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화씨지벽(和氏之璧)’의 유래
『한비자(韓非子)』 「화씨편(和氏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에 화씨(和氏)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초산(楚山)에서 옥돌을 발견하여 여왕(厲王)에게 바쳤는데, 여왕이 옥을 다듬는 사람에게 감정하게 하였더니, 보통 돌이라고 했습니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여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에 처해 그는 왼쪽 발을 잘랐습니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또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는데, 무왕이 옥을 감정시켜보니 역시 보통 돌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무왕 역시 화씨가 자기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하고는 오른쪽 발을 자르게 하였습니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초산 아래에서 그 옥돌을 끌어안고 사흘 밤낮을 울었기에, 나중에는 눈물이 말라 피가 흘렀습니다. 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천하에 발 잘리는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어찌 그리 슬피 우느냐?”고 까닭을 물었습니다. 화씨가 “나는 발을 잘려서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벌을 준 것이 슬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문왕이 그 옥돌을 다듬게 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모습을 드러냈기에 이 명옥을 그의 이름을 따서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고 이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는데,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이를 탐내 15개의 성(城)과 맞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양국 간에 갈등이 조성되기도 했으며, 혜문왕은 걱정이 생겼습니다.
내주자니 소양왕이 받고도 15성의 약속을 모르는 척할지도 모르고, 거절하자니 이를 구실삼아 진이 쳐들어올지도 모르기에, 왕은 중신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목현이 나와서 식객 중 인상여라는 자가 지모와 용기가 있으니 그를 사자로 보내면 능히 난국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하고 천거하였습니다.
인상여(藺相如)는 즉시 진으로 가 지니고 갔던 화씨지벽을 일단 소왕에게 바쳤습니다.
구슬을 받아 쥔 왕은 “과연 훌륭하구나!” 하면서 감탄하면서 좋아할 뿐 15성 이야기는 조금도 비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예기했던 인상여는,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고 속여 말하니 소왕은 무심코 내주었습니다.
인상여는 즉시,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하였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하고는 구슬을 빼내어 조국에 돌려보냈습니다.
인상여가 ‘구슬을 온전히 가지고 조나라로 돌아왔다.[完璧歸趙]’고 하여 흠이 없는 구슬이나 결점이 없이 훌륭한 것을 일러 완벽(完璧)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호탕한 소양왕은 할 수 없이 인상여를 정중하게 놓아 보냈기에,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璧)’이라고도 불렸으며, 또 ‘화씨지벽’은 또 ‘변화지벽(卞和之璧)’ ‘화벽(和璧)’이라고도 합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가 이것을 손에 넣어 재상인 이사로 하여금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받은 명이여, 그 수명이 길이 번창하리라)’이라는 문구를 전서(篆書)로 새겨 도장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가 전국옥새(傳國玉璽) 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시황제가 배를 타고 동정호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는데, 황급히 옥새를 호수에 던지고는 신령께 빌자 물결이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8년 뒤 시황제의 사신이 밤에 화음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돌연히 어떤 사람이 나타나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는 용왕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옥새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이 함양을 함락시킨 유방에게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한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습니다.
전한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왕망이 잠시 이 옥새를 빼앗았으나, 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되찾았으나, 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손견과 원술을 거쳐 조조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 후량과 후당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가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합니다.
이후 몇 차례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와 같이 전국옥새는 진 시황제 이후로 천하를 제패하는 사람이 소유함으로써 황제나 황권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이를 차지하는 사람이 곧 천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