라센 양식은 당시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신륵사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여건에서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남한강은 서해로 연결되어 항시 수로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기 쉬운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여주는 당시 수도인 개성과 가깝다는 점과 더불어 남한강변에 있어 인근 지역에서와 같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륵사 석등에 서역문화의 영향이 나타남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이는 당시 여주가 지녔던 새로운 문화수용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부도의 전면에 배치됨으로써 불교적인 성격의 석등이 장명등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이 같은 유형의 한 규범을 완성했다는데 성격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 석종의 뒤편에 건립된 높이 212㎝ 규모의 석비로, 나옹화상의 일대기와 석종비의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음에 비해,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조성했다. 높직한 판석을 사용해 3단의 지대석을 구축한 후 비좌·비신·이수를 차례로 놓았다.
비좌 역시 3단으로 구성했는데, 하단에는 앞·뒷면에 5엽씩, 양 측면에 2엽 그리고 모서리에 각 1엽 등 모두 16엽의 단판복련(單瓣覆蓮)을 조각했다. 중대석에는 앞·뒤 면에 각 2구씩 그리고 측면에 각 1구씩 모두 6구의 안상을 새겼는데, 내면에는 동물문양을 조식하고 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동일한 양식의 연화문을 조식했는데, 하대석이 단판인 점에 비해 복엽복판의 앙련인 점만 다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조성한 2면비로, 양 측면에는 화강암으로 기둥을 세워 비신을 감입했다. 기둥의 전면에는 2조의 세로선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사상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더욱이 뒷면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문도(門徒)와 석종과 비의 건립에 관여한 도속(道俗)의 명단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명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썼는데,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체로 썼다.
옥개석은 우진각 지붕형으로 하면에는 공포와 서까래가 상단의 낙수면에는 기와골이 정연히 모각되어 있다. 용마루의 양 끝에는 각각 1구씩의 용두가 표현되었다.
이 비석은 전통적으로 귀부와 이수를 구비한 것으로부터 장방형의 비좌와 지붕형의 옥개석을 구비한 양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1379년(고려 우왕 5)에 건립되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3㎝, 폭은 88㎝로 비신 둘레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 말 새로 유행된 석비형식으로 보제존자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질의 대리석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론 3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다 한다. 서쪽이라면 지금의 명부전쪽이 되리라 추정된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383년(우왕 9, 홍무 16)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는 나옹의 석종비보다 4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楷書)로 예문관제학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진현관제학 권주(權鑄)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비의 형태는 신라 이래 건립되던 일반적인 형식과는 매우 다르다. 즉 귀부와 이수 등의 형태는 볼 수 없고, 그냥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대치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대와 옥개석은 그 조형이 나옹의 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대에서 뿐 아니라, 특히 옥개에서 공포와 와구 등의 조각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신륵사 구룡루중수비
조선 영조대(1724~1776)에 신륵사 구룡루를 중수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으로 현재 대장각기비 앞에 세워져 있다. 건립 연대는 1751년(영조 27)이다.
규모는 총 높이 193.5㎝로, 비신(碑身) 높이 140.5㎝, 폭 60.5㎝, 두께 18.5㎝이며, 방부(方趺) 높이 53㎝, 폭 96.5㎝, 두께 62㎝이다.
비제(碑題)는 “여주봉미산신륵사구룡루중수비(驪州鳳尾山神勒寺九龍樓重修碑)”이며, 통훈대부전행사간원헌납(通訓大夫前行司諫院獻納) 권신(權賮)이 글을 짓고 진산후인(晉山後人) 강주팔(姜柱八)이 썼다. 비문은 비신의 전후면과 우측에만 각자(刻字)하였다.
신륵사 김병기송덕비
조선 철종대(1849~1863)의 세도가인 김병기(1818~1875)가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건립연대는 1860년(철종 11)이다.
규모는 총 높이 약 226.5㎝로, 비신 높이 136.5㎝, 폭 63㎝, 두께 14.5㎝이며, 개석(蓋石) 높이 42㎝, 폭 98㎝, 두께 63.5㎝이고, 방부 높이 48㎝, 폭 91㎝, 두께 63㎝이다.
비신의 뒷면에 음기(陰記)가 13행의 단정한 해서로 새겨져 있으나, 비제(碑題)와 찬서자(撰書者)는 기록하지 않았다. 비신 앞면에 큰 해서로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라 적혀있고, 그 옆에 작은 해서로 “간역 오위장 연안김지택(看役 五衛將 延安金智澤)”이라 되어 있다.
신륵사 동대탑중수비
조선 영조대(1724~1776)에 동대탑(신륵사 다층전탑)을 크게 중수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다. 건립연대는 1726년(영조 2)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총 높이 약 249㎝로, 비신 높이 121㎝, 폭 62㎝, 두께 17㎝이며, 운수(雲首) 높이 77㎝, 폭 56㎝, 두께 31㎝이고, 방부 높이 72㎝, 폭 110㎝, 두께 65㎝이다.
비문은 아름다운 예서로 쓰여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찬서자와 건립연대를 파악하기 어렵다.
신륵사 동대 각자
신륵사 내 강월헌 주변의 강변 바위에 “東臺”라는 큰 해서체 글씨가 종(縱)으로 새겨져 있는데 지형상 일반인은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 좌측에는 “李敦夏”라는 이름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이돈하(1824~?)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서오(敍五)이며 이인승(李寅升)의 아들로, 문과급제 후 출사(出仕)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후, 의정부우참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1874년(고종 11)에 여주목사를 지냈는데, 그의 재임 기간 중 신륵사를 방문하여 이 글씨를 새겨 놓은 듯하다.
명성황후 생가
조선 제26대 고종(高宗, 1864~1907) 황제의 황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가 을미사변으로 일인(日人)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 왕의 장인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복원하였으며,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한 방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즉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고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날짜 |
내용 |
1851년 9월 25일 |
명성황후 출생(양력 11월 17일) |
1863년 12월 13일 |
고종 즉위(조선 26대) |
1866년 3월 6일 |
왕비로 책봉 |
1866년 8월 12일 |
병인양요 |
1867년 11월 16일 |
경복궁 중건 |
1871년 4월 5일 |
신미양요 |
1871년 11월 4일 |
원자 출산, 3일 뒤 사망 |
1873년 1월 |
공주 출산, 당일 사망 |
1873년 11월 5일 |
국왕 친정선포(대원군 실각) |
1874년 2월 8일 |
순종 출산 |
1874년 11월 28일 |
민승호 부자 폭사 |
1874년 11월 30일 |
한창부 부인 이씨(명성황후 생모) 사망 |
1876년 2월 2일 |
조일수호통상조규 조인 |
1882년 6월 5일 |
임오군란 |
1882년 6월 10일 |
명성황후, 장호원으로 피난 |
1882년 8월 1일 |
명성황후 환궁 |
1883년 1월 27일 |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전국에 반포 |
1883년 10월 1일 |
한성순보, 최초의 근대신문 발간 |
1884년 10월 17일 |
갑신정변 |
1887년 10월 22일 |
이화학당 교명 하사 |
1894년 1월 10일 |
동학농민전쟁 |
1894년 6월 23일 |
청일전쟁 |
1894년 6월 25일 |
갑오경장 |
1895년 10월 8일 |
명성황후 시해(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1897년 10월 11일 |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결정 |
1897년 10월 12일 |
명성왕후에서 황후로 개칭 |
1897년 11월 22일 |
명성황후 국장 거행 |
1995년부터 경기도와 여주군은 명성황후생가를 성역화 하기 위해 그동안 생가복원 이후 부지 조성, 주차장 조성, 기념관 건립, 문예관 건립, 동상 건립, 관리사 건립 등의 사업을 추진해왔다. 2005년 현재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머물렀던 감고당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명성황후생가
1975, 1976년에 안채를 각각 중수하였고, 1996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을 복원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넓은 바깥마당에 면하여 솟을대문을 가진 一자형 행랑채가 서고, 그 뒤에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 一자형 초당이 있다. 안채는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인데, 8칸 규모의 팔작지붕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전면에 퇴칸(退間)이 있는 5량구조인데 안방(2칸)과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꺾여 온돌방(1칸 반)과 부엌(3칸), 광(1칸 반)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재목도 그리 크지 않고 간살도 넓지 않으나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감고당(感古堂)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가옥으로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감고당에서 거처하였고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 감고당(感古堂)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과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다. 감고당(感古堂)은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여주군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군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참고자료(문화재청. 여주군청 자료)
첫댓글 아이고나하고 갈겁니다자된 기분으로 감사한 흔적 하나 찍고 나갑니다
몇번이나 가 본곳이지만 대충 둘러만 보고 흐르는 강물만 눈에 선-한데
사적자료로 부
대단하신 정보에 매료되어 스크랩 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