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요 독립운동 사적지
1. 광주광역시
■ 이기손 의병장 생가터
◎ 현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산동 109번지 ◎ 옛주소 : 전남 광산군 본량면 북산리 110 ◎ 사적지 : 한말 의병장 이기손 李起巽, 1877~1937 의 생가터
이기손은 오준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국운이 쇄하자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7년 황제 폐위 및 군대 해산이 모두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것임을 알고 광산·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스스로 의병장이 된 이기손은 의병을 이끌고 진도·완도 연안의 외적을 격퇴시켰다. 이어서 장성의 기삼연
의병부대의 부장 전해산·김죽봉과 상의하여 호남의 서부지방 즉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었다. 일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으로 의병의 무장을 마친 이기손은 본격적인 의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노획하였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병을 사살하였다.
이어 전남 무안군 지도에 설치한 일본군 해군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군을 섬멸하였다. 또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1908년 이후 병력과 장비를 증강시킨 적의 의병 토벌대와 접전하기에는 중과부적이므로 의병을 해산시켰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 사촌沙村에서 패전한 후 전해산 의병부대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錦山에 은신하였다. 그후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동안 그의 가족 중 2남은 옥고로 인하여 사망했고 부인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15년에 귀국하여 충청도 금산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생가는 한말에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멸실된 상태이다.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 전적지
◎ 현주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 사적지 : 한말 호남의병의 주요 근거지이자 전적지
각종 역사자료는 기삼연·심남일沈南一·김율金律·김태원金泰元·오성술吳成述·전해산·조경환曺京煥 등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장과 의병부대들이 어등산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등산이 한말 호남의병의 본거지였으며 수많은 의병들의 순국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으로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의병들은 광주·나주·장성·함평 등의 군 경계에 있는 산을 주로 이용했다.
어등산은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애매하여 일본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또한 어등산은 ‘비산비야非山非野’여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했을 것이다. 거기에 그 주변에서는 어등산338.7m)가장 높은 산이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형적으로 유리한 사항이 참작되어 의병들이 자주 이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피체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雲水洞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梁東煥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한말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이다. 이외에도 의병
장 박처인朴處仁 4형제의 고향이 어등산 주변인 고룡면 장교 부근이고, 의병장 김율이 붙잡힌 광주군 소지면 신기리 정동도 어등산 인근이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金元範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김원범의 형 김원국金元國은 어등산 지역의 선암리에서 의병장 조경환과 만난 후 의병에 투신하였다. 즉 광주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어등산과 직·간접의 관련이 있다.
■ 광주 3·1만세운동 주도 학교
◎ 옛주소 : 광주시 북구 모룡대길 30 ◎ 현주소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56 수피아여자 중·고등학교 ◎ 사적지 :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학생들이 다닌 학교
광주에는 개화기 때부터 개신교가 선교를 시작하였고, 1908년 숭일학교와 광주여학교1911년 수피아여학교, 현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19년 3월 5일 밤 광주 양림동 남궁혁의 집에서 김강숭일학교 교사·최병준·황상호·강석봉·한길상·최한영·최영균·김용규·서정희·김태열·홍승애 등이 회합을 갖고 3월 8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준비와 연락관계로 거사일은 3월 10일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양림동쪽에서는 기독교 신자들과 숭일·수피아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일반시민은 서문통현 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으로,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현 우체국 옆 충장로 2가에서 충장파출소까지을 거쳐 모여들었다. 시위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지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모두 호응하여 온
시장이 만세소리로 가득하였다. 시위행렬은 서문을 지나 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지금의 충장로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구법원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으며 그 자리에서 100여 명이 구금되었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오후 5시쯤 숭일학생과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00명 가량의 군중이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돌면서 시위를 하였다. 이날도 23명
이 체포당하였다.
3월 10일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른 수피아 여학생 박순애, 이태옥·김양순·윤혈녀·김덕순·조옥희·이금봉·하영자·강화선·이라혈·최수향·김만순·홍순해 등 23명을 추모하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동상’1995년 5월 10일 건립이 수피아여고 후문 안에 있다.
■ 광주학생운동 주도 학교
◎ 옛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장동 39-12번지 ◎ 현주소 :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144 ◎ 사적지 :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 및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로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민족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태동은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성진회·독서회·소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체들은 동료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제에 항거하여 몇 차례의 동맹휴학을 강행하면서 단결력을 키웠다. 이러한 독립의식과 단결력이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에서 발생한 한국인 여학생 희롱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의 항일시위를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194개교 5만 4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 항쟁으로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의 희생자를 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는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현재 전남여자고등학교이다. 광주공립농업학교는 북구 임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택지로 변하였고,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는 현재
의 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이 가운데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의 일부가 기념물 제26호1999년 4월 10일 지정이다. 제일고등학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1954년 건립,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1959년 건립가 있다.
2. 전라북도
1) 전주시
■ 전주 3·1만세운동 발상지
◎ 현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 매곡교 부근 ◎ 사적지 : 1919년 3월 13일 전주 3·1운동이 시작된 곳
전주에서는 천도교와 기독교측이 협의, 3월 13일 전주장날 만세운동을 시작하기로 계획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전주 화산동 김종곤의 집에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천도교측에서도 교구실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3일 기전학생인 최경애·최금수·함연춘·정복수·송순이 등과 신흥학생인 고형진·김병학 등이 완산교와 전주교 건너 등지에서 시장을 향하여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
다. 신흥학교와 기전학생들을 선두로 천도교·기독교계 지도자들과 150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장 부근부터 제2보통학교 교정 부근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행진은 대화정현 전동을 지나 중심가인 우편국우체국앞에 이르렀는데 일본 경찰의 저지선과 부딪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위는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날 300여 명이 체포·구금당하였다. 그날 오후 두 번째 만세운동을 펼쳐 완산정 너머 김제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약 300명의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 2정목현 중앙2동까지 진출하였다. 일제는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박상선·백남두 등 16명을 체포하였다. 3월 23일 전주장날을 기하여 세번째 전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은 군청·경찰서·법원 등을 돌며 시위를 하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현장에 ‘전주 3·1운동 발상지 비’2000년 건립가 있다.
2) 군산시
■ 옥구 농민항일항쟁 발원지
◎ 현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임피중학교 앞뜰 ◎ 사적지 : 1927년 11월 20일부터 약 7개월에 걸쳐 계속된 옥구소작쟁의가 일어난 곳
항쟁은 1927년 11월 이엽二葉 농장에서 일본인 지주의 75%의 고율 소작료 부과에 의한 횡포로부터 시작되었다. 옥구농민조합위원장 장공욱張公郁 등은 감면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소작인들이 강경하게 나오자 서수지부장 장태성을 검거한 일제는 석방을 요구하자 옥구농민조합
간부 36명 모두를 검거하였다. 소작인들은 임피·서수 주재소를 습격하여 전원을 풀려나게 하였다. 12월 8일 군이 항쟁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조합간부와 주동자 등 80여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그중 34명이 협박과 명예훼손·구금자 탈취·소란죄 등으로 기소되어 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인 지주의 폭압에 맞서 옥구농민들이 벌인 이 항쟁은 단순한 이엽사 농장의 소작쟁의가 아니라 농민들에 의한 전국 유일의 조직적인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이요 3·1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항쟁의 발원지인 임피중학교 앞뜰에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1995년 건립가 있다.
■ 군산 3·1만세운동 발원지
◎ 현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233 구암동산 ◎ 사적지 : 군산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곳
전북에서 3·1만세시위가 첫번째로 일어난 곳은 옥구·군산이었다.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위치한 영명학교의 교사 고석주·김수영·김윤실·김인묵·이동욱, 기독교인 김성사·유희순, 개정면의 기독병원
사무원 양기준·유한종·양성도 등이 군산장날인 3월 4일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어 이두열·이준영·김성은 등이 학생 김영후·송기옥 등과 함께 영명학교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7천장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 전날 이를 눈치챈 일본경찰이 이두열·김수영·박연세 등 관련교사들을 연행해 가자 3월 5일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영명학교 학생 양기철·전세종·김영후 등이 앞장서고 기독교계 학생들과 함께 군산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기독교 신도들이 합세하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여 군산시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통을 통과하였다. 9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는데 교사 이두열은 3년, 김수영·박연세는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고석주·김성은·양기준 등 30여 명은 6개월에서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현장에 ‘3·1독립운동기념비’2000년 3월 15일 건립가 있다.
3) 정읍시
■ 임병찬 의병장 창의 유적지
◎ 옛주소 : 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종성2리 상종성 ◎ 현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276-1 전 ◎ 사적지 : 임병찬 林炳瓚, 1851∼1916 의병장이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키던 곳
1893년 임병찬이 산내면 영동마을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공자를 모시는 영소전과 학당을 건립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또한 병기창·탄약제조소·숙영지를 분산 설치하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문무를 익히게 하였다. 회문산의 솔봉 줄기 해발 450여 미터에 위치한 이 마을은 들어오는 입구가 하나뿐인 천연의 요새이다.
임병찬은 최익현이 1906년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호남의병을 창의하자 총사로 추대되었다. 8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최익현과 같이 체포되어 대마도에 2년간 감금되었다. 1914년 고종
의 「독립의군지사사령총장獨立義軍之師司令總將」의 밀칙을 받아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구금생활 중 1916년 사망하였다. 그 후 이 지역 출신 의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이곳은 전북 기념물 제92호1998년 1월 9일 지정이고, ‘대한독립의군 임병찬 선생 창의기념표석’1992년 7월 8일 건립이 있다.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는 회문산 최고봉인 지붕산일명 회문봉 830m 바로 아래에 있다. 원래 유적지 뒤편에 있었으나 손자들이 1943년 5월 이곳으로 옮겼다.
■ 최익현 의병 창의 유적지
◎ 현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 武城書院 ◎ 사적지 : 한말 최익현 崔益鉉, 1833~1906 등 호남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킨 곳
1906년 4월 13일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최한 결과 최익현을 의병장으로 의병부대이 구성되었다. 최익현의 의병활동은 기간이 매우 짧았고 관군을 맞이하여 대적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기 때문에 군사적인
활동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74세의 나이로 항일에 나섰던 최익현의 모습은 인근의 유림과 백성들에게 큰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났고, 부친의 명에 따라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이 되었다. 1906년 최익현은 이용원李容元·김학진金鶴鎭·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국난을 타개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최익현은 문하생 최제학崔濟學을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과 연락케 하여 전라도에서 거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태인과 순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은거지인 포천을 탈출한 최익현은 1906년 3월 24일 태인에 도착하였다. 4월 13일 무성서원에서 의병 궐기를 위한 강회를 열어 그날 80명의 호응을 얻고 각지의 포군들을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였다. 창의에 앞서 민영규閔泳奎를 통하여 기병소起兵疏를 올려 그 목적을 천명하였다. 4월 13일 태인읍으로 들어가니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쉽게 태인을 접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수비케 하였다. 이튿날 정읍으로 진군하니 군수 송종면宋鍾冕이 의병을 맞이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무장을 강화하고 의병 소모召募의 방을 붙여 100여 명의 장정이 증원되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내장사에 진을 치니 인근의 많은 포수들이 호응하여 의병부대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5일 구암사를 거쳐 16일 순창읍, 17일 곡성읍, 18일 중진원中津院을 지나 남원을 거쳐 순창으로 향하였는데 그동안 의병부대는 6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20일 옥과玉果
와 금산錦山에 관군과 일병들이 출진하고 포위망을 형성하여 사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그런데 그들은 일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관군이었다. 최익현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의병부대을 해산시키고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감금 3년형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된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을 세상을 떠났다.
■ 태인 3·1만세운동 시위장소
◎ 현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617 성황산 ◎ 사적지 : 1919년 3월 16일 태인에서의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
태인에서의 만세운동은 태인장날이었던 3월 16일 송수연을 선봉으로
태인장터에서 시작되었다. 정오를 알리는 타종을 신호로 청년들이 호소하자 시장에 모여든 군중들이 일제히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일본 헌병이 총검으로 탄압하였으나 시위군중은 의기를 꺽지 않고 성황산과 항가산을 옮겨다니며 밤에는 횃불시위를 하였다. 같은 시각 태인의 민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80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25명이 정읍검사국에 송치되어 11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성황산 서쪽 등성이에 ‘3·1운동 기념비’1984년 건립가 있다.
4) 남원시
■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 현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 ◎ 사적지 : 1919년 4월 3일 남원군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남원군에서 3·1만세운동을 가장 조직적이며 대규모로 성취한 곳은 덕과면이다. 덕과면장으로 있던 이석기는 오수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조카
이광수를 불러 4월 3일 덕과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그날은 식목일이라 일제하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는 공식적인 기념행사가 있기에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면민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4월 3일 식목이 끝난 후 이석기 면장이 면민 앞에 나서서 “우리 조선 국민도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큰 소리로 외치니 참석한 모든 면민이 동조하였
다. 이석기 면장은 대열에 앞장서서 전주로 가는 큰 길로 나와 사매면 신오리 헌병분견소 쪽으로 진출하였다. 같은 시각에 사매면민들도 궐기하여 합류하니 시위군중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가 총을 난사하자 군중이 다칠 것을 염려한 이석기 면장을 비롯한 조동선·이재화 등이 모든 책임을 지고 주재소에 남는 대신 면민들을 해산하였다.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1999년 3월 1일 준공이 있다.
5) 김제시
■ 애국지사 장태수 생가 및 순국지
◎ 현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 65-1 ◎ 사적지 : 1910년 일제에게 한국이 강점당하자 순절한 애국지사 장태수 張泰秀, 1841~1910 가 태어난 곳이자 순국한 곳
18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간 장태수는 1875년 연로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인 금구에 내려와 효도에 전념하였다. 부친 사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시정원 부경에까지 올랐으나,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임금에게 불충하고 조상에게 불효한 것이라 하여 단식하여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단식 중 동포에게 주권의 회복을 호소하는 고결문을 남겼다. 생가에서 단식을 시작한지 20여 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생가는 ‘남강정사南岡精舍’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서강사1936년 설립가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 9 서계에 있다.
■ 원평장터 3·1만세운동 사적지
◎ 현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유목마을 ◎ 사적지 : 1919년 3월 20일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원평 장터
1919년 3월 20일 김제군의 동남단인 수류면현 원평 원평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이 13일 전주시장에 갔다가 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후 16일 같은 마을 전도명·전도근·전부명·이병섭·김성수 등과 의논하여 원평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계획하였다. 20일 하오, 원평시장에서 전도근·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배세동은 대형 태극기를 게양, 주변 장꾼들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니 많은 군중이 호응하였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배세동 등 10여 명이
체포 구금당하였다.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1989년 건립가 있다.
■ 독립운동가 이종희 생가
◎ 현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663 ◎ 사적지 : 2001년 1월 복원한 독립운동가 이종희 李鍾熙, 1890∼1946 의 생가
이종희는 의열단·민족혁명당·임시의정원 등 중국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제4기를 졸업하고 상해·남경에서 항일활동을 펼쳤다. 1936년 2월부터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고, 1938년 10월 김약산 등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으로 복무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중경 임시정부의 의정원 전라도 의원선거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 때까
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광복군 고급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배 안에서 순국하였다.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에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장군 추모비’1987년 11월 23일 설립가 있다.
■ 계몽운동가 이기 생가
◎ 현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 ◎ 사적지 : 오적주살을 추진한 구한말의 대표적인 호남출신 애국계몽운동가 이기 李沂, 1848∼1909 의 생가
이기는 1905년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고, 1906년 장지연·박은식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3월 나인영·오기호와 함께 을사오적을 주살하고자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는데, 계획한 날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 차질로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다. 동지들과 재차 주살을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7년 유배형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
었다가 얼마 후 풀려나 서울에도 호남학회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추진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6) 무주군
■ 칠연백의총
◎ 현주소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 100 ◎ 사적지 : 한말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다 칠연계곡에서 전사한 의병들의 무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무주지방에서는 30세를 전후한 대한제국 시위대 출신 신명선이 덕유산을 중심으로 박춘실·김동신·문태서 등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명선부대는 초기 창의할 때 4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숫자가 증가하여 150여 명의 의병이 결집되었다. 1907년 겨울 김동신 의병부대와 함께 진안군 정천면 심원사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한 후 이석용 의병장과 합세하여 임실읍을 습격한 후 순창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그해 말 덕유산 거점으로 돌아온 신명선은 1908년 정월 초 무주군 적상면 배골 접전 모퉁이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였고, 정월 대보름에는 문태서의 호남의병대와 합세하여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 옥녀봉 골짜기에서 일본군 수비대 43명을 사살하고 병기 50자루를 노획하였다. 2월에는 진안군 동향면 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 10명을 사살하고 총기 9자루를 노획하였으며, 3월에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 주둔 중 쳐들어온 일본군 수비대 10명을 섬멸하고 덕유산 칠연계곡의 화전민촌 병막골에 병막을 치고 주둔하였다.
신명선은 전진을 거느리고 안성면 사전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기 위해 출전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파수병을 원통사 뒤의 사시목에 잠복 배치하였다. 그러나 파수병이 연일 활동한 피로 때문에 잠을 자고 있던 중 일본군 수비대가 100여 명의 병력을 2지대로 편성하여 1지대는 원통사 골짜기로, 1지대는 통안 골짜기로 접근해왔다. 원통사 부근으로 접근한 일군은 사시목에 잠복하고 있던 파수의병을 사살, 병막골을 급습 포위하니 아무런 전투 준비도 않고 있던 의병 본진은 항전할 틈도 없이 전원 순국하고 말았다. 신명선이 인솔한 전진 의병도 송정골로 향하던 중 골짜기에 잠복하고 있던 일군의 기습을 받아 순국하였다. 그후 의병 출신 문봉호가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100여 구의 유해를 수습하여 송정골에 묻으니 ‘칠연백의총七淵百義塚’이다.
■ 구천동 한말 항일 격전지
◎ 현주소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구천동 ◎ 사적지 : 한말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항일 격전지
1907년 11월 장수군 계북면 양악마을에서 조직된 ‘호남의병단’은 문태서文泰瑞
가 총참모 지휘장이었고,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1908년 정월 무주군 부남면 선봉대와 중군대가 출동하여 당시 별개 의병대로 활동 중이던 신명선 의병대와 합세하고 후군은 구천동을 수비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부남면 고창곡으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고창곡 양쪽 언덕에 잠복해 있던 전성보 중군대가 돌격하고, 박춘실 선봉대와 신명선 의병대가 적의 앞뒤를 공격하여 일군 43명을 사살하고 총기류 50자루를 노획하였다. 1908년 2월 28일 이종성을 선봉으로 60여 명의 의병이 황대연 포대와 연합하여 무주 주재소를 습격 적 12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구천공 계곡을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대부대를 구천동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호남의병대는 산악전에 능숙하여 지세상 유리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선점하여 잠복하는 등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작전을 바꾸어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끌면서 호남의병단을 덕유산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요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박춘실 부대가 일본군 수비대 일부를 칠연계곡으로 유인하고 정성보
부대가 좌우에서 공격하여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1908년 늦가을 분산 활동을 하고 있던 각 부대가 구천동에 집결하여 군사 훈련과 전투준비를 하였다. 일본군 수비대가 구천동으로 공격해오자 깊은 골짜기로 유인하여 일본군이 골짜기로 들어오자 일제히 포격을 가하는 등 하루 내 격렬하게 접전한 결과 적의 장교 3명과 병졸 3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4월 무주군민들이 문태서의 항일구국전공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는데 곧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었다. 삼공리 879-3에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1995년 건립이 있다.
7) 임실군
■ 임실 운현 전적지
◎ 현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큰재 대운이재 ◎ 사적지 : 1908년 3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17명의 의병들이 순국한 곳
운현 전적지는 임실군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 경계 부근인 대운재 도로변에 위치한다. 이석용은 고향 임실 지방을 본거로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와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는 1906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동안 전주·임실·장수·진안·남원·순창·곡성·함양 등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7년 9월 그는 참모들을 모아 의거를 논의하고 의병대의 이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이석용은 9월 4일 성수면 태평이 운현, 즉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처음으로 진을 쳤다. 수많은 전투를 거친 후 1908년 3월 17일 임실읍을 습격, 일군 기병대장과 2명의 일군을 죽이니 다른 일군들은 도망하였다. 3월 21일 운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
을 받은 의병들은 분전하다가 17명이 순국하였다.
순국한 이들은 김동관·김사범·김여집·김춘화·김학도·승려 덕홍·승려 봉수·박달천·박운서·박인환·서상렬·서성일·오병선·윤정오·정군삼·최덕일·한사국이다. 이들이 순국한 곳에 ‘운현전적의혼 추모비’2005년 건립가 있는데, 이들 외에 김치삼·박만화·박운서·성경삼·양경삼·여주목·이광삼·최일권·허윤조 등 11명의 의병들이 추가되어 있다. 성수면 오봉리 산 130-1에는 이들 28 의사를 배향한 소충사2002년 건립가 있다.
■ 이석용 의병장 생가
◎ 현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6 ◎ 사적지 : 한말 의병장 이석용의 생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석용이 1878년 이 가옥에서 태어나 1903년까지 거주하다가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로 이전하여 생활하였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12일 진안의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창
의 동맹을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6세의 나이로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 가옥은 전북지방기념물 제91호1997년 7월 19일 지정이다.
3. 전라남도
1) 목포시
■ 목포 3·1만세운동 주도학교
◎ 현주소 : 전라남도 목포시 남양동 86 정명여자중·고등학교 ◎ 사적지 : 1919년 목포의 4·8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다니던 정명여학교가 있던 곳
목포에서의 3·1만세운동은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영흥학교가 주축이 되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동안 광주로부터 독립선언서 사본, 2·8독립선언서 사본, 비밀 지하신문, 격문, 독립가 등의 인쇄물이 든 봉투 중 하나가 정명여학교 교장 김아각 목사에게 전해졌다. 이 봉투는 1983년 2월 24일 정명여자중학교 교실 천정 보수 작업 중 발견되어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4월 8일 영흥학교 김옥남 학생이 친 비상 종소리를 신호로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 200여 명과 양동교회 신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정문을 벗어나 프렌치병원현 양동제일교회 자리 앞을 지나 동화고무공장을 거치면서 시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날 2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정명여학교에서는 최자혜 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학교는 임시휴교에 들어갔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고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정명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으로 수감된 이들은 최자혜·이금전·김보현·김마르타·김정혜·천귀례·박겸숙·김정현·김옥실·곽희주·문복금·김영애·박복술·김연순·주윤애 등이다. 교내에 이를 기념하는 ‘독립기념비’1985년 12월 31일 건립가 있다.
2) 여수시
■ 대한독립의군부 병마도총장 임병찬 순국지
◎ 현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383 거문도 ◎ 사적지 : 대한독립의군부 병마도총장 임병찬 林炳瓚, 1851~ 1916 이 순국한 곳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임병찬은의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
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군량 및 병사 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전투에서 일군과 격전하다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던 중 그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였다.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함을 분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년 5월 23일 유배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 ‘돈헌 임병찬
의사 순국비’1997년 10월 31일 건립가 있다.
■ 여수 구 청년회관
◎ 현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 303 ◎ 사적지 : 일제강점기 여수지역 청년들의 항일민족운동의 본거지
1920년대 여수의 주요 청년단체로는 맞돕회·여수청년회·여수정구단·여수기독청년회·남면청년회·여수장군단·코스모스회·미왕청년회·백야리 청년금주회·맛치단·화이면청년회·돌산청년회·여수독서회·여수항기독장려청년회·쌍봉청년회 등이 있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설립되어 오랫동안 여수 청년운동의 구심이 된 것이 여수청년회이다. 1920년 7월 여수향교에서 여수지방청년회라는 명칭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덕성함양·지성계발·체육발달을 목적으로 하고 여수주민들의 일상생활 개선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여수지방청년회는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강연회, 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노
동야학은 이 청년회의 중점사업으로 문맹퇴치 및 의식계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여수청년회가 발전하면서 청년회관이 건립되었다. 당시 회장 정재완과 회원 국금남·김경택·김봉완·김우성·김정옥·김학운·김홍식·송동철·이상호·이창수·임상옥·장용태·조한렬·진장룡 등은 직접 흙을 나르며 모금도 하였다. 특히 회장 정재완은 전답까지 팔아 건축비에 보탰으나 부족하여 사업가 김영준의 희사를 받아 1931년에 낙성하였다. ‘여수시 관문동 300번지에 자리잡은 익공식 2층 기와집’인 청년회관은, 여수의 청년운동 및 항일운동의 구심이자 상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 31호이다.
3) 순천시
■ 낙안 3·1만세운동 발생지
◎ 현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60-1 ◎ 사적지 : 19191년 4월 13일 낙안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유림적 기반이 강하였던 낙안에 3·1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진 것은 3월경 안호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포고문 등 밀서를 가지고 들어오면서였다. 4월 13일 김종주·유흥주 등이 중심이 되어 낙안읍장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낙안 만세시위의 특징은 첫째, 유생층에 의해 만세시위가 주동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김종주는 최익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던 인물로 한말 의병항쟁이 3·1만세운동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둘째,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임시 조직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도란사’란 조직을 만들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고, 행동대격인 ‘이팔사’를 조직하였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조직을 ‘위친계’로 가장하였다. 셋째, 운동양상이 매우 조직적이었다. 운동전개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분산하여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낙안 만세시위의 연계성을 확보하였다. ‘낙안 3·1운동 기념탑’1998년 낙안초등학교에서 이건이 있다.
4) 나주시
■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
◎ 현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죽림동 601 외 ◎ 사적지 :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된 곳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면서부터 여학생 희롱사건이 일어났다. 나주역 플랫폼에서 통학생들이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집찰구로 걸어가고 있을 때, 광주중학 3년생인 일인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의 댕기머리를 잡
아당기며 모욕적인 장난을 하였다. 역 구내에서 걸어나오던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朴準埰가 격분하여 주먹으로 일인 학생의 얼굴을 때렸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오후 5시 광주↔송정리간의 통학열차 안에서는 한·일 학생간에 집단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민족전체의 독립의지를 집약시키는 계기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촉발된 나주역사驛舍는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한 근대건축물로 현재의 건물은 1925년 신축된 것이다. 현재 역사의 기본구조나 골조 목재 등은 최초 건립 당시 그대로이다. 역사의 지붕모습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최초 건립 당시의 모습과는 다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83호2000년 12월 29일 지정이다. 한편 나주 역사 건너편인 나주시 죽림동 60-173에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2008년 7월 25일 개관, 나주시 경현동 225-3 나주고등학교 뒤편 국도 13호선 변에는 ‘광주학생운동 진원기념비’1981년 건립가 있다.
5) 광양시
■ 한말 순절자 황현 생가
◎ 현주소 :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57-1 서석마을 ◎ 사적지 : 황현 黃玹, 1855~1910 의 생가가 있던 곳
광양에서 태어나서 구례로 이사하여 성장한 황현은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청일전쟁·갑오개혁이 연이어 일어나자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택영을 만나서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 일본제국주
의의 침략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생가 부근에 묘소도 있다.
6) 딤양군
■ 추월산 격전지
◎ 현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월계리 산 81 ◎ 사적지 : 한말 기삼연 奇參衍, 1851~1908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
1907년 9월 영광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킨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기삼연 의병장은 전해산全海山·이석용李錫庸·김준金準[泰元]·이남규李南奎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상소문을 작성하여 예식원禮式院에 보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기사를 보내 창의 사실을 통보하였다. 이어 고창의 적을 야습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한 후 천연암벽으로 이루어진 천연 요새지 추월산성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12월 27일 밤, 눈비가 뒤섞여 내리는 틈을 탄 적의 대부대가 습격하여 혈전을 벌였던 곳이다. 의병진은 얼고 시장한 때였으므로 악전고투 끝
에 피차간에 40~50명씩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기삼연 의병장도 적탄에 부상당하여 순창으로 후퇴한 곳이다. 1972년 1월 29일 추월산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 민족운동가 송진우 생가
◎ 현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 외 ◎ 사적지 : 송진우 宋鎭禹, 1889~1945 가 태어난 곳. 또한 한말 의병장 기삼연이 을미 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반항하여 체포된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은거했던 곳
이곳에서 기삼연은 송진우를 교육하였고 후일의 의병활동을 구상하여 한말의병의 중핵인 정미의병의 중심역을 했던 호남의병을 일으킬 수 있게 하였다.
송진우는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을 거쳐 1915년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으며, 1918년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3·1운동 때는 이른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깊이
관여하였다가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의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였다가 1924년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과 함께 국내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하였다가 동아일보는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였고,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는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징역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암살당하였다. 생가는 문화재자료 제260호2005년 12월 27일 지정이다. 한편 담양군 담양읍 만성리 167관어농원 내에는 ‘고하 송진우 선생 추모비’1991년 설립가 있다.
7) 구례군
■ 한말 의병장 고광순 순절지
◎ 현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 54-1 연곡사 내 ◎ 사적지 : 한말 의병장 고광순 高光洵, 1848~1907 이 순절한 곳
고광순은 항일투사 기산도의 사위로 1895년 을미사변 때부터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4월 최익현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족조族祖인 고제량高濟亮과 함께 최익현을 찾아갔으나 이미 최익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였다.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아 오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체포되었다. 고광순은 좌절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써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저산·분암에서 창의의 기치를 세웠다. 이때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남원합동작전의 연락을 받고 고광순 의병부대은 행군을 개시하
였다. 그러나 남원에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등의 의병이 이미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시 남원성 포위전을 벌이다가 퇴각하였다. 4월 25일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현 화순군 능주면 유림들의 협력을 얻어서 화순읍으로 진격하여 점령하였다. 이튿날 동복현 화순군 동복면으로 진군하였는데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들과 도마치圖馬峙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는 일시 흩어졌다.
1907년에는 지리산 문수암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김동신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지리산으로 집결했다. 8월에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의병들을 연곡사로 집결시켰으나 9월에 일본군의 야간 기습 공격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을 비롯해 주요 장졸들과 함께 전사했다. 고광순의 업적을 기리는 ‘고광순 순절비’1958년 설립가 있다.
8) 보성군
■ 안규홍 의병장 파청 전투지
◎ 현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예당면 산 93 ◎ 사적지 : 한말 의병장 안규홍 安圭洪, 1897~1911 이 일군과 접전을 벌인 곳
보성군 조성면 덕산리에서 출생한 안규홍은 집이 기난하여 담살이머슴로 살았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구국의 함성이 높아가자 거의 목적으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였고, 담살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안 담살이 의병부대이 형성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들이 보성군 조성·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자, 안규홍은 일본군 기습 작전을 계획하였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출동하여 수색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미리 보성 동쪽 8키로미터 떨어진 파청巴靑, 현 예당리의 험한 지
점에 복병을 마련해 두었다. 일본군이 골짜기로 들어왔을 때 복병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적군을 궤멸시킨 안규홍 의병부대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巴靑大捷이다. 이 전투를 기념하는 ‘의사 안공파청 승첩비’義士安公巴靑勝捷碑 : 1947년 건립가 파청 저수지 옆에 있다.
■ 애국지사 정건수 생가
◎ 현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외래 ◎ 사적지 : 독립운동가 정건수 丁建壽, 1924~2002 의 생가 터
1943년 10월 중순경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되어 1944년 9월 13일 중국 산서성으로 끌려간 정건수는 한구에 집결하던 중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박태만·이동섭·이병렬·이병남·이병렬·이순석·장회수·최용선 등과 함께 12월 30일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였다. 일행은 추격해온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1945년 1월 25일 중경의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하여 정부요원의 신변보호와 총사령부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중국에 남아 임
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6월 8일 귀국하였다. 생가터에 ‘애국지사 영광 정건수 위적비’2003년 11월 15일 설립가 있다.
■ 독립운동가 서재필 생가
◎ 현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 ◎ 사적지 : 서재필 徐載弼, 1866~1951 의 외가로 그가 태어나고 여섯 살 때까지 성장하며 교육을 받은 곳
서재필의 외가는 대대로 학문을 하는 집안이었다. 외조부 이기대가 3,000여 권의 장서를 구비하고 학문을 연구함에 따라 많은 학자들이 그의 외가를 왕래하며 학문을 논했다. 그의 외종형인 이교문과 조카 이일은 부자간에 호남의병에 참여하여 군량을 조달하는 등 구국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4세에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서재필은 김옥균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갑신정변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1884년 4월에 미국으
로 망명하여 죠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 귀화하였다. 1894년 7월에 갑오개혁 추진 내각이 수립되어 갑신정변 때의 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미국을 방문한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국민계몽활동을 전개하던 중 수구파정부와 러시아 및 미국이 결탁하여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추방 후 개업했던 병원을 닫고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았다. 1921년 11월에는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
하는 요청서를 제출했으며, 1922년 1월에는 미국 대통령 하딩을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5년에는 범태평양회의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3·1만세운동 후 그때까지 독립운동의 경비로 자기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팔아서 사재 7만 6천불을 모두 쏟아 넣었다. 한국전쟁 때 60여 호의 마을이 모두 불타면서 그의 생가도 소실되었는데 2003년에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1024번지에 서재필 기념공원2003년 조성이 있다.
9) 화순군
■ 화순 쌍산의소
◎ 현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일원 ◎ 사적지 : 화순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한말 호남의병의 활동거점
쌍산의소雙山義所는 사적 제485호2007년 8월 3일 지정이다. 의병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하던 곳으로 유적이 완벽하게 남아 있기에 한말 호남의병은 물론 한말의병사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의병들의 유물은 화승총이나 진중일기 정도인데, 대부분 일제에게 빼앗겨 전해지지 않는다. 유적은 일제에 쫓기는 의병들이 영구적인 시설을 새로이 만들기보다는 자연동굴이나 산성·사찰·재실 등 이미 지어진 건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의병만의 독자적인 유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화순군 이양면 계당산桂棠山 일대의 쌍산의소는 의병 유적지로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쌍산의소’란 명칭은 오래 전부터 현지 주민들이 계당산 일대를 가리켜 ‘쌍산’ 또는 ‘쌍봉雙峰’ ‘쌍치雙峙’라고 불러온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은 1907년 이후 전남 동남부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여 의병전쟁을 펼친 호남의병 가운데서도 특히 양회일·임노복·임상영·정세현·정찬재 등이 주축을 이룬 활동거점이었다. 1907년 3월 쌍봉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능주·동복·화순일대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의 활약, 1907년 12월 이백래가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열어 펼쳐간 의병활동, 안규홍 의병부대가 봉기하여 파청·운월치·대원사·진산 등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들, 이 모두가 쌍산의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거나 그 주변에서 이루어진 활동이었다. 1908년 1월부터는 도대장 이백래李白來를 주축으로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전남 동남부의 의병 거점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준비했던 곳으로 1909년까지 단독으로 혹은 연합하여 일본군에 항전했던 곳이다.
의병활동이란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까닭에 그 본거지가 형성되기 어려운 것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증동마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할 수 있는 무기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이 막사터 및 방어시설로 보이는 의병성義兵城이 함께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유적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유적지로 무기를 제작했던 대장간터증리 산 33번지, 화약을 채취하던 유황굴산 172번지, 자연석으로 쌓은 의병성과 막사 터산 13번지, 훈련장산 12번지, 호남창의소 본부 가옥60번지 등이 있다.
10) 함평군
■ 함평 4·8만세운동 발상지
◎ 현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산 35-1 낙영제 ◎ 사적지 : 1919년 4월 8일 함평의 문장 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의 거사를 모의하던 김종수의 한문서당이 있던 곳
김종수는 한문서당이 있던 곳으로 1919년 4월 8일 문장 장터의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4월 8일 오후 2시경 함평군의 문장장터에서
김기택·정용섭·정재남 등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니 수백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문장리에 있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고 일진은 함평쪽으로, 일진은 영광쪽으로, 일진은 송정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한편 장터에서는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김기택 등을 구타 체포하였는데 장효섭·이윤상 등이 석방을 요구하자 발포를 자행하였다. 1943년 태풍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2005년 복원하였다.
■ 독립운동가 김철 생가터
◎ 현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2-2 ◎ 사적지 : 독립운동가 김철의 생가로 복원된 것
김철金澈, 1886~1934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광 광흥학교를 거쳐 1912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였다. 1915년 일본 명치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고향에 은거하였으나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1917년 조국의 독립에 투신하기 위해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던 상해를 향해 고향을 떠났다.
상해에 도착한 김철은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구성된 초대 임시의정원의 전남대표로 선임되었고, 이어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교통차장 육군무관학교 교관,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중대장, 임정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9년부터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546-2번지 일원에 사당·동상·기념관·수양관·관리사 등을 건립하여 2003년 6월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 의병 훈련소
◎ 현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갓점 남일공원 ◎ 사적지 : 한말 심남일 의병장이 의병들을 모아 거의, 훈련하던 곳
1907년 11월 1일~1908년 2월 심남일수택의병장이 각처에 공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킨 곳이다.
삼남일 의병장은 1907년 11월 1일 전남의 각 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
을 규합하고,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글을 띄우는 등 이곳에서 거의하였다. 훈련을 받은 의병의 숫자가 600~700명이었다.
11) 장성군
■ 호남창의회맹소 결성지
◎ 현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수연산 ◎ 사적지 : 1907년 10월 30일 호남창의회맹소를 정식으로 결성한 곳
호남창의회맹소는 대장 기삼연, 통령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익중金翼中과 김봉수金鳳樹, 선봉 김준 등 주요 구성원들 대부분이 장성·고창·영광 등 전라도 서부지역의 양반유생들이었다. 즉 동일한 지역적 기반에
기초한 양반 유생 중심의 의병부대이었다. 수연산隨緣山의 본래 명칭은 영취산靈鷲山이었으나 이 산에 소재한 수연사隨緣寺라는 절로 인하여 수연산이라 불려졌다. 수연산은 현재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와 동화면 서양리, 황룡면 관동리 등 3면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광군과 접해 있다. 호남창의회맹소와 연관된 의병장들이 호남지방의 정미의병을 주도하였고, 회맹소 결성을 계기로 호남지방의
정미의병이 크게 활성화되고 장기 항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만큼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 장소로서 수연산은 의미가 있다.
12) 완도군
■ 소안 항일민족운동의 섬 소안도
◎ 현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 사적지 : 1920년대 활발한 항일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한 섬
1910년대에 세워진 사립중화학원 등 여러 학원과 1923년 중화학원을 계승하여 설립된 사립소안학교 등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1922년 비밀결사 수의위친계가 조직되었다. 이어 1923년 배달청년회가 혁신되고, 1924년 소안노농연합대성회가 조직되고, 1926년 사상단체 살자회가 조직되었으며, 1927년에는 비밀결사 일심단이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의 조직을 주도한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의 조직을 통하여 진보적인 사회주의사상을 소안도에 소개하였다. 또한 그 인맥을 통하여 수의위친계의 조직을 확장시키고, 수의위친계와 일심단원 그리고 여타
청년운동가·노동운동가들이 전국적으로, 국외에까지 나아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소안학교 등에서 항일의식·민족의식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그의 지도 아래 교육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사상운동·비밀결사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소안도에서 진행된 이러한 운동들은 그 활동범위가 소안도·완도 내에 한정하지 않고 전남·국내·중국·일본에까지 확장해 갔다. 이들의 운동목표는 민족해방에 있었고, 따라서 소안도에서 진행된 교육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사상운동·비밀결사운동 등은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소안도에서 격렬한 민족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첫째, 소안도에는 양반층 혹은 지주층이라 할 만한 계층이 없이 대부분 평민층·자작농층으로 구성되어 주민들간의 대립과 갈등의 소지가 그만큼 적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계층상의 특징은 진보적인 사회운동이 소안도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둘째, 한말~1910년대에 걸친 토지회수투쟁과정을 통해 주민들간의 단합이 강화되었다. 셋째,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인 의식에 일찍부터 눈떴던 김사홍·김경천·송내호·송기호·최준희·강정태 등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7년 배달청년회사건으로 소안도의 항일운동의 핵심세력이 옥고를 치르고 사립소안학교가 폐교된 것, 소안도 항일운동의 지도자 송내호의 죽음은 소안도 내의 항일운동의 맥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그의 지도를 받은 일심단 단원 등이 일본 혹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수의위친계를 통하여 그의 지도를 받은 인물들이 이후 완도 내의 각 지역에서 계속하여 운동을 지도하거나 새로운 세대의 운동가들을 배출하여 소안도 항일민족운동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 1125-1소안면복지회관 앞에 ‘소안 항일운동 기념탑’1990년 건립, 소안면 가학리 263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2003년 10월 20일 개관 : http://soan0516.com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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