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山河)의 만물(萬物)들은 봄맞이가 한창입니다. 대나무 아래 차나무도 봄꿈을 깨었을까요? 이미 바닥난 차 통을 안고 이리저리 궁리해 봅니다. 햇차가 나오려면 아직도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 슬며시 조바심도 일어납니다. 기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춘궁기(春窮期)는 지금부터 시작이지요. 저도 햇차가 나기도 전인데 벌써 차 통이 텅 비어 있습니다. 절약한다고 했는데도, 일 년을 넉넉히 보내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차가 떨어져 며칠 동안 차를 거르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루 이틀 견디다 못해 묵은 찻잎을 조금 낡은 다관(茶罐)에 넣고 뜨거운 탕수를 부었다가 마시는 것으로, 그야말로 빈 다관에 물을 부어 다관을 우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금은 황당한 일처럼 생각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지요. 그래도 달착지근한 차 맛이 청아합니다. 은은한 차향이 살짝 들어 그 기품 역시 담담하기만 합니다. 순일한 이 맛에 기미(氣味)를 살린다면 훌륭한 차 품이 되겠지요? 마치 여백이 넉넉한 담담한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처럼, 차의 은미(隱微)한 경지는 아마 이 정도이면 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얼마 후면 햇 차를 만듭니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진정 차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그래도 햇녹차의 짙은 향을 여유를 갖고 마음껏 마셔보고 싶습니다. 해마다 4월 중순, 곡우(4월 20일) 무렵이 되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옆 화개장터, 벚꽃이 '우수수' 진 자리에는 차향(茶香)이 그윽하게 번져옵니다. 곡우 이전에 따 '우전차(雨前茶)'로 불리는 국산 최고급 녹차가 하나 둘 출하되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의 차 애호가들이 한해 내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입니다.
'지리산 명차원 찾아 오시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