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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은
오는 6월 30일부터 9월 1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동아일보사와 공동으로 <보테로 展>을 개최합니다.
본 전시에는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의 92점의 회화 및 조각 작품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선보입니다
1. 전시개요
전시명 : <보테로 展>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
전시일 : 2009년 6월 30일 ~ 9월 17일 (80일간)
※ 개막식 : 6월 29일(월) 오후 5시
주 최 : 국립현대미술관, MBC, 동아일보
작 품 :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의 회화 89점 및 조각 3점
협 찬 : SK네트웍스, 한진해운
홈페이지 : http://botero.moca.go.kr (6월 초 open예정)
2. 작가 및 전시소개
풍만한 형태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는
20세기 현대인의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는 신구상주의 화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작품에 주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비대한 형태는 감성적이고 따뜻한 색채와 함께 충만한 감성을 자극한다. 생동감과 따뜻함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에는 때로는 풍자와 비판의 시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 단순한 형상을 넘어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보테로 展>에 소개되는 92점의 회화 및 조각 작품은 1960년대부터 이어진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작가의 40년간에 걸친 작품 활동 전체를 보여주는 이번 컬렉션에는 보테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과 근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작가의 최근 경향뿐 아니라 조형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매우 값진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전시에는 또한 유럽 예술에 대한 보테로의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초상에서부터
프랑스에서의 비제 르브룅(Vige Lebrun, 1755-1842)과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고전에 대한 광범위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보테로는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첫 전시회를 가진 그는 1950년 유럽을 방문한 후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거장들의 작품과
이탈리아 여행 중 접한 프레스코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작품 안에서 그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조롱하는 동시에 삶을 찬양하는 풍만한 형상들 특히 과장된 크기로
부풀려진 인물과 자연 풍경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오브제들을 병치한다.
동시에 유년시절을 보낸 콜롬비아의 토속적 요소들을 기반으로 벨라스케스, 고야,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함으로서 지역적 요소와 보편적 요소들의 결합을 시도한다.
특히 반다이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벨라스케스와 같은 유명한 작가의 그림을 특유의 통통한 인물상으로 바꾸어
미술의 권위주의적 모습을 해체하고 친근감을 불러일으킨 일련의 패러디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오늘날에도 유머의 기조를
잃지 않은 채 다양한 현대인의 군상을 화폭에 펼쳐내고 있다.
전시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92점의 회화 및 조각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1전시실에는 풍성한 과일과 꽃을 주제로 한 정물 작품들과 유럽의 거장들의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2전시실과 3전시실에는 보테로의 콜롬비아에서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라틴의 거리, 공공장소 등의 풍경작품과 실내를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4전시실에는 1980년대 제작된 투우시리즈와 1990년대 이후 제작된 서커스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마지막으로 당당한 풍채의 기념비적인 브론즈 조각 작품들이 덕수궁 내 야외 조각 정원에 설치된다.
3. 전시구성
<보테로 展>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92점의 회화 및 조각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 제 1전시실 : 정물 & 고전의 해석
• 제 2전시실 : 라틴의 삶
• 제 3전시실 : 라틴 사람들
• 제 4전시실 : 투우 & 서커스
• 야외 조각 작품
4.부대행사
• 개막식 : 2009년 6월 29일(월) 오후 5시
• 페르난도 보테로와 함께하는 ‘작가와의 대화’
• 라틴문화관련 강연회
• 라틴 댄스 및 음악회
•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1932-) 그는 누구인가
( 작가의 약력을 참고하고 가시면 전시관람에 도움이 됩니다 )
Fernando Botero_약력
1932
페르난도 보테로 앵글로는 4월19일 안데스 산에 위치한 안티오키아주의 상업중심지인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 모두 콜롬비아 출신으로 그의 부친 데이비드 보테로는 조랑말로 행상하며 생활을 영위하는 행상이었고
페르난도가 4세 되던 해 사망했다. 그에게는 데이비드와 로드리고,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1938-1949
보테로는 메데인의 소학교를 다니며 장학금을 받아 예수회 중학교에서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숙부의 권유로 12세 때 메데인의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니게 되나 정작 그는 투우사를 그리는 데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로인해 보테로의 초창기 그림들은 주로 투우장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첫 번째로 수상한 수채화 작품은 투우사작품
이었다.
1948년에 보테로의 작품이 메데인의 미술연구소에서 개최되었던 그룹전에 출품 된다,
16세가 되던 해에 메데인의 주요 일간지인 ‘엘 콜롬비아노'의 일요일판에 삽화를 그려 개제하기 시작한다.
멕시코의 벽화가 들이자 그 당시 보테로의 미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던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크레멘테 오로스코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어릴적 부터 교회나 수도원의 식민지시대의 콜롬비아 바로크 미술양식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콜롬비아에선 자유당과 보수파 간의 내전이 일어난다.
이 시기에 페드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블로 네루다, 미겔 아스투리아스와 같은 지식인들이 발굴되었다.
보테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인 비평가 줄리오 페이로가 쓴 현대 미술 역사 중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다.
‘엘 콜롬비아노’지에 나체 대생을 게제해 교장에게 훈계를 받으며 ‘피카소와 예술에 있어서 비국교도’라는 논문으로
퇴교처분을 받는다.
1950-1952
마리라 근교에 위치한 리세오산호세에 입학한다.
신문에 삽화를 개제하며 등록금을 벌어 1950년 학교를 마친다.
학교를 떠난 후 2달 동안 스페인 극단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 한다.
1952
1952년 1월, 수도 보고타로 상경하여 아방가르드의 유파에 합류한다.
멤버 중에는 작가인 호르세 살라메아와 가르시아 로르카의 친구인 전 멕시코 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보테로를 비롯한 다른 예술가들은 그 당시 미술흐름을 비롯해 추상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한다.
5월경 캐러비안 해안에서 지내며 만든 작품들을 레오마티즈 화랑에서 선보인다.
세달 후 ‘On the Coast'라는 작품으로 콜롬비아 살롱에서 2등을 수상한다.
상금 7,000페소를 받은 보테로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1952년 8월에 피카소가 그의 어린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몇일 후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겨 아카데미아 산 마르코에 입학한다.
그는 프라도 미술관의 대작들을 공부하며 벨라스케즈나 고야와 같은 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그 당시 보테로는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대작들의 모사 작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회상하기를 “그 당시 미술학도들은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반면에 나에게는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일 순위였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보테로는 파리로 떠나 루브르에서 대작들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다.
1953
여름을 파리에서 보낸 후 이태리의 플로랜스로 거처를 옮긴 보테로는 아카데마아 산 마르코에 입학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태시즘 화법이 유행하여 보테로 역시 죠트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르네상스 화가들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 후 곧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법인 프레스코화의 기법에 매료되어 직접 유화 작품을 시도한다.
오토바이로 북이탈리아의 시에나, 베네치아, 베니스와 같은 이탈리아 예술문화의 중심지를 여행 한다.
1954
1954년 봄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파블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마사치오와 같은
르네상스 페인팅 작가들의 전시와 프레스코화를 보기 위해 떠난다.
특히 이당시 보테로의 작품 중 ‘Departure'의 말들은 우첼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5
프로랜스에서 지내는 동안 만든 20점의 작품들이 전시 된다.
전시는 악평으로 끝나고 생활을 위해 2개월간 잡지 레이아웃을 그리며 생활한다.
12월에 글로리아 세아와 결혼한다.
1956
보테로 부부는 멕시코로 이사하여 첫 번째 아들을 낳는다. ‘Still Life with Mandorin'을 그리고 있던 당시
보테로만의 특징이 되는 과장되게 부풀려진 형태의 특징을 잡게 된다.
1957
4월경 판 아메리칸 유니온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을 위해 워싱턴으로 간다.
그곳에서 후에 보테로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 줄 타니아 그레스를 만나게 된다.
10월에 작품 ‘Counterpoint'로 콜롬비아 살롱의 2등상을 수상한다.
1958
보고타의 국립미술대학을 수학하며 그의 명성은 콜롬비아의 중요한 젊은 예술가로 서서히 알려진다.
만테냐의 프레스코화를 재해석한 ‘Camera delgli Sposi'를 제 11회 콜롬비아 살롱에 출품하지만 심사위원회에 의해
거부된다. 하지만 보고타의 미술 비평가들과 언론의 항의로 재심사가 이루어져 결국 수상하게 된다.
10월에 미국 워싱턴의 그레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지며 거의 모든 작품이 팔리는 결과를 낳는 성공을 거둔다.
같은 해 뉴욕의 구겐하임 국제 전시회에 참가 한다.
1959
제 12회 콜롬비아 살롱에서 보테로는 'The Apotheosis of Ramon Moyos'를 출품한다.
벨라스케즈를 연구하고 ‘Nino de Vallecas'를 통해 보테로 특유의 볼륨을 가진 양식과 뉴욕의 추상주의 필치의 조화를
보여준다.
1960
2달간 보테로는 메데인의 중앙은행의 위임 하에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였다.
콜롬비아 출신인 미술비평가 마타 트라다를 포함한 위원회는 그를 멕시코 비엔날레의 콜롬비아 대표 작가로 선출 하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보테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반감을 낳기도 했다.
10월에 보테로는 그레스 갤러리에서의 그의 두 번째 전시를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다.
그는 당시 추상 표현주위가 유행하던 뉴욕으로 이동한다.
그레스 갤러리가 문을 닫음으로서 그의 중요한 후원자를 잃게 된다.
그의 부인 글로리아 세아와 결별한다.
1961
보고타의 El Callejan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뉴욕근대미술관은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의 추천으로 보테로의 첫 번째 버전 ‘Mona Lisa, Age 12'를 구입한다.
1964
세실리아 산브리노와 결혼한다.
‘Apples'가 보고타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인터 콜(intercol) 주최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다.
1965
‘The Pinzon Family'의 완성으로 보테로의 특징적인 양식이 성숙된다.
실질적인 형식의 그의 초기 작품은 점차 정교하고 장식적인 색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그는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가인 피터 폴 루벤스에 대해 연구하며 네 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1966
1월 보테로의 개인전이 바덴바덴의 주립미술관에서 열리고 독일의 다른 도시들을 순회한다.
전시는 후에 뮌헨의 부흐홀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9월에는 하노버의 부르스버그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선별된 몇몇 작품이 더 선보인다.
밀워키예술센터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이 열리며 타임지에 극찬하는 기사가 실린다.
1967
보테로는 이태리와 독일에 머물며 그곳의 미술양식을 공부한다.
시리즈 목탄화인'Dureroboteros' 을 완성한다.
독일을 방문한 후에 보테로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에 매료된다.
그 해 프랑스 인상파인 에드아르드 마네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보나르의 목욕하는 여인을 재해석한 시리즈를 완성한다.
보테로가 말하기를 “모든 것들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리는 그 모든 것에 라틴 아메라카의 정신이 스며있기를 바란다.”
1969
3월에 선별된 몇몇의 작품들과 큰 포맷의 목탄 스케치들이 미대륙 관계를 위한 뉴욕센터에서 전시된다.
9월에는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가 열린다.
1970-1971
80점의 유화작품이 바덴바덴,베를린,뒤셀도르프,함부르크,비레페르크등 독일 각 도시의 주요 미술관을 순회한다.
파리, 보고타, 뉴욕에서 생활하며 같은 해 조각 작업을 시작한다.
1972
2월에 뉴욕의 말보로 갤러리에서 첫 번째 전시를 연다.
같은 해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에서 전시회를 열며 독일박물관의 주최 하에 전시회를 준비한다.
파리의 작업실을 옮기며 보고타에 북쪽 카히카에 여름별장을 마련하여 현재까지 그곳에서 때때로 시간을 보낸다.
1973
뉴욕을 떠나 파리에서의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첫 번째 조각 작품을 완성한다.
1974
보고타에서 1948년부터 1972년까지 그의 작품들을 모아 회고전을 연다.
자동차 사고로 4살인 둘째아들 페드로를 잃는다.
이 비극적인 사고로 이후의 보테로의 회화 및 조각에 있어 아들상 제작의 동기가 된다.
1975
세실리아 산브라노와 이혼한다.
1976
보테로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앙드레스 베로 훈장을 받는다.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는 보테로의 큰 포맷의 수채화와 스케치 전시를 연다.
같은 해 보테로는 조각에 전념하기 시작해 토루소와 고양이, 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재를 이용한 25점의 조각을
제작한다.
그리스인 조각가인 소피아 바리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1977
콜롬비아 미술에 대한 봉사가 인정 되 안티오키아 주정부로부터 보야카 십자훈장이 증여된다.
메데인의 제아미술관이 ‘페드로보테로의 공간’이라는 명칭을 가진 새로운 방을 개설하여 보테로가 아들에게 바친
열 여섯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파리의 끌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조각을 발표한다
1978
파리의 아뜰리에를 과거 아카데미 쥴리앙이 있었던 드래곤 거리로 옮겨 다시 회화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1979-1981
벨기에,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에서의 순회전이 이루어진다.
1979년 미국에서의 첫 번째 회고전이 워싱턴의 허션조각미술관에서 열린다.
바젤의 바이엘러 갤러리에서 수채화 및 조각 작품이 선보인다.
1980
엘티엠포에 삽화와 함께 짧은 글을 개제하기도 한다.
1981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처음으로 회고전이 열린다. 로마의 Ⅱ Gavviano gallery에서 수채화 및 드로잉이 선보인다.
1983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Dance in Columbia'를 구입한다.
월간지 베니티페어 첫 호에 가르시아 마르케즈의 ‘Chronicle of a Death Foretold'을 위한 삽화를 그려 넣는다.
투스카니의 작은 마을에 조각실을 마련해 놓고 후에 매년 조각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1984
메데인의 안티오키아미술관에 페르난도 보테로의 조각 공간 상설을 위해 작품을 기증한다.
보테로는 같은 시기에 보고타의 국립 박물관에 18점의 회화를 기증한다.
투우를 주제로 2년에 걸친 회화 연작을 시작한다.
보테로는 스페인식 투우라는 주제에 관한 독보적인 작가가 되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투우를 보았을때 자동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떠올리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985
뉴욕의 말보로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25점의 다양한 투우사의 유채화들이 선보인다.
같은 해 푸에르토 리코의 폰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이 선보인다.
1986
1월 카라카스에서 최근 4년간의 작품들을 모은 소묘 전을 시작으로 뮌헨, 그레멘, 프랑크푸르트, 마드리드,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의 회고전이 이어진다.
1987
12월 밀라노의 스포르체크성에서 투우를 주제로 한 유화, 수채화, 소묘 등의 86점의 개인전이 열린다.
1988
‘La Corrida'가 나폴리의 오보성, 파레르모의 알베르고 델 포레베를 순회한다.
여름에는 벨기에의 카지오 쿠녹케에서 회고전을 가진다.
1989
‘La Corrida'가 베네주엘라의 코로미술관, 카라카스의 현대미술관, 멕시코의 루피노타마요미술관을 순회한다.
로스엔젤레스 미술 박람회에 조각을 출품한다.
1990
스위스의 마르티니에서 피에르 지아나다 재단이 유화, 수채화, 소묘, 조각 회고전을 개최한다.
뉴욕의 말보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다.
1991-1992
로마의 에스포지오니 궁전, 모테카를로의 카지노,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조각 전시를 한다.
보테로는 샹젤리제에 작품을 전시한 최초의 외국인 이기도 했다.
1993
뉴욕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미술단의 개최로 보테로의 재표 조각 16점이 파크 애비뉴에 설치된다.
'Maternity', 'Woman with Mirror', 'Cat', 'Bird', 'Reclining Venus'과 같은 작품들이 뉴욕의 가장 유명한 거리인
파크 애비뉴에 설치되고 센트럴파크에 'Adam and Eve'가 전시되었다.
1994
봄, 여름동안 시카고의 미시간 애비뉴에 ‘Botero in Chicago'라는 제목으로 조각전시가 열린다.
동시에 마드리드시에서 주최한 옥외 대형 조각전이 파세오 데 레코르토스에서 개최된다.
같은 해 보테로는 보고타에 납치될 뻔하다 간신히 탈출한다.
1995
메데인에서의 폭탄 폭발 사고로 조각품 ‘Bird'가 부셔진다.
이 사고로 23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메데인은 약물거래의가 빈번히 일어나며 테러리스트들의 내분의 중심지에 이르게 된다.
보테로는 그의 비둘기 조각을 부셔진 작품 ’Bird' 옆에 배치한다.
이로서 “문화, 노력, 그리도 평화”를 외치며 약물과 폭력으로부터 그의 조국이 한걸음 나아가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1996-1997
보테로의 조각들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과 칠레의 산티에고등지에서 전시된다.
1998
몬테비데오, 몬트레이, 멕시코등의 중남미를 도는 대규모의 순회전을 가진다.
1999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초청을 받아 시뇨리아 광장에서 30점의 기념비적인 조각품들을 전시한다. 그 외 작은 조각들이나 유화작품들은 베키오 궁전에 배치된다. 그의 작품은 첼리니, 지암볼로냐, 미켈란젤로와 같은 대가의 작품 옆에 설치된다.
2000
보테로는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메데인에 위치한 두 곳의 미물관에 다량의 그의 작품들을 기증한다.
그는 어릴 적을 회상하며 콜롬비아 미물관에 대가들의 원작대신 흑백의 모조 작 들을 관람 했던 일을 기억하며
기증을 결심한다.
콜렉션에는 조각,회화를 포함한 보테로 자신의 작품 200여점 이상과 피카소,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드가,
투르즈로트렉, 마티즈, 샤갈, 미로, 클림트, 달리, 헨리무어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도 100점이상 기증되었다.
2001
멕시코시티에서 ‘50Aaos de Vida Artistica'라는 전시 제목으로 보테로의 50년 미술인생을 돌아보는 전시를 기획 한다.
같은 해 뉴욕 말보로 갤러리에서 보테로의 대형 봄 전시를 준비한다.
2001년 가을 보테로는 스톡홀름의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중요 작 70점을 전시한다.
2002
스톡홀름미술관에서의 전시를 2002년 1월 13일 까지 이어간다. 그 후 전시는 코펜하겐의 아르켄 미술관으로 옮겨간다.
2003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박물관에서 유화, 파스텔, 조각등 다수의 작품이 전시된다.
베니스에서 그랜드운하를 따라 조각 작품이 전시된다. 파리의 뮤제 마욜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2004
보테로는 이라크의 ‘아부그랩‘ 감옥에서의 죄수들에 대한 대우에 관한 뉴스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시리즈의 작업을
시작한다. 회고전이 싱가폴 미술관에서 열린다.
2005
로마의 베니치아 궁전에서 ‘아부그랩‘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인다.
2006
독일의 슈베비쉬할에 위치한 쿤스트할레뷔르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콜롬비아에 머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보테로는 파리, 뉴욕, 몬테카를로, 피에트라산타에 거주지를 마련한다.
2007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국제아트서비스의 주최로 미국 순회전을 가진다.
전시는 퀘백의 보자르 미술관에서 시작하여 2007년 1월27일부터 2011년 12월6일 까지 9곳의 미국 주요 게최 예정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밀라노 팔라조 궁전에서 전시가 열린다.
홈페이지 : http://botero.moca.go.kr
(6월 초 open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