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불세례
'세례를 주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밥티조( )의 원래의 뜻은 '물에 담그다'라는 뜻이다. 이는 쇠를 담금질할 때 사용된 말로서 뜨거운 쇠를 두드려서 모양을 만든 후에 물에 식히기 위하여 물에 담그는 동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세례(洗禮)라 함은 '물로 씻는다'라는 뜻이므로 원래의 뜻인 '물에 담그다'와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침례(浸禮)를 주다'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될 것이다.
또한 당시에 베풀던 원래의 형식이 '침례'였다는 사실(요 3:23)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밥티조라는 동사가 명사로는 밥티스마( )가 되며 세례자(침례자)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될 때는 밥티스테스( )가 된다. 세례 요한은 밥티스테스 요안네스( )로서 세례자(침례자) 요한이라고 번역해야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침례' 즉 '물속에 들어감'의 뜻은 무엇인가?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롬 6:3-4에서 말씀하듯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침(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상징적 행위라고 가르친다.
골 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함으로써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로 보더라도 '세례' 즉 '물로 씻음'이란 표현이 사망을 상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속에 잠긴다'는 뜻의 '침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침(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이는 곧 죄 사함의 상징이다. 결국 '침례'는 벧전 3:21의 말씀대로 '구원하는 표'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침례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파는 '세례'의 형식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침례교를 제외한 나머지 교회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엡 5:26에서 말씀하는 '물로 씻음'을 '세례'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아무튼 '세례'는 '침례'의 오역이지만 교회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오래된 전통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세례'라는 표현을 그대로 인정하여 '침(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교회에서 '세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사용한다면 신앙이 왜곡되거나 하기까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불세례란>
사람들이 흔히 불세례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면 불세례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불세례라는 말은 마 3:11과 눅 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불세례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 성령체험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앞의 두 곳의 성경 본문에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에서 '성령과 불로'라는 표현을 흔히 '성령과 동시에 불로'라는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성령'과 '불'로 동시에 세례 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성령불' 또는 '불성령' 등의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성령 받으라'는 말을 '불 받으라'는 말로 바꾸기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과 '불'은 함께 받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 )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의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간혹 우위 접속사인 '또는 (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 )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행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으며 행 11:16과 고전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령으로 세례'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 )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심판을 상징하는 불>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한다. 불은 헬라어로 퓌르( )인데 성경에서 퓌르는 예외 없이 심판을 통한 형벌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심판이라 함은 종말의 최후 정점에서 신 불신간에 단회적으로 받게될 최후의 심판(광의적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별로 받는 정죄의 심판(협의적 심판)을 뜻한다.
이는 요 3:18의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할 때 '정죄를 받는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즉 이미 심판받았다라는 말씀은 정죄받기로 정해졌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는 불로 태워지는 운명이 되어 최후 정점의 심판 때 시행되리라는 것이다.
불이 심판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눅 3:17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쭉정이'가 '불'에 태워질 것이라는 비유로 볼 때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마 3:12에서도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장 구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 안에서 침(세)례를 주신다'라고만 되어서 '불'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불'의 의미를 설명하는 '쭉정이를 불에 태우신다'라고 하는 비유 역시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불'에 대한 해석이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복음서에는 마 3:12과 눅 3:17에서 각각 쭉정이를 불에 태우는 비유가 덧붙여 진 것이다. 즉 '불'은 쭉정이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에서 신자는 알곡이므로 불과는 관계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마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세상 끝에 가라지를 불사른다'라고 할 때의 '불' 역시 '심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불이 심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 구절은 많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할 때 불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행 2:3에서 성령 강림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여'라는 말씀에서 혹자들이 잘못 인용하여 성령과 불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도 보게 되는데 이는 문맥을 잘 살피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령이 불과 같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불의 혀'의 수없이 갈라진 형상을 비유하여 한 성령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서 임하신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성령'은 '불의 뜨거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불의 혀의 갈라지는 모양'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보인다고 한 것도 물질이 아니신 하나님의 영이 보일 리 없건만 '영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호라오( )는 주로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것을 보는 것(마 26:64, 행 7:55-56)을 뜻한다. 눈으로 물질을 보는 것을 뜻할 때는 블레포( )라는 동사가 주로 사용된다.
한편 구약에서도 단 7:9-11에서 알 수 있듯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 그 밖에 출 3:2의 떨기나무의 불꽃과 렘 5:14의 하나님의 말씀의 불과 렘 23:29의 불같은 말씀과 방망이 등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의 뜨거운 속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는 모두 물질적인 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떨기나무 불꽃은 불꽃의 극히 밝고 빛나는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성경에서 뜨거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눅 24:32)와 서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을 때뿐으로 이상으로 볼 때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불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뜻 그대로라면 심판을 받게 해달라는 말이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찬송 부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다 아시므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가질 필요도 없고 사사 시대처럼 각자의 생각에 좋은 대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면 된다(삿 21:25)는 말과 같다.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변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다면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간혹 간증집 등에는,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던 중에 '뜨거운 불세례를 받았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불세례를 받고 뜨거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라고 간증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정말 뜨거움을 맛보았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정죄의 불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성령 받을 때 뜨거움을 느꼈다고 가르친 구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험을 하였다면 성경과는 무관한 기묘한 체험이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성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뜨거움은 물질적인 뜨거움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이며 내적인 뜨거움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또한 열정과 희열 같은 뜨거움을 주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