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回光返照)와 여지(餘地)
인간은 해마다 이맘때면 누구나 벌써 가을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울긋불긋 단풍 감상을 하다보면 곧 잎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어 닥쳐 한 해를 보내는 겨울이 닥아 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곧 동지섣달을 넘기면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남는 때가 금세 찾아와 보내는 한해의 아쉬움과 새해를 맞는 기대가 교차하게 마련이다.
어느 때 보다 을미년(乙未年) 한 해도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역사적으로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나 올해에도 큰 변고들이 많았다.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고, 한심한 갑 질도 있었다. 화재도 많았고 크고 작은 불감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의 쓰라린 사고도 너무 많았다. 작년에 있었던 세월 호 참사를 회고 해 보면 ‘화살에 맞은 경험이 있는 새는 활모양의 굽은 나무만 보아도 겁을 낸다’는 고사처럼 유사한 사고와 일에 가슴이 철렁일 때도 많았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뜻이다. 또는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춰져 하늘이 잠시 동안 밝아지는 자연 현상을 이르기도 하고,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이 잠시 동안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비유하거나, 사물이 쇠멸하기 직전에 잠시 왕성한 기운을 되찾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회광반조라는 말의 뜻을 불교에서는 ‘빛을 돌이켜 스스로에게 비춘다는 말로,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에게 내재된 영성(靈性)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회광반조라는 말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다가 죽을 때가 임박하면 온전한 정신이 한번생기고, 바로 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지나온 자기 일생을 돌아보며 반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유래된 말로 참으로 참된 인간의 본성이 담긴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랑하던 처가 오랜 병고(病苦)끝에 죽음을 앞둔 꼭 3일 전의 밤, 내손을 꼭 잡고선 “여보 미안해요” “나 내일 모레 죽을 거야”라고 말을 건네 왔다. 그래서 나는 “여보, 왜 그런 말을 해, 누워있어도 좋으니 죽으면 안돼요” “그리고 이대로도 좋아요. 우~웅, 내가 말했듯이 우리가 다 죽고 다시 환생해서 결혼할 때는 나는 다시 당신을 아내로 맞을 것이요, 내 아들과 딸을 다시 가족으로 삼고 가정을 꾸밀 꺼야....내 말 믿지?” “여보 사랑해요” 하고 말은 건넸드니 자기도 “사랑했어요. 정말” 그리고 아파서 몽롱했던 기억에서 많은 즐거웠던 이야기와 여러 추억들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삼일 째 되던 날 정확히 눈을 감고 하늘나라고 가버렸다.
촛불은 다 타서 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번 확 타오르고, 태양은 지기 직전에 화려한 색깔을 내뿜고, 사람도 늙어서 죽기직전에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새로운 미래의 다짐과 꿈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중요하다. 많은 선현(先賢)들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그 바탕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꾀으로지 않았었다.
핵심감정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감정이 기억으로 굳어져, 그와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현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자동적으로 과거의 경험과 유사한 방식의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아무리 과거가 현재를 왜곡되게 지배할 수도 있다 할지라도 지나친 자기 확신보다는 과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한 법이다.우리가 늘 상 일을 시작할 때와 결과를 보면 발을 헛딛는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여지(餘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발을 딛는 것은 몇 치의 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짧은 거리인데도 벼랑에서는 엎어지거나 자빠지기 십상이다. 또한 좁은 다리에서도 번번이 물에 빠지곤 한다. 어째서 그럴까? 아마도 자기 곁에 여지(餘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좋은 예의 선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보자.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아호를 쓴 김정국(金正國1485~1541,성종과 중종 때의 문신)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에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해(1518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봉직하고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삭직(削職)되었다. 김굉필은 기묘사화 시 원흉으로 지목된 중심인물이었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었기 때문에 기묘사화를 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도 어쩔 수 없이 삭직이후 시골집 고양(高陽)으로 낙향(落鄕)해 학문에 전심했고 이때 많은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팔여거사(八餘居士)란 아호도 이때 자호로 만들어 썼다고 전한다.
즉 팔여(八餘)란 여덟 가지가 넉넉하고 넘친다는 뜻인데, 녹봉(祿俸)도 끊긴 그가 팔여거사란 아호까지 지어 쓰기에 그 뜻을 몰랐던 친구가 내용을 묻게 되었다. 김정국은 답을 구하는 친구에게 설명함과 함께 그런 그가 한적한 시골집에 살면서 팔여(八餘)란 여덟 가지의 넉넉함의 글을 남겼다. 그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첫째로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둘째는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셋째로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며,
넷째는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읽고,
다섯째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며,
여섯째는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일곱째로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네.
여덟째 이 일곱 가지를 즐길 수 있기에 ‘팔여‘라 했네. 라고 답했다.
참으로 마음의 여지(餘地)를 듬뿍 지닌 팔여거사가 아닌가?
사람이 한 세상을 살고 갈 때에는 의(義)의 여지가 있어야 하며, 덕(德)이 넉넉해야 하며, 원(願)이 커야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내가 쌓은 공(功)을 몰라준다고 한할 필요가 없다. 진리는 공정한지라 우리가 쌓은 공이 무공(無功)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에서 여지를 많이 길렀느냐 못 길렀느냐가 문제이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한 번 회광반조 해보자.
군자가 자기를 세우는 것 또한 이와 다를 게 없다. 지성스러운 말인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지극히 고결한 행동도 혹 의심을 부를 때가 있다. 이 역시 모두 우리들의 언행과 명성에 여지가 없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이 여지의 유무에서 군자와 소인이 갈리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여지가 있어야지, 여지가 없으면 군자는 못 되는 법이고 바로 서지 못한다.
그럼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고 여지를 넓혀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보내며 마지막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가 빙 둘러앉았다. 철학자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 판에 잡초가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를 모두 없앨 수 있느냐?”제자들은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답했다. “삽으로 땅을 갈아엎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 버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철학자는 제자들의 대답에 고개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것이 올 해의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한 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거라! 만약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다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자.”
일 년 뒤, 제자들은 무성하게 자란 마음 속 잡초 때문에 고민하다 다시 그 곳으로 모였다. 그런데,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들판은 곡식이 가득한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스승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팻말 하나가 꽂혀 있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자라는 잡초는 ‘선(善 禪)’의 마음으로 뽑아 낼 수 있다.”
한 해 무성하게 자랐던 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내면 어떨까 싶다. 밭에 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버려두면 악의 잡초가 쉴 새 없이 자란다. 마음속의 육적(六賊)의 잡초를 뽑는 것이 수행이다. 더 부연(敷衍)하자면, 마음속의 악과 부단히 싸우는 것이요, 마음속에 일어나는 도둑을 물리치는 것이다. 육적이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번뇌를 일으키는 여섯 도적들과 같다’는 뜻이리라.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기에 사고치고 망치는 경우를 우리는 매일 접하고 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