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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만록 상편
觀水漫錄 上篇
수원이 부府가 된 지는 오래다. 현縣에서 시작하여 용성龍城103)과 쌍부雙阜104) 두 읍을 합
쳐 하나의 부가 되었고, 융경연간(1567~1572)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부로 승격된
것이다. 본부를 이루는 산천의 줄기는 모두 속리산俗離山에서 시작되어, 삼백 리를 구불
구불 이어져 기전畿甸으로 들어가 용인의 부아산負兒山이 되었고, 선회하여 청명산淸明
山이 되었다. 또 서쪽으로 이어져 북쪽을 향해가다가 가파르게 솟아올라 광교산光敎山이
되었고, 광교산의 지류가 서쪽을 향해가서 미륵현彌勒峴 $1)이 되었다. 또 서쪽으로 선회해
서 오봉산五峯山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이어져 수리산修理山이 되었다. 수리산에 미
치지 못해서는 한줄기 작은 지류가 뻗어 나와 춤추듯 높낮이를 만들어내며, 그 주변으로
산과 물이 서로 어울리고 급격히 하강하여 평탄한 언덕이 되었다가, 다시 가파르게 솟아
올라 석산石山이 되었는데, 이를 증악證岳#1)이라 한다. 산의 서쪽에 있는 샘물#2)은 매우 차갑
고 신령스러워, 여름철에 병에 걸린 이가 목욕하면 즉시 효험이 있었다. 산의 남쪽에 있는
샘물도 매번 일출 때 사금砂金이 나와서 물속에서 노니는 듯 반짝이기 때문에 금수천金
水泉#3)이라 하였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초목이 없이 온통 모래와 돌뿐인데 당나라 사
람이 이를 바라보며 ‘금은보화가 쌓여 있는 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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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용성龍城: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부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위치한다. 고구려에서는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수릿골]이라 불렀으나, 신라에 편입된 후 차성車城이라 하고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104) 쌍부雙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부의 서쪽 45리 되는 곳에 위치하며, 옛날 육포六浦를 이른다.
$1)미륵현 彌勒峴: 현재의지명은 지지대고개로 불리우고 미륵불이있음
#1)증악 證岳 :현재의 명칭은 칠보산 七寶山
#2)샘물 :화성시 매송면 어천2리에서는 (어천저수지) 찬우물이라부름
#3금수천:화성시 매송면 원평리 현 금수암의 암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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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수성행용水星行龍105)의 형상을 따라 가면 7리쯤에 용복면龍伏
面이 있다. 산의 봉우리에서 시작해 용복면에 이어온 형상이 마치 북두를 품에 안은 것 같
은데, 세상에서 말하는 넓은 바다에 용이 서려 있는[滄海盤龍] 형세로, 수원의 옛 치소이
며 오늘날 원침園寢106)이 봉안된 곳이다. 그 땅이름은 용복龍伏, 봉우리 이름은 양산陽傘,
다리[橋]는 대왕大王이라 하는데, 기이한 징조와 특이한 이름은 자연히 처음 이름을 지은
[肇錫]107) 때와 부응되며, 용이 서리어 있고[盤龍] 수성水星이 굽어 안은 형세이다. 부의
명칭이 수원水原인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니, 이는 실로 하늘이 우리의 성스러운 왕조가 억
만년 동안 끝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좋은 땅에 터를 잡도록 도우신 것이다.
용복면에서 한줄기 지류가 완만하게 이어져 서쪽으로 선회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원침을 마주한 곳을 둘러 안았고, 또 서쪽으로 이어져 서풍산西豐山이 되어 건해乾亥방
향108)으로 우뚝 솟아 있다. 또한 광교산 이남에서 양성陽城・용인龍仁109) 여러 지경의 물
길이 큰 천川으로 합쳐져 바다에 들어 본부 남쪽 경계를 감싸고 있는데, 서남쪽의 큰 바다
와도 서로 이어지니 그 만나는 곳을 대진大津이라 한다.
물 가운데는 큰 암석이 있는데, 4~50장丈을 우뚝하게 솟아 본부 경내의 도수구都水口110)
가 되어 원침을 대하고 있으니, 이 또한 천하에 드문 기격奇格이다.【암석의 이름은 영웅암
英雄巖111)이다.】
본부는 면面 50개, 창소倉所 6개【하나는 부성府城에 있음】, 역촌驛村 3개, 장시場市 7개
가 있다. 진로津路는 2개가 있는데 각각 대진大津・당포唐浦라 하고 내포內浦인 홍천洪
川・면천沔川 등과 통한다. 읍의 군총軍摠은 보병 36초哨, 마병馬兵 5초, 별효사別驍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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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수성행용水星行龍: 풍수지리에서 쓰이는 말이다. 수성水星은 큰 기복이 없이 마치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형상을 뜻하고, 행
용行龍이라 하는 것은 산맥의 흐름이 멀리 뻗어나간 것을 뜻한다.
106) 원침園寢: 지금의 융릉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주인은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장조莊祖이다. 정조가 1789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읍으로 이장하면서 조성되었다.
107) 자연히 … 지은[肇錫]: 조석肇錫은 처음 좋은 이름을 지어 준다는 의미이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황고皇考께서 나
를 낳으셨을 때에 헤아리셔 처음으로 나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108) 건해乾亥방향: 이웃한 두 방향을 함께 거론할 경우 세분된 두 방향을 묶어, 덜 세분된 한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건해방향은
건방10시 30분 방향과 해방11시 방향을 모두 가리킨다.
109) 【두주: 양陽은 양성陽城이고, 용龍은 곧 용인龍仁이다.】
110) 도수구都水口: 집터나 묏자리가 물로 앞이 가려진 것을 의미한다.
111) 【두주: 당나라 사람이 이곳에 이르러 살피고는 “이 암석이 있는 100리 이내의 수구水口에서 반드시 천하의 영웅이 날 것이
다”라 했는데 이런 이유로 영웅암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영공암令公岩이라 부른다.】
* 수구水口: 물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지역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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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초가 있고, 이 밖에 각양의 명액名額 또한 많다. 세간의 풍속을 살펴보자면 광교산 이남
에서 건달산乾達山 이북까지는 대대로 문물이 열리고 예의가 바른 마을이며, 풍속은 문
화文華를 숭상한다. 건달산 이남에서 쌍부112)에 이르기까지는 민속民俗의 생리生理가 광
교산에서 건달산 사이의 지역보다 자못 넉넉하나 문화에 있어서는 조금 뒤쳐진다. 사창
社倉에서 용성龍城 옛 경계에 이르기까지는 풍속이 매우 서툴고 무지하며 야농野農이 머
무르는 곳으로, 문물 또한 건달산에서 쌍부 사이의 지역보다 뒤처진다.
본부의 경계 안으로는 명산대천이 없다. 서쪽과 남쪽은 바다에 둘러싸여 토질에 소금기
가 있고, 동쪽과 남쪽은 들판이 넓으나 수원水源이 부족하며, 또 목면이나 뽕나무, 채소나
과일로 보는 이익도 없다. 오직 농사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나, 농사에 힘쓰는 것이 충청
도의 내포 지역만 못한 까닭에 마을에 부유한 무리들이 없다. 풍속은 무예를 숭상하여 촌
야村野의 백성이라도 모두 화살을 당겨 과녁을 적중시키는 방법을 알고, 가축을 키우거
나 꼴을 베는 아이라도 모두 나무 활을 당겨 과녁에 쏠 수 있으니, 이것은 경기도의 여러
군郡이 미치지 못할 부분이다. 산천이 유순하여 막히거나 살기를 띠는 기운이 없는 까닭
에 예전부터 백성의 풍속이 비록 서툴고 무지하나 또한 도리에 어긋나거나 인륜을 저버
리는 기풍이 적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기호畿湖 지역의 요충지로 비록 임진(1592)・병자
(1636)의 난113)을 당해서도 또한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지리가 그렇
게 되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본부는 삼남으로 통하는 요충지이고 경기를 보좌하는 중요
한 진鎭이다. 지금 사방이 훤히 뚫린 평야로 본부를 옮겨 설치한 후, 전곡錢穀과 갑병甲兵
이 모두 그 중에 있다면 성을 지키는 방법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미 축성
하는 논의가 있었으나 아직도 통일된 논의가 없는 것은 다양한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른바 다양한 주장이라는 것은 재력을 마련하기 어렵고 석재를 얻기 어렵다는 것인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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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두주: 쌍雙은 쌍부雙阜이다. 봉우리가 두 개이므로 쌍부라고 하였다.】
113) 임진(1592)·병자(1636)의 난: 임진년은 왜구가 침입하여 7년간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임진왜란을, 병자년은 오랑캐가
침입하여 인조가 굴욕을 당했던 병자호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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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에도 역시 논리가 있다. 지금 경비를 다 써버리고 나면 허다한 재력을 실로 마련할 형
편이 안 되고 읍기邑基 또한 평지에 있으면 석재 역시 모으지 못하니, 그렇다면 장차 어떻
게 경영하겠는가?”
내가 답하였다. “이른바 재력이라는 것은 백성으로부터 나와서 국가로 들어가는 것이니,
진실로 위에서 모으지 않으면 반드시 아래에 있게 된다. 백성이 국가에 납부하고 국가가
백성에서 취하는 것은 모두 바꿀 수 없는 정해진 제도이기 때문에, 예부터 명분 없는 부세
는 있지 않았다. 이 성은 끊임없는 역에 매여 있으나, 아래에서 거둘 수 없고 또 위에서 모
을 수 없으면, 그 경영하는 도는 오직 편의에 따라 줄여서 변통하는 데 있다. 그 급하지 않
은 곳에서 더 가져와 알맞게 취하되, 연조年條로 제한하고 얼마간의 전곡을 취득하여 근
본을 세운다. 만약 부족하더라도 또한 경비 중에서 마련할 수 있으니, 어찌 당당한 천승
千乘(제후국)의 국가로서 그 하나의 성城에 필요한 역을 재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축조할
수 없다하겠는가?”
혹자는 본부가 평야에 위치하면 사방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입지가 되어, 지금 비록 성을
축조하더라도 만약 급박할 때에는 험난함에 의지하여 방어하는 형세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 아이가 관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저 중국의 성지는 모두
평야에 있었다. 제나라의 즉묵성卽墨城과 조나라의 진양성晉陽城이 험한 산기슭에 위치
하고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나, 모두 방어하는 입지에 놓여 있었다. 오직 우리나라만 본
래 산성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의 견해가 국한되어 그런 것이다. 호서・호남지방
에서 서울로 곧장 통하는 1천여 리의 길목마다 요충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너무 경솔한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본부의 갑병甲兵과 민물民物의 성대함은 실로 한강 이남의 대
영웅진大營雄鎭이 될 것이니, 이를 건설한 초기에 마땅히 수년간의 힘을 쏟아서 자손만
대의 이익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니, 그 영營을 축조하는 방법에 있어서 어찌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석재의 경우, 만약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석재가 무방하나, 만약 모으기 어렵다면 어찌 반
드시 석재여야만 하겠는가? 대개 성城이라는 글자는 토土자와 성成자를 쫓아, 큰 것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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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이라 했고 작은 것은 보堡라 했으니, 모두 흙을 쌓아 축조하여 방비했기 때문이다. 『시
경』에 “서울에서 흙일도 하고 조읍漕邑에서 축성築城도 한다”114)고 했는데, 이는 실제로
흙을 쌓아 축조한 것이 분명하다. 전단田單115)이 밤마다 성을 뚫어 수십 개의 구멍을 냈다
고 하는 것도, 흙이 아니면 뚫을 방법이 없으니, 이는 석재나 벽돌로 된 것이 아니라는 증
거이다. 하나라 왕 유발발劉勃勃이 성을 축조하고 송곳을 가지고 다니며 찔러서 성곽의
강약을 시험했다고 하니116) 이것은 흙으로 축조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옛날 사람들은 성을 축조하는 방법으로 석재보다 벽돌이 낫고, 벽돌보다는 흙이 낫다고
하였다. 대개 돌로 여러 층을 쌓아도 만약 홍이포紅夷砲나 호준포虎蹲砲로 공격받으면
하나의 돌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다른 돌들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벽돌로 연결하여 쌓으
면 홍이포나 호준포의 공격을 받아 벽돌의 외층이 조금 무너지더라도 내층은 그대로 남
아 있기 때문에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흙을 찧어서 쌓으면 비록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를 쏘아도 탄환이 흙속에 깊이 매몰되는 데 불과할 뿐, 결코 성 전체가 붕괴되
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것이 흙이 벽돌보다 더욱 낫다고 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그 소용되
는 품이 줄어드는 것이 돌과 벽돌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지금 흙으로 영을 축조한다면, 지대址臺에서 위로 매 1장마다 3보를 줄여서,117) 가령 4장
을 높이로 잡으면 지대의 넓이는 20보로 정해진다. 매 장마다 각각 3보를 줄여서 차례대
로 연결하여 축조하면 성위의 넓이는 응당 8보가 되고, 이를 연결하여 쌓을 때에는 매 장
마다 세 걸음을 경계로 하여 그 바깥에 조금씩 작은 여분의 땅을 두면 성의 넓이는 족히
10여 보가 될 것이다. 비록 그 위에 여첩女牒(성가퀴)을 두더라도, 또한 다섯 마리 말이
지나 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에 근거하여 제도를 삼으면, 비록 성벽의 경사가 돌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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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서울에서 … 한다: 원문에는 토국성조土國城曹라고 하였으나, 『시경詩經』 「격고擊鼓」에 토국성조土國城漕로 되어 있어 이
에 따라 번역하였다.
115) 전단田單: 『사기史記』 「전단열전田單列傳」에, 제齊나라의 전단이 연나라 군대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천여 마리의 소를 징발
하여, 뿔에는 병장기를 묶고 꼬리에는 기름을 부은 섶을 매단 다음 성城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고서 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소가 노하여 그 구멍으로 나아가 연군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가니 연군이 크게 놀라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나라는 일거에
연나라 군대를 소탕하고 잃었던 70여 성을 수복했다고 한다.
116) 하나라 왕 … 하니: 『통감절요』 「진기晉紀」에, 하나라 왕 유발발劉勃勃이 질간아리叱干阿利로 삭방수朔方水 이북과 흑수黑
水 이남에 도성을 쌓게 하였다. 질간아리는 아첨을 잘하고 잔인하여 진흙을 쪄서 성을 쌓을 때에 송곳이 한 치 깊이만 들어가
면, 즉시 그 담장을 쌓은 자를 죽여서 그 시체를 진흙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진다.
117) 【두주: 매 장마다 3보를 줄인다면 안쪽 면이 2보 반 줄어들고, 바깥 면이 반 보 줄어들어 안이 평평하게 되고, 바깥이 가지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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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보다 못하나 또한 우러러보는 이들을 움츠러들게 할 것이니, 멀리 내다보는 모의와
방비하는 방법으로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성 아래 흙을 파낸 곳은 자연스럽게 깊은 참호가 이루어져 실로 옛 사람이 해
자를 만들던 제도와 합치될 것이다. 또한 그 깊은 참호의 바깥에는 탱자나무를 심고 만약
4~5년에 이르러 울창하게 숲을 이루면, 그 견고한 바가 금탕金湯118)과 다름이 없을 것이
다. 대개 탱자나무의 특성은 능각稜角(뾰족한 모서리)이 있고 가시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이 그 아래로 출입할 수 없고 사시사철 시들지 않기 때문에 불로 태워도 타지 않고 또 그
나뭇가지가 서리서리 얽히고 견고하여 도끼질하기도 쉽지 않다. 고려 때 최영이 탐라[제
주도]를 정벌할 때, 해식애海蝕崖에 탱자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뚫고 들어갈 방법
이 없었다. 그래서 탱자나무 사이에 종이연을 날려, 몰래 갈대를 파종하여 해마다 점차 자
라게 했고, 그 갈대의 줄기와 잎이 마를 때를 기다린 다음 불을 질러 이들을 제거한 뒤, 탱
자나무 성에 들어갔다는 것에서 그 효력을 믿을 수 있다.
만약 본부에서 흙으로 성을 축조하고, 성의 바깥에 참호를 두며, 참호 밖에 탱자나무를 심
고 해마다 잘 길러 나뭇가지가 서로 얽히게 해놓은 뒤에 세월이 오래되면, 성을 파거나 구
름다리를 놓으려 해도 둘 곳이 없고, 긴 창槍이나 큰 검劍이라도 충돌할 수 없어, 그 견고
함이 어찌 돌로 축조하는 것과 비교하겠는가? 다만 지금 사람들은 매번 빠른 효과를 구하
기만 하고, 장구한 계책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필시 탱자나무는 기르기 어렵다는 말로 핑
계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를 기르는 데 천 일이 걸려도, 그 쓰임은 오히려 하루뿐일
수 있는데, 하물며 이 탱자나무는 한 번 심은 후에는 저절로 자라고 울창해지니, 어찌 눈
앞에서 바로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나무 심기를 꺼릴 수 있겠는가? 오직 식자識者들
이 헤아리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성을 벽돌로 축조하는 것은 중국의 제도이고, 돌로 축조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제도이다.
흙으로 축조하는 것은 중국과 동한이 예부터 병행한 방법인데, 바야흐로 그 흙을 찧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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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탕金湯: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줄인 말이다. 풀이하면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연못이라는 뜻으로 매우 견고한 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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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조하는 것은 모두 흙을 쪄서 사용하였다. 흙을 찌는 것은 대개 그 견고함을 취하려는 계
책이나, 이것은 모두 석회가 출현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지금은 이미 석회가 있으므로
흙을 반드시 찐 이후에 사용할 필요는 없다. 대개 석회로 축조하는 법은 반드시 황토와 가
는 모래를 반반 섞고 석회를 첨가하여 그 흙을 다져 쌓는다. 성을 축조할 때는 반드시 이
방식을 사용할 필요는 없으나, 다만 약간의 석회를 흙에 발라서 그 성의 외면을 3~4보쯤
으로 제한하여, 그 흙을 다져 쌓고 나머지는 모두 흙으로 축조한다. 또 성의 외면을 1척으
로 제한하여 석회를 아주 조금 사용하여 바르고, 대부분은 생토生土119)를 옮겨다가 견고
하게 축조하는데, 만약 회가 너무 많으면 혹시라도 사초莎草가 부생附生하기 어려울까
염려되기 때문이다.120) 또 성을 축조하는 제도는 한결같이 돌로 축조하는 법식을 따라 내
부는 평평하게 하고, 외부는 깎아지르듯이 하나, 흙은 돌보다 날카롭게 축조되지 않기 때
문에 1장마다 3보를 줄인다는 설명을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하였다.121) 그러나 토성의 견
고함의 여부는 오로지 흙을 찧어서 축조하는 노력에 달려 있다.
재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기에 지금 경영하는 때에는
더욱 아껴 써야 한다. 그러나 만약 아껴 쓰는 것만 알아 무릇 역부役夫에게 임금을 주는
일과 값을 내고 물건을 사는 일에서 그 품삯을 박하게 한다면 사람들을 힘써 일하게 할 방
법이 없고, 사람들을 힘써 일하게 하는 방법만 얻으려고 심히 재물을 절약하지 않으면 필
시 일을 지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게 된다. 이에 마땅히 모든 일을 조처하는 방법을 십분
계획하여 그 비용을 줄이고 공은 배가 되도록 하는 방법에 힘써야 한다.
대저 역부의 하루 품삯은 25문文으로 본래 통용되는 규례이나, 근래에는 물가가 상승하
였기 때문에 역부들은 매번 품삯이 적은 것을 원망한다. 근면하고 성실한 이들은 모군募
軍122)이 되기 원하지 않고, 나태하고 불성실한 이들이 단지 무리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자
원하여 모군이 된다. 그 역役을 수행할 때도 모든 힘을 다하여 힘써 일할 마음이 없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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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생토生土: 물에 잘 풀리지 않거나 잘 이겨지지 않는 성질을 가진 흙을 말한다.
120) 【두주: 전성全城은 다 석회石灰를 사용하는데 도축擣築과 같은 식이라면 참으로 좋다. 그러나 석회는 실로 구하기 어렵기 때
문에 이런 방법을 쓴다.】
121) 【매 1장마다 3보를 줄인다는 것은 안쪽 면을 2보 반 줄여 안쪽을 평평하게 하는 방법이고, 바깥 면을 반 보 줄여서 바깥을 깍
듯이 하는 방법이다.】
122) 모군募軍: 성역城役과 같은 일에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잡역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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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시간을 보내는 것만 일삼으니, 비록 최선을 다해 감독하여도 둘러대고 책임을 면할 뿐
이니 결국 힘써 일하는 도리는 없게 된다.
지금 승군僧軍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부역을 지게 하며, 승려 중에 별도로 지혜와 기력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두 사람을 남북의 총섭摠攝123)으로 차임시켜 각각 주관하게 하고, 각
도의 사찰에서 5천 명의 건장한 승도僧徒124)를 뽑아 각자 영솔하여 부역하게 한다. 저들
은 모두 산속에 거주하며 자생한 무리들로 또한 그들의 몸과 마음이 합해지면 저절로 불
교의 기풍이 불 것이니, 허접한 이들로 모군한 것과 비교하면 일에 대한 태도가 마땅히 현
격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총섭이 승려에게 법령을 내리는 것은 관장官長이 모군에게 하
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뛰어날 것이다.
남북의 총섭에게 각각 5천 명의 승군을 이끌게 하고 경계에 분정分定시켜 각자 감독하게
한다. 미리 우열을 비교하여 상벌을 내린다는 영令을 반포한다면, 그 효과는 모군 2만 명
의 역役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본부에서 총섭에게 별도로 신칙하여 근실한 승도를 뽑아
패장牌將을 분정하고, 각 패牌마다 각각 역을 행하는 승려의 숫자를 정한다. 또 마땅히 성
지城址를 측량하고 파수把數로 경계를 정하여 각 패를 분속시키며, 또한 매번 파수한 양
에서 의당 그 축역築役의 품삯을 정하되, 일한 날짜로서 품삯을 지급하지 말아야 한다.【아
마도 대충 일하며 시간 때울 생각만 할 것이다.】 단지 파수를 따라 헤아려 그 값을 지급하
면 저들은 필시 자신의 일로 간주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이니, 이것이 기한에 맞춰 공적
을 이루는 방법이 될 것이다. 본부는 다만 패장을 분정하여 그들에게 견고하게 축조하는
지의 여부를 살피게 하여 그 감독하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125.) 또한 모군은 그 주식酒食의
수요에 있어서 하루에 24문文의 품삯도 오히려 부족할까 근심된다. 그러나 승군은 낭비
가 없고, 또한 파수로 품삯을 계산하여 정하고, 아울러 한 달 치 품삯을 지급하면 필시 쌀
로 바꿀 것이며, 밤낮으로 힘써 모군이 두 달간 수행할 역을 한 달 안에 충분히 마칠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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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총섭摠攝: 승려에게 내려졌던 직위로 본사本寺의 주지급主持給에 해당하는 책임자이다.
124) 【두주: 마땅히 건장한 승도를 모아야지, 반드시 5천 명의 숫자를 억지로 채울 필요는 없다.】
125) 【두주: 인원 수를 분배하여 급료를 정해 준 후에, 만약 10년 이내에 붕괴되는 일이 생기면 총섭總攝과 그때 불려와 축조한 승
군僧軍의 죄이니, 그들로 하여금 자비로 개축改築하게 하도록 절목을 만들어 대충대충 일을 끝내는 버릇을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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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에 소요되는 회탄灰炭과 제반 물종 중에 바다를 통해 운반되는 것은 모두 구포鳩浦
에서 내리는데, 구포와 부府의 거리는 30리이다. 그 운반하는 방책은 형편상 촌민의 우마
牛馬를 빌려 실어 나르고, 관인 4명이 나와서 그 과정을 감독하게 할 것이나, 필시 폐단을
일으킬 단서가 없을 수 없어 농민들이 두려워하게 된다. 기한에 맞춰 운반하더라도 또한
필시 원망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마땅히 구포 부근의 면에서 근실한 백성을 미리 모집
하여, 각각 전문 25량을 지급하고 우마를 사들여 때에 따라 운납하게 한다. 그리고 매 태
駄마다 30리로 원래 품삯을 정하고 태에 맞춰 제한다. 25량에 이르면 본전을 모두 채운
후이므로 사용했던 우마를 영구히 그들의 소유가 되게 하면, 백성들은 필시 자원하여 이
를 즐겁게 따를 것이니, 이것은 운반하는 데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 벽돌로 성을 축조하는데 벽돌은 모두 요凹자, 철凸자, 아亞자 모양으로 된 것을
사용하여 서로 맞물려 쌓아 축조한다. 그 때문에 성 전체가 곧 하나의 벽돌 형태를 이루
어 내・외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다. 우리나라는 벽돌을 제조하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
여, 간혹 벽돌을 구워도 견고하지 못하나, 진실로 벽돌을 제조하여 완벽하게 축조하면 오
히려 석성石城보다 나을 것이다. 아직 중국 제도의 요凹자, 아亞자 모양의 벽돌을 모방하
지 못하였니, 벽돌로 견고하게 지을 방법이 없으므로 반드시 벽돌 사이에 석회를 바른 뒤
에야 벽돌들이 밀착되고 맞물려 견고하게 된다. 가령 벽돌 하나의 두께가 1촌 5분【포백척
布帛尺을 쓴다.】이니 벽돌 40개를 쌓으면 6척【포백척이다.】이 된다. 벽돌 사이마다 모두
석회 2촌씩을 발라 다져서 축조한다. 또 벽돌들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또한 석회 2촌을 발
라 다져서 축조하면, 석회와 벽돌의 높이는 의당 포백척으로 14척이 되는데, 높이 14척은
너무 지나치므로 이를 적당히 가감한다. 이 방법대로만 오직 축조한다면 니회삼물泥灰三
物126)은 또한 법식에 따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벽돌을 제조하는 방식은【위쪽 넓이는 8촌 포백척, 아래쪽 넓이는 6촌】 길이가 1척 3촌이
고 높이가 1촌 5푼인데, 이에 의거하여 벽돌을 만들어 성의 지대에 우선 사용하고 작은 잡
석과 흙을 써서 견고하게 힘껏 두드린 다음, 그 위에 니회를 발라 2촌쯤의 두께로 두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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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니회삼물泥灰三物: 석회, 황토, 가는 모래를 섞어 만든 것으로, 축성할 때 일종의 접착제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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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다. 또 그 위에 벽돌을 배열하고 양쪽 벽돌 사이는 또한 2촌쯤 간격을 둔다. 이렇게 벽
돌을 배열하여 1층을 쌓은 후에, 또 니회를 2촌쯤 발라 석회로 양쪽 벽돌 사이를 견고하게
바르고 나면, 석회와 벽돌이 모두 일체를 이루고 오래도록 견고해진다. 매 층마다 이 방식
으로 연속하여 축조하는 것이 알맞다. 벽돌 중간의 간격을 좌우에서 1촌씩 줄인 것은 그
사이를 물에 이긴 석회와 돌로 잘 붙게 하려는 의도이다. 벽돌의 머리가 바로 성의 앞쪽에
있으면, 벽돌의 끝부분은 자연히 안쪽을 향하게 된다. 만약 벽돌 하나가 단지 성의 앞쪽으
로만 향하여 위로 연달아 쌓으면, 비록 니회와 합쳐져 일체를 이루더라도 큰 돌들이 맞부
딪쳐 쉽게 부서지거나 무너지는 염려가 있게 된다. 마땅히 벽돌 끝부분의 니회를 바를 곳
에 니회를 써서 흙에 붙여 견고하게 축조해야 벽돌사이에 니회를 발라 바위를 이루는 것
보다는 못하더라도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하영의 천일록 -- 관수만록 중에서....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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