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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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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
재위 | 1455년 ~ 1468년 |
전임자 | 정순왕후 |
후임자 | 안순왕후 |
왕대비 | |
재위 | 1468년 ~ 1469년 |
전임자 | 정순왕후(의덕왕대비) |
후임자 | 소혜왕후(인수왕대비) 안순왕후(인혜왕대비) |
대왕대비 | |
재위 | 1469년 ~ 1483년 |
전임자 | 없음(조선 최초의 대왕대비) |
후임자 | 소혜왕후(인수대왕대비) 안순왕후(인혜대왕대비) |
별명 | 낙랑부대부인, 자성왕태비, 자성대왕대비 |
배우자 | 세조 |
자녀 | 세희공주 덕종(의경세자) 의숙공주 예종(해양대군) |
부친 | 파평부원군 윤번 |
모친 |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 |
출생 | 태종 18년(1418) 12월 8일 (음력 11월 11일) 홍천(洪川) 공아(公衙) |
사망 | 성종 14년(1483) 5월 6일 (음력 3월 30일) 온양(溫陽) 행궁 |
능묘 | 광릉 |
종교 | 불교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년 12월 8일 (음력 11월 11일) ~ 1483년 5월 6일 (음력 3월 30일))는 조선 세조의 왕비이다. 시호는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1469년부터 1476년까지 손자 성종 대신 섭정을 하였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坡平府院君 貞靖公 尹璠)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의 칭호를 받았고, 또한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이면서, 후에 문정왕후, 정순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와 더불어서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가장 강력한 정치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증손자인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는 그의 오빠 윤사분의 증손녀로 종증손녀였으며, 문정왕후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남동생 윤사흔의 후손들이었다.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1418년 충청남도 홍주군에서 태어났으며, 1428년 세종의 적차남 진평대군(세조)과 혼인한 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소생으로는 훗날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 예종, 의숙공주, 세희공주 가 있다. 세희공주는 금계필담의 존재하는 인물로 김종서의 손자와 혼인했다고 한다. 세조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조카의 자리를 빼앗고 유배보내자 공주의 자리를 박차고 연을 끊어 나왔다고도 전해내려왔다. 1453년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고 한다.[1]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정희왕후는 여장부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가 되었고,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뒤 자신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조선 최초의 수렴첨정을 하였다. 여기서 수렴청정은 역사드라마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어린 왕의 뒤에서 발을 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신하들과 토론한 내용을 말하면 정희왕후가 적절한 조언을 주는 방식의 정치를 말한다.
예종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원자가(제안대군)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의경세자에게도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1]
섭정 당시에 그녀의 과단성이 있는 성격과 훌륭한 정치적 감각 덕분에 조정은 평화로워 안정기를 구가하였다고 한다. 1483년(성종 14년) 음력 3월 30일 온양 행궁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위치한 광릉(光陵)으로, 남편 세조의 능과는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가 파평 윤씨(坡平 尹氏)
왕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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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왕후, 문정왕후, 장경왕후, 숙빈 윤씨는 모두 고려 군부판서(軍簿判書) 영평군(鈴平君) 윤척의 후손들로, 윤척의 다섯 아들 중 셋째 문하평리 윤승순과 다섯째 아들 판도판서 윤승례의 후손들이다.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는 윤승순의 4대손으로, 윤곤의 후손이다. 윤곤-윤삼산-윤호-정현왕후로 가계가 이어진다. 윤곤은 세조의 장인인 윤번의 4촌 형이자 정희왕후의 당숙이 되며, 윤호는 윤번의 재종손이자 정희왕후의 재종질이 된다. 윤곤의 둘째 아들이자 윤삼산의 형인 윤희제의 손자(윤곤-윤희제-윤은-윤사로)는 윤사로로, 윤사로는 성종계비 정현왕후와 윤은로, 윤탕로 남매 및 윤필상의 6촌 형님이 된다. 당숙인 윤호와 비슷한 또래였던 윤사로는 일찍이 세종의 서녀인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부마 영천위가 되었다.
정희왕후는 윤승례의 손녀로 좌의정 윤번의 딸이다. 윤번은 윤곤의 사촌 아우이자 윤호의 재종조부가 된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는 윤승례의 5대손으로 윤번의 4대손이다. 정희왕후의 오빠인 윤사분의 가계로 윤번-윤사분-윤보-윤여필-장경왕후, 윤임 남매로 이어진다. 또한 윤임 사사 때 유배된 윤여해는 윤여필의 동생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윤번의 아들이자 정희왕후의 남동생이며 윤사분의 동생인 윤사흔의 후손들이다. 윤번-윤사흔-윤계겸-윤욱-윤지임-문정왕후, 윤원형, 윤원로, 윤원량 남매로 이어진다. 또한 숙빈 윤씨는 윤원량의 딸이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와 제2계비 문정왕후는 9촌 숙질간이며,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문정왕후의 친정조카이자 시어머니 되는 장경왕후의 10촌 종손녀가 된다.
또한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는 성종의 제3계비 정현왕후의 11촌 조카가 되며 제2계비 문정왕후는 정현왕후의 12촌 손녀뻘이 된다. 숙빈 윤씨는 정현왕후에게는 족증손 뻘이 된다.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 장경왕후에게는 11촌 숙부, 문정왕후에게는 12촌 족대부, 숙빈 윤씨에게는 13촌 증대부뻘이 된다.
최근 수정 시각 :
정희왕후(貞熹王后) | ||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 | ||
출생지 |
홍천(洪川) 공아(公衙) | |
사망지 |
온양행궁 | |
본관 |
파평(坡平) | |
배우자 |
세조(世祖) | |
아버지 |
파평부원군 윤번 | |
어머니 |
흥녕부대부인 인주이씨[1] | |
생몰 |
음력 |
1418년 11월 11일) ~ 1483년 3월 30일(향년 66세, 만 64세) |
양력 |
1418년 12월 8일 ~ 1483년 5월 6일 | |
재위 |
1455년 ~ 1468년(왕비) |
조선 역사상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비이다.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정실. 처음에는 그냥 대군이었던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시집왔다가,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서 부부인에서 왕후로 출세한 인물이다. 상궁들이 자신의 언니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본 여동생이 더 낫다고 여겨서 배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세조는 그녀를 매우 아꼈다고 하며, 금슬이 좋았던 것 같다.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인물로, 예종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한명회 및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자을산군을 성종으로 즉위시켰다고 한다. 그 당시 예종의 아들은 너무 어렸고, 월산군이 병약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러 정황상 자을산군이 한명회의 사위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건 밑바탕이 불안하다면 한명회를 끌어들이는 것이 더 낫다 여긴 듯.
처음 신하들이 수렴청정을 부탁하자, 자신보다는 한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더 낫지 않냐고 거절한 기록이 있다. 이걸 보면 한자는 몰랐던 것 같다. 그 당시 여자들이 한자 같은 걸 배울 기회가 있었겠냐만은....
수렴청정을 하는 방식은, 직접 나와서 한 게 아니라 성종이 자신을 찾아와 의논해서 결정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활약하던 시기에 자신의 남편이 벌인 일을 대강 정리하고, 성종의 정통성에 신경을 써서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증하고(덕종) 의경세자의 비(소혜왕후)를 예종의 비(안순왕후)보다 더 높게 취급한 듯 하다. 그 정도는 해 둬야 성종의 정통성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 듯. 성종이 20세가 될 때까지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성종은 15세를 넘겨가면서 대다수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냥 형식적으로 하고 있고 실제로는 성종이 거의 다 처리했을 듯 하다. 정말 중요한 일만 정희왕후와 의논해서 결정한 듯하다.
조기에 넘겨주지 못한 것은, 15세쯤 되던 시기에 한명회의 딸이었던 부인이 죽어서 그 때 권한을 넘겨주었다가는 불필요한 오해를 살 지 몰라서였던 듯 하다. 한마디로 안정된 상태에서 넘겨주기 위해서 미룬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기다린 덕분에 그 시기에 높은 권력을 누리던 인물은 하나하나 사라져갔고 그때가 되서야 성종에게 넘겨준다. 처음 수렴청정을 거두는 거라서 그런지 처음 거둘 때 반대도 많았던 모양. 그 이후로는 정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편안히 죽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보통 며느리 인수대비와 갈등관계인 손자며느리 폐비 윤씨를 옹호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이제이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론 내지까지 내리며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를 적극 도왔다[2]. 하지만 인수대비와 다르게 아쉽게도 증손자 연산군이 즉위하기 전에 먼저 사망해서 패륜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정인 파평 윤씨 가문만을 편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사극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사건들이 즐비한 시기에 살았던 덕에 사극에 꽤 간간히 나오는 편. 보통 세조의 부인보다는 인수대비의 시어머니자 성종의 할머니, 왕실의 최고 어른의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KBS에서 방영한 왕과 비에서의 정희왕후. 중견 탤런트 한혜숙이 열연하였다. 수렴청정과 며느리 인수대비와의 갈등 등의 모습이 그려졌지만, 강단있는 여성보다는 단아한 여성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드라마 자체가 대하 사극이었던 관계로, 긴 시간동안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대비 시절이면 자성왕대비 혹은 자성대비가 맞는 표현이지만 애초에 폐비 윤씨와 김처선이 첫사랑인 사극이니 신경쓰지 말자
SBS에서 방영한 왕과 나에서는 중견 탤런트 양미경한 상궁이 정희왕후 역할을 맡았다. 전체적으로 기쎈 정치인의 면모보다는 자애로운 시어머니, 할머니, 시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수렴청정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손자며느리 폐비 윤씨의 죽음을 슬퍼하다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3]
KBS에서 방영한 공주의 남자에서는 중견 탤런트 김서라가 역할을 맡았다. 계유정난 전에는 남편인 수양대군의 야심을 위해 집안을 단속하고 딸인 세령에게도 냉정한 어머님의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지만, 남편이 왕위에 오르고 김승유를 죽이기 위해 세령조차 노비로 강등시키고 미끼로 사용하는 등 폭주하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에게서 등을 돌려 세령과 김승유를 살려주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게 해준다. 결국 마지막 회에서 노년의 세조가 늙어서 힘이 다 빠졌는지 형수님의 원혼을 보고 기가 허해졌는지 우연히 세령 부부를 보고 정희왕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훈훈하게 마무리.[4]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 부부인 시절
성종대 대왕대비가 된 정희왕후주사아아아아앙!!!!
JTBC에서 방영한 인수대비에서는 중견 탤런트 김미숙이 계유정난 직전의 부부인부터 사망시 자성대왕대비까지의 정희왕후를 열연하였다. 전체적으로 야심도 있고 정치감각도 있는 여장부의 모습을 훌륭히 그려냈으며,[5] 특히 노년에 병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와의 끊임없는 갈등을 그리며 권력게임+고부갈등을 긴장감있게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똑똑한 한자를 아는 인수대비에게 은근한 굴욕을 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글을 아는 며느리보단 문맹인 시어머니가 나은 법이지 같은 작가의 전작인 왕과 비의 정희왕후가 외적으로 강단 있는 모습보단 단아한 분위기를 많이 풍기는 반면 인수대비에서의 정희왕후는 상대적으로 기가 쎈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극 초반에는 엄격한 시어머니와 정치적 내조를 통해 남편을 돕는 강인한 아내로서의 모습이 그려졌으며, 세조 사후 예종시기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왕실과 가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며느리인 인수대비가 파평 윤씨 일문의 비리가 담긴 장부를 들이밀며 정계 은퇴를 강요하면서 마지막 갈등이 폭발했고 결국 굴복하여 은퇴한 후에는 극 초반과 같이 화해모드로 돌아서다 손주며느리인 폐비 윤씨의 사사 소식을 들으며 파란만장했던 일상을 회고하고 사망하는 것으로 극에서 하차했다.
전 임 정순왕후 |
조선 역대 왕후 1455년 음력 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
후 임 안순왕후 (장순왕후) |
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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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조 | |
조선 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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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후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