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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접어들면서 남향의 도서관 건물은 더 밝고 따뜻해졌다. 어젯밤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가을비마저 거짓말처럼 개고, 열람실 탁자 위로 떨어지는 햇살은 막 헹궈 낸 빨래보다 더 정갈하다. 햇빛이 머무는 시간에 비례해서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잦아지고, 가을 들어 도서관은 더욱 바빠진다.
호남정맥의 한 줄기가 광주의 무등산을 지나 해남 땅끝(土末)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뻗어나가다 영암 월출산 못미쳐, 나주군 다도면과 봉황면 사이에 넉넉한 산세를 풀어놓으니 바로 덕룡산 자락이다. 백제의 고찰 불회사의 원래 이름은 불호사(佛護寺)였는데, 조선조 후기 세 차례에 걸친 큰 화재를 겪은 후 불회사(佛會寺)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젓하고 편안한 불회사 가을길 불회사의 가을 길은 요란하지 않다. 또한 선암사나 백양사의 진입로처럼 그렇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길도, 긴 여운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런 길도 아니다. 전라도닷컴의 남신희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허물없는 사이처럼 소박하게, 젖는 줄 모르고 젖는 가랑비처럼 그렇게 은근하게 마음 속에 안겨드는 풍경"으로 이어지는 호젓하고 편안한 그런 길일 뿐이다. 단풍철 행락 인파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 분들께 불회사의 호젓한 가을 길을 권하고 싶다.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해도 본성을 숨길 수 없는 투박하고 진솔한 얼굴의 할배 장승. 도톰한 볼에 둥근 입술과 부드러운 눈썹의 인자한 얼굴의 할매 장승. 모두가 평생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다가 뒷산 솔밭에 묻히신 우리 할배·할매 모습 그대로다. 덕룡산 너머 운흥사 장승과 함께 조선조 후기에 조성된 이 장승 부부는 장승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전으로 통한다. 리드미컬할 석축쌓기로 공간활용 극대화 전형적 산지 사찰인 불회사의 지형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지형에 사찰을 제대로 앉히려면 동향이어야 한다. 그런데 불회사는 남향으로 건물을 배치했다.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진입로에서는 건너편 불회사 본체 건물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찰의 정문 격인 진여문 정면에 바로 서서 사찰 내부를 바라보아도 여전히 거대한 대양루(大陽樓) 건물에 막혀 깊숙이 감춰진 사찰 내부는 좀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몇 편의 예고편만 보여줄 뿐 좀체로 본영화를 보여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불회사의 이런 공간 운영에는 설계자의 치밀한 계산과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출입구 격인 진여문 입구에 들어서면서 건물 배치가 한눈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주는 시선 차단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동시에 사람의 호기심을 붙잡아 방문객의 시선을 끝까지 건물 안으로 집중시키는 절묘한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의 음악처럼 경쾌한 건물 배치 불회사 건물 배치에서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후 좌우의 지형이 모두 높낮이가 달라 건물 배치가 쉽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자연 훼손을 극소화하면서 건물 배치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찰에서는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 사찰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불회사의 경우는 우측 산신각 쪽 지형이 주불을 모신 중앙의 대웅전 쪽 지형보다 더 높아 문제가 발생한다. 선택은 두 가지, 대웅전을 좀더 우측으로 밀거나 아니면 우측 지형을 깎아 인위적으로 대웅전 쪽 지형과 맞추는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훼손의 범위가 커지면서 동시에 사찰 전체의 동선까지 바꿔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저녁 해의 잔광이 그리움처럼 남아 있는 산사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따뜻한 불빛이 그리운 저녁, 마흔 아홉 만추(晩秋)의 쓸쓸함과 적막함을 서둘러 챙겨 어둠이 낮게 깔린 산문을 나선다.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황동규의 <시월>에서 |
첫댓글 고풍스럽고 아늑한 분위기에 며칠 쯤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스크랩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