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어울림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한글을 구현할 수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땠을까? 현대인의 일상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컴퓨터와 각종 스마트 기기는 ‘키보드’를 통해 우리의 말을 구현한다. 한글을 입력하는 키보드가 없었다면 우리의 말과 글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과 기계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한글 키보드를 개발시킨 인물은 누구일까?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공병우 박사를 통해 한글 키보드의 발전사를 살펴보자.
한국 최초의 안과 의사 ‘공병우’, ‘한글’에 눈뜨다
▲ 공병우 박사
출처 : 동아일보
1938년 서울 안국동에 한국 최초의 안과 병원을 개업한 잘 나가는 안과 의사였던 공병우 박사는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뒤바꾼 한 명의 눈병 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독일 베를린 종합대학에 조선어학과를 창설한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었다. ‘한글로 우리민족이 글눈을 떠야 문화의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이극로 선생의 말로 인해 공병우 박사는 한글에 눈 뜨게 된다.
일본 학교에서 의학공부를 한 공병우 박사는 나이 마흔이 다 되어 해방을 맞은 이후에야 정식으로 한글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한글의 우수성을 몸소 느낀 공병우 박사는 이후 일본어로 된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여 눈병 예방 한글 안내문을 무료 배포하는 등 전국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다. 나아가 일본어로 된 자신의 안과학 저서인 ‘신소안과학(新小眼科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한글 타자기에 한계를 느껴 직접 한글 타자기를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1948년 한국 최초로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개발한다.
본격적으로 한글 타기자기를 개발하다
광복과 함께 한글 전용 교육과 한글 가로쓰기가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며 한글 타자기 실용화 문제가 부각된다. 기존의 4벌식 타자기는 글자를 찍을 때마다 해당 음절 글자가 받침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모음이 가로인지 세로인지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또한 문장을 가로로 찍어 세로로 읽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 가격 역시 높아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1949년 ‘조선 발명 장려회’는 한글 타자기를 현상 공모하였고 이 공모전을 통해 공병우 박사가 한글 기계화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 4벌식 글자판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www.hangeul.go.kr)
당시는 한글학자들을 중심으로 가로쓰기가 독서에 유리하다는 논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찍고 종이를 세로로 돌려서 읽어야 하는 이원익의 5벌식, 송기주의 4벌식 타자기는 많은 단점에 노출되어 있었다. 공병우 박사 역시 가로쓰기가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가로쓰기가 가능한 한글 타자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세벌식 타자기의 개발
공병우 박사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할 때 가장 큰 고민은 받침 처리였다. 처음에는 두벌식을 고안했으나 불편함을 발견하여 쌍초점 방식의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다. 세벌식 타자기는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창제 원리를 따라 ‘자음-모음-받침’을 차례로 찍을 수 있도록 자판에 반영한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판기의 경우 ‘자음-모음’에 자음을 한 번 더 찍어 받침을 완성하는 형태이며, 세벌식은 자판 오른쪽에 자음, 왼쪽에 모음, 왼쪽 끝에 받침을 배치한 형태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세벌식 타자기는 가로 모아쓰기를 실용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타자기이자 영문 타자기보다 높은 속도를 낼 수 있어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받는다.
공 속도 한글 타자기 제작
▲ 미국 언더우스(Underwood) 사와 함께 제작한 ‘공 속도 한글 타자기’
출처 : 세종대왕기념사업회(sejongkorea.org)
쌍초점 타자기로 1949년 전국 과학전람회에서 국회의장상을 받은 공병우 박사는 미국 언더우드(Underwood) 회사의 도움으로 1950년 더 발전된 형태의 세벌식 ‘공 속도 한글 타자기’ 시제품을 제작하여 상품화한다. 비슷한 시기에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결국 상품화 하지 못했지만 속도를 중시하는 군대에서 높은 속도감으로 큰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6.25 전쟁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남한으로 유입되어 남한은 북한보다 한자 사용률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 글씨 대신 타자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타자기로는 한자를 입력할 수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한자 사용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후 한글 사용이 자연스레 증가한다.
세벌식 타자기의 진화
▲ 공병우 타자기 최종자판 구성
이후 입력 속도를 높이고 손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세벌식 타자기 연구가 계속된다. 1972년 공병우 박사는 기계식 타자기로는 유일하게 한글과 영문을 함께 입력할 수 있는 한영 겸용 타자기를 개발한다.
한편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맹인재활센터를 설립하여 점자와 한글 타자기 사용법 및 제작 기술을 가르친다. 1971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와 중국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음부호 타자기를, 1989년에는 시각장애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다. 개인의 사익보다는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의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 (좌측부터) 한영 겸용 타자기 신문광고, 공병우 한영 타자기
출처 : 1974년 6월 19일 경향신문, 국립한글박물관(www.hangeul.go.kr)
한글 타자기 연구와 함께한 한평생
세벌식 타자기의 경우 받침이 있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길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짧게 나타나 ‘빨랫줄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는 한글의 조형미보다도 한글의 기능성을 살리고자 했던 공병우 박사의 선택이었다. 두벌식 글꼴의 경우 모두 11,712자의 개별 글자 디자인이 필요하지만 세벌식 글꼴의 경우 67개의 자소만 디자인하면 되어 실용적이다. 공병우 박사는 실용성이 곧 진정한 미적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갈한 글자체에 대한 요구가 생긴 수요자들은 다른 유형의 타자기를 찾게 되었고 결국 타자기 시장은 다변화된다.
▲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한글글꼴
이후 1968년 훨씬 느리고 복잡하지만 네모반듯한 글자 모양을 칠 수 있는 4벌식 타자기가 표준 자판으로 공표되고, 1980년 최종적으로 두벌식 타자기가 표준 타자기로 채택되며 세벌식 타자기는 사람들에게서 잊혀 진다.
★ 두벌식 자판과 세벌식 자판, 뭐가 다를까?
두벌식 자판은 키보드의 왼쪽에는 자음, 오른쪽에는 모음을 배치해 ‘자음-모음’이나 ‘자음-모음-자음’ 순서로 글자를 입력하도록 되어 있다. 된소리와 일부 모음(ㅒ, ㅖ)은 시프트키와 자음을 함께 눌러 입력할 수 있고, 겹자음과 겹모음은 두 자판을 연속해서 눌러 입력할 수 있다. 하지만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나고 사용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의 피로가 많이 쌓이며 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이 있다.
벌식 자판은 자음을 오른쪽에, 모음을 왼쪽에, 받침을 왼쪽 가장자리에 옮긴 것이다. 글자를 찍으면 받침이 있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길고, 받침이 없는 글자는 세로 길이가 짧았다. ‘모아치기**’가 가능하고 ‘연타’가 적어 속기용 한글 입력 방식을 제외하고는 글자 입력 속도가 가장 빠르다. 또한, 두벌식 키보드의 맨 윗줄 자판을 누르는 비율은 20%나 되지만 세벌식 키보드는 맨 윗줄 자판의 사용이 1%에 불과해 자판의 구성이 훨씬 인체공학적이다.
- * 도깨비불 현상 : 예를 들어, ‘우리’를 치는 동안에 ‘울’자가 나타났다 ‘ㅣ’를 치면 ‘우리’로 바뀌며 시간차가 생기는 현상
- ** 모아치기 : ‘한’이란 글자를 ‘ㅎ+ㅏ+ㄴ’ 순으로 입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한’으로 모아주는 것
그럼에도 공병우 박사는 1988년 한글문화원을 열어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함께한 박흥호와 함께 세벌식 글자꼴과 자판배열을 완성하고 세벌식 입력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도 젊은 프로그래머 강태진, 정내권, 이찬진 등에게 한글과 컴퓨터를 창업하도록 지원하는 등 한글의 기계화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보인다.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천대해왔다. 그래서 나는 한글 기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즐겨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해왔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공병우 박사
공병우 박사의 인생은 온통 ‘한글’에 맞추어져 있었다. 1995년 88세를 일기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더 과학적이고, 더 빠르고, 더 외우기 쉬운’ 자판 연구에 매진했다. 그에게 있어 한글 타자기를 고안하는 일은 한글의 과학성을 증명하는 일이자 한글문화 발전을 기약하는 일이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공병우 박사는 한글을 기계로 쓸 수 있는 길을 닦아주었다. 비록 공병우 박사가 한평생을 바쳐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는 현재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세벌식 타자기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박사의 한글 기계화 정신은 우리 생활 곳곳에 남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