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만 특히 목회 사역자에게 있어서 소리는 몹시 중요합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며 기도를 하고 찬송을 인도하며 사람을 만나고 심방을 하고 상담을 하는 등
그의 대부분의 사역은 소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역자가 부르짖는 기도에 익숙하며
강하고 충만한 발성기도에 익숙해서 그의 소리에 강력한 영권이 흐르며
그가 인도하는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임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배를 기다리고 사모하여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역자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아는 사람들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 가르치는 사람들]로 인식됩니다.
지적인 신앙 중심인 백인들의 영향에 의해서 오늘날의 사역자들은 부르짖고 외쳐서 하늘 문을 열기보다는
많은 지식을 습득해서 그것을 잘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신약의 시대이며 각 사람이 만인 제사장이므로
사역자가 제사장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으니
사역자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개념조차 별로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역자를 훈련하는 신학의 과정에
부르짖느 기도 훈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학도 있고 교리학도 있고 전도학, 선교학도 있지만 부르짖는 기도학은 없습니다.
소리와 발성기도를 훈련하는 과목은 없습니다.
설교도, 기도도, 전도도.. 그 모든 것을 다 소리로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사역자를 훈련하는 과정에서
부르짖어서 하늘 문을 열고 하늘의 열쇠를 얻는 것은
사역자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가 스스로 하늘 문을 여는 방법을 알 때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며 돈을 의지하지 않으며
스스로 온전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훈련이 부족한 사역자들이
영적으로 연약하고 영의 분별에도 취약한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의 소리가 영의 흐름이 없으며 답답하고 막혀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교리적으로 옳으며 무난하지만 심령에 시원함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졸게 하며 공상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설교와 예배에는 결코 사람들이 졸지 않습니다.
따분한 예배에는 사람들이 항상 지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예배는 사람들이 사모하고, 사모하고 또 기다립니다.
나는 부흥사들을 비판하는 사역자들의 말을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별로 내용도 없는 부흥사들의 설교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역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에 몹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부흥사이던 그의 친구가 자신의 집회에 와 보라고, 설교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역자는 혹시 설교에 대한 좋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친구가 인도하는 부흥 집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었다고.. 신변잡기의 잡다한 이야기이며 별 내용도 없는 메시지이며
그것은 설교라고 볼 수 없다는 그러한 글이었습니다.
나는 성실하고 인격적인 사역자들의 그러한 인식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내용도 별로 없는 설교 같지 않은 설교,
유치한 설교에 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설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성경을 한 구절 읽기만 하고 대충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른 설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흥사들의 메시지는 그 내용은 단순해도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는 뭔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고 모든 사람이 다 아는 평이한 내용이지만
사람의 심금을 움직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한때 유명하던 부흥사들은
대부분 산에서 부르짖으며 나무를 붙들고 씨름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강력한 부르짖는 기도와 발성 기도의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소리가 훈련되어 강하고 힘있게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흥사들이 말을 외칠 때 듣는 이들은 무엇인가 가슴이 뻥 뚫리며 시원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에는 언어의 의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은 아주 쉬운 내용이며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씀은 듣는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릅니다.
속이 뜨거워지며 감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할 때
내용도 좋고 짜임새도 있고 논리적이며 옳지만 거기에는 힘이 없습니다.
좋은 이야기라고 머리는 끄덕이며 동의를 하지만
심령에는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가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가 달라졌다. 그의 설교가 달라졌다.
설교의 내용은 똑같지만 그러나 뭔가 다르다.
그의 설교에는 뭔가 감동과 충격을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리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영의 차이입니다.
말의 내용이 같더라도
그 말의 소리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힘의 색깔과 능력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신학교의 교수님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이 전하는 것을 자기는 다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동일한 내용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사람들이 자기의 설교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저 사람의 설교에는 울고불고 난리를 꾸미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교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동일한 내용으로 설교를 할 때 그 설교에 능력이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설교는 자신을 감동시키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교수님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용은 같더라도, 지식은 같더라도
소리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영은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똑같은 글을 읽어도 그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어떤 사람이 읽으면 졸리는 글이 다른 사람이 읽으면 사람들을 통곡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똑같은 글과 똑같은 내용이 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용의 차이가 아니고
소리에서 차이가 나고 영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소리와 영을 통해서 그 흐름이 다르며 전달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이햏야 합니다.
내가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여기저기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우편물이 가끔 오곤 했습니다.
내용물을 뜯어보니 설교 원고였습니다.
일정한 금액의 회비를 내면 매주 설교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설교를 다운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 편리한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설교는 내용도 신뢰할 수 없지만 설사 좋은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읽는 사람의 소리와 영성에 따라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소리와 영성이 바르고 충만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자료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소리와 영성이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자료와 감동적인 예화가 담긴 메시지를 읽는다고 해도
듣는 이들의 영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역자의 소리와 영의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도 좋고 인격도 훌륭한 사역자들 가운데
그 소리의 흐름이 답답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리가 약한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몹시 고생을 하며 말씀을 준비하지만
그들의 소리는 듣는 이들의 심령을 시원하게 하지 못합니다.
듣는 이들의 심령을 지루하고 답답하게 합니다.
그들은 멋진 예화를 얻기 위해서 고생하며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생하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얻은 아이디어가 사람들의 영혼에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그 사람의 영혼을 보여줍니다.
소리는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소리를 통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며 따분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는 소리에 달려 있습니다.
사역자의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소리를 통해서 나타닙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멋진 설교를 하더라도 그것은 성도의 영을 억압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역자의 영이 회복되고 소리가 회복된다면
그가 아주 단순하고 쉬운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도
성도들은 그 메시지에 충격을 받으며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떻게 사역자는 영성을 회복하며 소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해답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2권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소리의 회복은 무조건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 싫은 소리는 크게 외쳐도 듣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습니다.
소리가 영감을 주지 못하며 침체된 것은 영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소리 자체보다 영혼의 상태를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인 변화가 생기면 소리도 같이 변하게 됩니다.
목소리가 좋은 사역자들은 많습니다.
목소리가 윤택하고 부드러우며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사역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감과 충격을 주는 소리입니다.
사역자의 심령이 주님을 갈망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며 중심으로 소리를 토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무조건 큰 소리가 좋은 것이 아니며 소리 자체가 맑고 아름답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리는 크지만 공허함을 주는 소리가 있습니다.
소리가 듣기에 그리 아름다운 것도 아니지만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는 소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소리는 맑고 좋지만 감동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심령을 다하여 부르짖는 기도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령이 뻥 뚫리고 영감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때 사역자의 소리는 달라집니다.
그것은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훈련인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소리의 훈련과 변화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사역이란 예배를 인도하는 것뿐이 아니고 인간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약한 이들은 마음도 약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부드럽지만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로하는 것을 잘 하지만 사람을 리드하기 어려워합니다.
성도들을 잘 인도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심령이 강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연약한 사람들도 있지만 공격적이고 성격이 괴팍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사랑으로만 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강한 심령과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역자들은 그러한 이들을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소리가 약한 사역자들은
정신병에 걸리기 쉬울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로잡지 못하므로
결단이 필요할 때에는 눈치만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하나됨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용기가 부족해서 참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음에 눌림과 상처가 많아도 내색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꾸 속병을 쌓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몸과 마음이 종합병원이 되어 가는 사역자와 사모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천국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기쁨과 영광은 모두 악한 영들을 다 물리치고 승리한 후에 오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만이 악한 영들을 기도로 물리치고 그 실재하는 천국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심령이 여리고 약한 사람은 상처받고 눌리기에 바쁘며 승리와 해방을 누리지 못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힘들고 지쳐서 하나님이 사역의 길로 부르신다고
신학교로 가려고 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씨름을 하는 것보다
은혜가 있는 교회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신학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은 세상의 일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리드할 수 있는 강력함이 없다면 사역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목회를 잘 하고 사람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사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업 사원을 해도 잘 해서 실적을 많이 올릴 것이며
사업을 해도 많은 거래처를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로잡을 수 있는
영적인 힘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에게는 무엇보다도 리더십과 능력과 강건함이 필요합니다.
온 세상이 반대하고 대적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강렬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강한 사람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분쟁이 싫고 온건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타협입니다.
사역자의 강력한 리더심 아래서 비로서 진정한 사람의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자의 강건함은 소리의 훈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리가 약한 사람은 결코 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약하고 어물거리는 사람은 결코 강한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역자는 반드시 소리의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짖느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훈련하고 강력한 영권과 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역자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의 능력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삶과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사역자의 기본입니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역자들은
조그만 소그룹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좋아하지만
대중 설교에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령이 강건하지 않아서 전체의 회중을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대형집회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대형 집회에서는 설명하고 소근거려서는 좌중을 사로잡을 수 없으며
뜨거운 심령으로 강력하게 외치고 선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명과 부르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며
상황에 따라 용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뜨겁고 강하게 외친다면 그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이 부르짖는 기도 훈련을 통해서 심령이 강건해진다면
그는 소그룹이나 큰 집회나 상관없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집회에서 강력하게 선포하고 부르짖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들을 부수고 초토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집회를 앞두고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으며 설교준비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강한 용사가 전투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자가 먹이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오늘날 고요하고 조용한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조용함과 평화로움이 있지만 강력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복음의 역사도,
영혼에 충격을 주고 변화를 일으키는 강렬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조용한 교회와 조용한 예배는 주로 노인들이 찾아옵니다.
심령이 약한 사람들만이 찾아옵니다.
젊은이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떠날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활기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싸움도 없겠지만, 온건함과 무사함이 있겠지만
넘치는 천국의 희열과 행복감도 또한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강렬한 영이 거기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지금은 시들어버린 유럽의 교회 같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부르짖기 시작할 때 교회의 공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좋아하지만 어떤 이들은 일어나 공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그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오늘날 강력한 사역자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강력하게 외치고 선포하며 집회를 사로잡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하게 할 사역자가 얼마나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은 그러한 사역자를 찾아다닙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사역자들을 간절하게 찾고 구합니다.
심령이 폭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예배와 교회를 성도들은 기다립니다. 사모합니다.
그러한 예배에서 그들은 더 이상 졸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중심을 주님께 쏟아 붓는 예배..
목숨을 주님께 두리는 예배..
성도들은 그러한 예배를 얼마나 많이 그리워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숫자에 관심을 가지며 큰 건물을 짓는데 관심을 가집니다.
누가 유명한 사역자인지, 누가 성공한 사역자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사역자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잘 알고 있는 주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한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심령을 폭발시킬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르짖는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늘이 열리고 사역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알고 있고 배워왔던 모든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는 실제적인 천국의 역사
- 그것이 부르짖는 기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에서부터 예빼는 달라지고 교회도 달라지며
천국의 영광과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 부르짖는 사역자가 많이 일어날 때
우리는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영광이 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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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