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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跡 碑)」에 의한 것으로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 심지대사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 하여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하는 설이다. 다른 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심 대사(永深大師)에게 전해졌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心地)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는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창건설 가운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 대사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 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화사는 창건 뒤 현재의 대가람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창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동화사는 신라말인 934년 영조 靈照선사, 고려 명종 20년(1190) 지눌보조 普照국사, 고려 충렬왕 24년(1298)홍진 弘眞국사에 의해 각각 중창 중건되었다. 보조국사는 호국불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동화사 중창에 크게 공헌하여 동화사와 염불암 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또 고려 말기 대표적인 고승인 홍진 국사는 동화사를 하안소 下安所 로 삼고 대규모 중창을 이루었다. 현재 해탈교 건너편에 국사를 기리는 부도가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 (1606) 유정 惟政사명대사, 숙종 3년(1677) 상숭 尙崇대사, 영조 8년(1732) 관허 冠虛, 운구 雲丘, 낙빈 洛濱, 청월 晴月 대사 등이 각각 중창 중건하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 현존하는 당우들은 대부분 조선조 영조 때 중창한 건물들이다. 지난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의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
제20차 고찰순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화사 조실스님이시고 석가여래부촉법 제79대 법손 이신 眞際大禪師(진제대선사)님을 해운정사로 찾아가 친견하였다. 혹 우리 순례단이 동화사 순례하는날 동화사에 계신다면 법문을 들을까 해서 였는데, 아쉽게도 그 날은 동화사에 계시지 않고 해운정사에 계실 예정이라 하셨다.
제20차 백팔고찰순례는 12월 26일 06시 15분 낙동초등학교 아래서 출발과 동시에 불교TV에서 제작한 새벽예불DVD와 수행심 보살님의 집전에 따라 새벽예불과 천수경 독경후, 엮시 불교TV 에서 제작한 <한국의 명찰 팔공산 동화사>와 오늘 세번째로 순례할 고찰인 <내가 가고 싶은 절 6회 팔공산 송림사>DVD를 시청하며 07시 50분경 동화사 산문에 도착하였다. 엄동의 매서운 추위가 회원들의 부처님을 향한 마음을 더더욱 견고히 하는 것 같습니다.
옹호문(擁護門) / 옹호문은 대웅전 봉서루와 동일 축선상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전형적인 산문으로 가운데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쓰고 좌우 협칸은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사천왕상(四天王像) /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중 하나로, 동서남북 순으로 지국천왕 (持國天王),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인데, 이들을 사방 (四方)에 따로 배치하지 않을 때는 보통 천왕문 왼쪽에 지국천왕과 다문천왕을, 오른쪽에 증장 천왕과 광목천왕을 둔다. 또한 사천왕의 지물은 지국천왕은 비파, 증장천왕은 보검, 광목천은 용과 여의주 또는 새끼줄을, 다문천은 탑을 받쳐 든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조선후기 사천왕 상의 일반적인 예이다.
<옹호문 주련> 擁護聖衆滿虛空 옹호성중만허공 都在毫光一道中 도재호광일도중 信受佛語常擁護 신수불어상옹호 奉行經典永流通 봉행경전영유통 옹호하는 성중들은 허공에 가득하여 모두가 호광의 한길 속에 있도다. 부처님법 믿고 지녀 어느 때나 옹호하며 모든 경전 받들어서 길이 유통 시키시네
옹호문 안에서 바라본 봉서루
봉서루(鳳棲樓) / 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 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 봉서루 주련> 佛葉難鳴樹摩能(불섭난명수마능) 威光遍照十方中(위광편조시방중) 月印千江一體同(월인천강일체동)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제성사) 賁臨法會利郡生(비림법회이군생) 華阿方般法涅呪(화아방반법열주) 부처님, 가섭, 아난, 마명, 용수, 달마, 혜능 이시여! 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두루 비추심이 달이 천 갈래 강에 비치듯이 모두 같으시네. 네 가지 지혜를 원만히 밝히신 많은 성인들도 모두 법회에 임하시어 중생을 이롭게 하시네. 화엄경,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과 주문이라 *주련의 글귀는 석문의범(釋門儀範)과 향화청가영(香花請歌詠)에서 인용되었다. *석문의범(釋門儀範)에는 제3구의 일체(一體)는 일체(一切)로 제5구의 군(郡) 군(群)자로 되어 있는데 석문의범과 달리 쓴 이유는 뭘까?
대웅전(大雄殿)보물제1563호 / 동화사 대웅전은 팔공산을 대표하는 법당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건물을 조선 후기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또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 천상세계나 지상세계에서 부처님 같으신 분이 없으니, 시방세계를 다 둘러봐도 역시 비교할 수 없네. 세간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보았어도, 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이 없다네. *이 주련의 출전은 대지도론(大智度論) 권4, 치문경훈(緇門經訓) 권10,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권8 등 이다.
목조석가삼존상(木造釋迦三尊像) / 대웅전의 내부 중앙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방정토의 약사여래, 서방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그 뒤에는 후불탱으로 영취산(靈鷲 山)에서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을 모셨다. 천장에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우리 고찰순례단은 대웅전에서 전문포교사인 수행심보살의 집전으로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송후 예불대참회문이 인쇄된 기도포와 절하는 공덕이 인쇄된 기도포를 좌복에 펴고 禮佛大懺悔文(예불대참회문)에 따라 89분의 부처님 명호를 칭명하면서 108배를 하고 이어 발원문을 봉독하였다. 108배후 각 전각에 참배하고 10시 부터 통일대전에서 동화사 스님께서 집전하는 사시불공에 동참후 11시 30분에 점심공양을 하였다. 점심공양은 12시 부터이나 전날 동화사측의 양해와 협조를 구하여 11시 30분에 점심공양을 할 수 있었다.
<예불대참회 108배> 大慈大悲愍衆生 大喜大捨濟含識 대자대비민중생 대희대사제함식 [대자와 대비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대희와 대사로 함식(중생)들을 제도하시며] 相好光明以自嚴 衆等至心歸命禮 상호광명이자엄 중등지심귀명례 (1배) [상호(相好)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의해 저절로 장엄되어진 분에게 저희 대중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귀의하고 예배합니다] ............... ............... ............... 至心歸命禮 普光佛 지심귀명례 보광불 (9배) 至心歸命禮 普明佛 지심귀명례 보명불 (10배) 至心歸命禮 普淨佛 지심귀명례 보정불 (11배) ............... ............... ............... 至心歸命禮 寶華遊步佛 지심귀명례 보화유보불 (95배) 至心歸命禮 寶蓮華善住娑羅樹王佛 지심귀명례 보련화선주사라수왕불 (96배) 至心歸命禮 法界藏身阿彌陀佛 지심귀명례 법계장신아미타불 (97배) ............... ............... ...............
如是四法廣無邊 願今廻向亦如是 여시사법광무변 원금회향역여시 (108배) [이와 같은 네 가지가 광대하여 끝이 없으니(無邊) 원하옵건대 (제가 하고자 하는) 지금의 회향 또한 이와 같습니다.(끝이 없습니다)]
南無大行普賢菩薩 나무대행보현보살 南無大行普賢菩薩 나무대행보현보살 南無大行普賢菩薩摩訶薩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석탑
법화당(法華堂) / 동화사 대웅전 앞마당 좌측에 있는 건물이다. 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이지만 마당 쪽 일부분은 동화서점과 불구 판매소로 사용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7칸으로 좌우에 날개 채를 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결구한 뒤 익공을 짰는데 주간에도 포를 둔 절충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하늘엔 낮에 나온 하얀 반달이........
화엄당(華嚴堂) /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맞은편에 화엄당이 있다. 법화당과 마찬가지로 'ㄷ자'형 평면이다.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 좌측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간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왼쪽에 칠성각과 조사전이 자리 잡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조사전(祖師殿) / 조사전은 대웅전 좌측 뒤편에 칠성각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안에는 극달 스님을 비롯해 27폭의 조사(祖師) 진영을 모셨다.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 / ‘영남치영아문’이라는 이색적인 편액은 봉서루 뒤편에 대웅전 을 향해 걸려 있다. 이 편액에서 ‘치영(緇營)’이란 조선시대 승려로 이루어진 군영(軍營)이며, 아문(牙門)은 군인들이 주둔하는 경내(境內)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원판은 동화사의 유서를 말해주는 보물이기 때문에 통일대불전 아래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남치영아문 주련> 古壇松樹半無枝(고단송수반무지) 深洞石幢微有字(심동석당미유자) 淸梵消聲閉竹房(청범소성폐죽방) 碧紗凝焰開金像(벽사응염개금상) 細艸筍香小洞幽(세초순향소동유) 踈松影落空壇靜(소송영락공단정) 오래된 기단의 소나무 반쯤 가지가 삭았고, 깊숙한 골짜기에 돌 당간 희미한 글자 남았네. 맑은 범종 소리 그칠 때 죽방문 닫히고, 푸른 휘장에 촛불 응길 때 부처님 모습 열리네. 어린 풀 죽순 향기 작은 골짜기 그윽하고, 성긴 소나무 그림자 드리운 텅 빈 기단은 고요하네.
영산전(靈山殿) /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한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는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영산전 현판 글씨는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맛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으로 1920년 중건하였다.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영산전 주련> 羅漢神通世所稀(나한신통세소희) 行藏現化任施爲(행장현화임시위) 松岩隱迹經千劫(송암은적경천겁) 生界潛形入四維(생계잠형입사유)
나한의 신통력은 세상에서 드무나니 감추고 드러내심을 마음대로 하시네. 소나무 바위아래 전각에 자취를 숨기고 천겁을 지냈지만 중생계에 모습을 감추시고 사방으로 드나드시네. * 제 2구의 감출 장(藏)자는 꾸밀 장(裝)자로 되어 있는데 왜일까? 글의 내용은 “석문의범(釋門儀範) 독성단청가영(獨聖壇請歌詠)”에서 인용 하였다.
원음각(圓音閣) / 원음각은 범종각의 다른 이름으로 부처님은 하나의 음성을 내지만 그 음성 은 원음이 되어 울려 퍼지며, 모든 중생이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에서 유래 한다. 즉, 원음은 부처님의 음성을 뜻하며, 여기에 있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소리는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설법을 대변하는 셈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집이다.
인악대사 나무 / 수령이 500년 정도 된 이 나무는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인악대사 나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설법전(說法殿) / 옹호문 오른쪽에 자리한 건물로 1990년 통일약사석조대불을 조성할 때 함께 지었다. 건물은 주로 각종 법회와 행사를 치루며 대중 스님들의 소임을 적어 놓은 용상방이 있다. 지상 1층이지만 지형차를 적절히 활용하여 하부에 지하층을 만들어 공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 건물에 사방에 툇간을 붙인 평면이다.
<설법전 주련> 補陀山上琉璃界(보타산상유리계) 正法明王觀自在(정법명왕관자재) 影入三途利有情(영입삼도이유정) 形分六道曾無息(형분육도증무식) 因脩十善三祗滿(인수십선삼지만) 果備千華百福嚴(과비천화백복엄) 逈寶山王碧海間(형보산왕벽해간) 佩珠瓔珞白衣相(패주영락백의상) 無量光中化佛多(무량광중화불다) 仰瞻皆是阿彌陀(앙첨개시아미타) 보타산 위의 유리세계에 머무시는 정법명왕이신 관자재[관세음] 보살님. 그 그림자 삼도에 들어가 유정[중생]을 이롭게 하며 그 모습 육도에 나누어 일찍이 쉼이 없으시네. 삼아승지겁 다하도록 십선 인행(因行) 닦으시어 온갖 영화의 과보 갖추어 백복으로 장엄하셨네. 아득히 보타산왕[관세음보살]은 푸른 바다에서 주옥과 영락을 차고 있는 흰옷 입은 모습이네. 한량없는 광명 속에 화신불 많지마는 우러러 뵈는 분 모두 아미타부처님이시네. 주련의 내용은 제 1구에서 8구까지 『관음예문 영가(觀音禮文詠歌)』에서 인용하였으며, 뒤의 2구는 『석문의범(釋門儀範) 극락전청가영(極樂殿請歌詠)』에서 인용하였다.
統一梵鐘樓(통일범종루)
통일대전(統一大殿) / 동화사 대웅전 영역 아래에 근래 새로 조성한 공간의 불전이다. 여기 에는 약사여래불 입상을 중심으로 그 앞에 삼층석탑 2기를 좌우로 두고 전면에 지상 3층 규모 의 전각인 통일대전을 지었다. 통일대전은 상층 불전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하층은 성보전시관 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대전 내부는 전면 마당의 약사여래불을 예불할 수 있도록 전면을 창호로 꾸몄으며 이로 인해 금강계단으로 불리고 있다. 통일대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연건평 1,2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전각이다. 내부에는 전면에 4단의 불단을 조성하여 다수의 관음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성보전시관에는 동화사의 주요 전각과 암자에 봉안되어 있던 대부분의 불화를 수장하여 각 전각에는 사진 복사본으로 기존 불화를 대신하고 있다.
통일약사여래대불(統一藥師如來大佛) / 동화사 대웅전 영역에서 서쪽에 새로이 조성한 1만여 평의 대도량(大道場)에는 1992년 조성한 통일기원(統一祈願) 약사대불(藥師大佛)을 중앙에 봉안하고, 석불 맞은편에 통일대불전(統一大佛殿)을 조성하였다. 이 대불은 분단의 벽을 허물 어 민족의 고통을 치유함과 동시에 한민족의 하나됨을 염원하여 조성된 것으로 전북 익산(益 山)의 황등석(黃橙石)을 사용하여 108명의 석공들이 약7개월 동안 조성하였다. 높이는 33m, 둘레는 16.5m로 대불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2과를 모셨으며, 앞쪽에는 2기의 통일석탑과 2기의 통일석등을 건립하였다.
통일대불 앞을 보수중이어서 2008년 8월 23~24일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2008년 총동문대회시 촬영한 사진을 바로 위에 2장 게시합니다.
우리 부산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은 대웅전에서 예불대참회문에 따라 108배후 약 1시간동안 경내 전각을 참배후 10시 부터 11시30분까지 통일대전에서 스님께서 집전하는 사시불공에 동참 하여 사시불공을 올렸다
통일대전에서 사시불공후 공양실 가기전 계곡입니다. 추위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비로암 삼층석탑(毘盧庵 三層石塔)보물 제247호 / 경내 비로암 대적광전 앞뜰에 있는 이 삼층 석탑은 높이 3.71m, 폭 1.97m로 화강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보물 247호로 지정 보호되어 있다. 형태는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른 것으로, 나지막한 토단위에 2층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렸다. 사각형의 지대석과 기단 중석은 1석으로 되어 있으며, 갑석은 4석으로 덮여있고, 상층기단 중석은 4장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은 모두 4단의 받침을 갖추었고,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모양 장식인 노반(露盤)과 사발을 엎어놓은 모습의 복발(覆 鉢), 그리고 보주(寶珠)가 남아있다. 이 탑은 1966년에 도난당하였던 석재(石材) 사리호(舍利壺)가 수습되었는데, 사리호의 표면 에는 '민애대왕추숭□□복업조석탑기[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 시함통사년세재계미 무사지월십일기(時咸通四年歲在癸未無射之月十日記)'라는 명문이 있어, 신라시대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석탑임이 밝혀졌다. 이 사리호의 외함(外函)에는 사방불(四方佛)이 선각(線刻)되어 있는데, 크기는 각 면이 14.5×15.3cm이며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967년에는 해체 보수작업이 실시되었는데, 탑신(塔身) 상면에 금동합을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공 내에는 금동합의 밑 바닥과 목조 금박의 작은 탑 3기, 홍색 견포만이 남아있었다.
비로암 대적광전(毘盧庵 大寂光殿)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대적광전 주련> 世尊坐道場(세존좌도량) 淸淨大光明(청정대광명) 譬如千日出(비여천일출) 普照虛空界(보조허공계) 부처님께서 도량에 앉으시니, 청정하고 크신 광명(무량억종광명)이,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드러나듯, 널리 법계를 비추도다.
비로암 대적광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毘盧庵 大寂光殿 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 /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 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지권인인데, 곧 바로 세운 왼쪽 검지는 중생을 상징하고 감싸쥔 오른손은 불법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 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화불(化佛)이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 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부산 관음사 <백팔고찰순례단>은 동화사 대웅전에서 오전8시부터 전문포교사인 수행심 보살의 집전으로 삼귀의, 반야심경 봉송후 예불대참회문이 인쇄된 기도포와 절하는 공덕이 인쇄된 기도포를 좌복에 펴고 禮佛大懺悔文(예불대참회문)에 따라 89분의 부처님 명호를 칭명 하면서 108배를 하고 이어 발원문 봉독후 경내 각 전각에 참배하고 통일대전에서 10시부터 11시 30분 까지 동화사 두분 스님 집전으로 사시불공과 약사여래불 정근을 하고 점심공양후 12시 30분경 제20차 두 번째 순례사찰인 파계사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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