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공단동 111번지 금오공업고등학교
내가 구미에 첫발을 디딘것은 1977년 3월(정확히는 1976년 10월에 시험보러..) 날짜는 기억이 흐미..
전국의 중학교에서 많은 인재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금까마귀의 허울을 쓰고
17살 까까머리의 소년들의 고향을 떠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말이 학교지 일주일에 두시간씩 힘에도 겨운 M1소총을 메고 군사학을 배우고 아침,저녁점호를 받는
군생활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학과보다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각개전투, 총검술 논산훈련소의 개념이
더 중요시하는 교육체제였다.
1학년때는 1년선배의 눈치소에두 3학년 선배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보냈지만 행복은 거기까지.....
2학년 그 1년은 지천명이 넘은 지금도 기억하기 싫은 글자 그대로 애증의 세월이었다.
매일 밤마다 치뤄야했던 선배들의 이유없는 폭력?(맞아본 남자들만 안다. 청테이핑된 PVC파이프, 햄머자루)
단하루도 그런 행사?를 치루지 않으면 밤새 두려움에 떨고 잠못이루었지....
여름방학때마다 2주일씩의 군부대 입소 그리고 여의도광장 국군의날 행사(사열)를 위해 뜨거운 아스팔트위의
군용천막에서 1달간의 합숙훈련...
3학년이 되면 후배들에 대한 치열한 복수?를 꿈꾸며 있었지만 내가 3학년이 되고는 졸업후의 군복무(하사관
60개월)의 짓누름에 밤마다 월담을 해서 구멍가게에서 두부한모에 4흡들이 이슬이를 마셔야 했던 방황의 날들
졸업하면 두번다시 뒤돌아보지 않겠다던 그곳!! 세월이 흘러 졸업20주년 행사에 내 미운 오리새끼를 데리고
다시 찾았을때 참 서럽게도 울었다. 오리는 영문도 모른채 따라 울고...
구미 제2의 고향 그곳에서의 3년은 자서전 1권을 쓰고도 모자랄 만큼의 좋은 기억보다는 애증의 역사다.
금오산 정산이 공지되었을때 많은 고민아닌 고민을 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 내가 언제 다시 그곳을 가게될까 늘 반겨주시는 산우님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기에 소심남의 애증은
묻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산행내내 가슴 한켠에는 울컥 울컥하는 뜨거운 무언가가 떠나질 않았다.
아 제2의 고향!! 애증의 세월! 아마두 졸업 50주년 즈음에 백발의 동창들과 해후가 있을때 그곳을 다시
찾게되지 싶다.
사설이 길어 죄송합니다
첫댓글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까정은`~~
고생하셨네여`~~~
글치만 그것도~~~이제는 추억으로 ` `돌려야 할,````
잘읽고 ,,잘 보구 갑니다,,
애증도 이제는 지나간 과거일뿐 추억으로 기억해야함에도 아직은
예전의 추억이 있는
구미 였군요.
제복에 단화신구 법성사가는 포장도로를 행군하듯이 소풍을 갔고 비가와도 뛰지몬하구도 있는곳
비에젖은 생쥐가 됬던 추억
성공나라님과
소심남님
형제같네요.....
하늘아래 한집에 동거사건이후 그렇게 되었다우
같이 산행하면서 옜이야기 듣고 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실은 사진 올리면서두 눈시울이 촉촉 넘 감상적인가 암튼 소심남에겐 특한 곳
아픈기억.이번금오산행에다버리고오셨지요???
다였음 좋겠지만 인생의 업보처럼 가야할 부분도 있겠쥬
아.. 그 유명한 금오공고 출신이시네요.. 중학교에서 1등만 학교장추천으로 들어가던 학교... 학비, 기숙사비 전액무료, 취업보장 현란한문구가 늘 따라다녔죠..
모두들 그때는 거기가는게 선망의 대상이었죠.. 이제보니 대한민국의 영재였었네요.. 그러고 보니 저하고 닮은데가 있어요... 그중에 어찌 눈이 닮았을까..ㅋㅋ
하 하 하
아름다운 추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페이지로 넘겨버리세요ㅡㅡ
멋진사진 담으시느라 수고많으셨어요ㅡㅡ감사드려요
그시절 애증보다는 현실의 산우님들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요
그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멋진 사나이로 거듭나지 않았겠나
구미에서의 잊지못할아픔이...하지만 생각하기나름 추억에 묻어두고 나름 즐거운일만 생각하시게나...
생활하는동안 분명나쁜일만있었던건아닐꺼야...이번을계기로 좋은추억을 발췌해보도록...
넵!! 세상만사 모두 뜻대로 되었다면 지금의 소중한 인연도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