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게소를 나와 산행 시작 30여 분을 걷는데 채석장이 나오더니 더 이상 갈길이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나와 살펴보니 등산로입구 표지판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첫걸음부터 1시간, 약 4km를 알바로 허비한 셈이다. "왠지 초장부터 조짐이 좋지않군." |
할미봉 오르는 길의 이 이정표도 모두 찢어져 방향과 거리를 알 수조차 없었다. 이 부근에서도 길을 잘못들어 40여 분간 헤맨다. 낭떠러지가 있는 고개 끝부분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야 꼭꼭 숨어있는 등산로를 겨우 찾았다. "휴우~ 담부턴 산행대장 안 할래." 일행들에게 미안해 죽겠는데 그들은 여유로운 농담으로 맘을 편케 해준다. |
낮이라면 그다지 어렵지않은 산길일텐데 힘들게 할미봉에 도착했다.
할미봉을 지나 서봉으로 가는 길이 거칠고 힘들다던데...
아니나 다를까. 할미봉 직후부터는 바위벽 로프구간의 연속이다.
아마 이 구간이었던 것 같다. 아득한 로프하강길을 내려가야 하는 건지, 또 알바를 하는 건 아닌지 자꾸 망설여진다. 깜깜하고 손이 곱을 정도의 추위에 내려다보기에도 위험천만했기 때문이다. |
길 뒤엉켜놓고 밧줄 저만치 늘어뜨려
우릴 겁주려해도 우린 가야만 하네.
왜냐하면 난 내 사랑하는 일행들에게 얘기했거든.
무룡산에서 꿈틀거리다 춤추며 솟아오르는 여의주 꽉문 용을 보여주기로 했고
향적봉에서 물씬 풍기는 인자의 덕내음을 맡게 해주기로 말일세.
그리고 여기 덕유산은 우리가 거쳐지나야 할 수많은 행로의 중간거점에 불과하단 걸 명심하시게.
그러니 이는 바람 그만 잠재우고 심술궂게 흐르는 안개도 거둬주시게.
날 세워 잔뜩 찌푸린 미간 펴고 우리와 맞서려하지 마시게.
우린 멈출 수 없단 말일세.
뒤에 알았지만 할미봉을 한참 지나 서봉 구간부터가 국립공원지역이란다.
육십령부터 할미봉을 지나 교육원삼거리 구간까지는 덕유산 국립공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기랄, 그러니 이정표도 쓰러지고 찢어지고 엉망이었구나."
속으로 핑계는 댔지만 산행리더가 그런 정보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산행에 임했다는 것이 자책된다.
겨우 서봉이다. 지금은 지난 실수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짙은 안개가 빠르고 습하게 흐른다. 모두에게 잠이 몰려온다. 더욱 조심해서 안전하게 전진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서봉을 지나서도 또 한 번 시행착오를 겪고만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온 길을 되돌아가다니... 돌아버리겠군."
20여 분을 낭비, 세 번씩이나 알바를 하니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고생하며 남덕유산 정상까지 왔다.
너그러운 덕을 지녀 덕유산이라 하지않던가.
우리 대원들은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준다. 속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4년 전 겨울, 남덕유산 정상을 오르는 가파른 철계단과 혹독한 추위가 떠오르고
다시 첩첩산들 위로 희끄므레 붉게 비치는 서광이 눈에 선하다. |
역시 남덕유산 정상은 세찬 칼바람이 몰아쳐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 인증샷만 찍고 100m 아래 삼거리로 다시 회귀한다.
우중 육구종주, 덕유주능선길에서 축축하게 젖다
굽이굽이 령과 재가 반복되지만 여기서부터 덕유산 주능선길이라 지금까지 온 것보다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덕유산 16km 주능선엔 1,000미터 이하로 낮아지는 구간이 없다고 하니까. 단지 몰려오는 졸음이 변수다.
힘들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텐데 옆길 300m의 삿갓봉을 굳이 들르고야 만다.
일품의 일출광경을 볼 수 있는 삿갓봉이지만 가랑비를 동반한 습한 운무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덕유산의 멋진 산그리메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동으로 겹겹 산줄기들이 중첩되는 장대함과 남으로는 횡으로 펼쳐진 지리산능선을 바라보는 게
덕유산종주의 큰 낙인데 말이다.
일행 셋 모두 덕유산이 초행이다. 마치 내가 보여주지 못한 기분이 든다.
어쩌랴. 예기치 못한 기상변화를 탓할 수도 없고..
잠시 눈을 붙였으면 하는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한다.
그나마 여기서는 잠시동안 지근의 봉우리들이 뿌옇게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도 없어서 좋다. 대피소 취사장 복도길에 자리를 펼치고 아침식사를 한다.
묵은지돼지고기보쌈, 청국장, 문어숙회, 문어조림 등 맛난 반찬들로 허기를 채우니 쳐졌던 기운이 솟는 기분이다.
식사 후 대피소 지하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려 하지만 추위때문에 변변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다시 길을 청한다.
4년 전엔 삿갓재에서 무룡산으로 가는 길에 서편으로 운장산, 장안산, 대둔산 등의 산군이 보였지만 |
오늘은 곱사등처럼 커다란 혹을 짊어진 나무와 낙엽 되기 직전의 철지난 단풍이 모처럼의 빗물을 겨워한다.
쏟아지는 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무룡산까지 왔다.
등성이를 타고 운무가 피어오르면 용이 춤추는 모습을 연상이라도 하겠지만
오늘은 온 세상을 뒤덮은 안개로 인해 무룡은 커녕 지미(?)도 볼 수 없다.
"지미는 고사하고 대발이도 안보이더라구요."
무룡산을 지나 동엽령으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더욱 거세진다.
1,500 고지에서 맞는 가을비는 몹시 차갑다. 그 때문일까. 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동엽령 도착. 비교적 편안한 길이라 무룡산부터 4.2km 거리를 단숨에 왔다.
지체없이 백암봉으로 향한다.
비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그저 기계처럼 앞으로 향할 뿐이다.
백암봉. 그 흔한 정상석 하나 없이 누군가 써놓은 글씨로 덕유산 넘버 3임을 알린다.
지리산에서 시작하여 육십령을 거쳐 뻗친 백두대간은 여기 백암봉에서 오른쪽 송계사 방면으로 꺾어진다.
중봉 도착. 조금만 더 가자. 향적봉이 바로 지척이다.
중봉을 지나 정상 향적봉까지의 1km 구간 사이에는 원추리군락과 구상나무숲이 볼만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눈길 주지 않고
바삐 통과한다.
드디어 정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네번 째로 높은 산, 유일하게 1,600대 고지의 산이다.
다시 찾은 향적봉. 그때 겨울엔 엄동설한에 동상이 걸릴만큼 추웠다. |
지금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옷을 적시는 긴 가랑비에 덜덜 떨며 정상에 섰다.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하기엔 그 길이 만만치 않다.
끝까지 마음 놓을 수 없는 하산길
향적봉 바로 아래 설천봉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
그 당시처럼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않았지만... |
처음 예정대로 힘을 뽑아내 백련사로 방향을 튼다.
다행히 내려올 즈음 서서히 비가 그친다.
예전보다 길이 잘 다듬어져서인지 예상보다 어렵지않게 내려왔다.
"이번에도 수고했네."
"미투일세."
빛깔 고운 단풍은 겨우 백련사에 와서야 볼 수 있었다.
습한 가을 산사에 곧 눈이 내려 온통 하얗게 뒤덮인 모습을 상상하며 백련사를 뒤로 한다.
설천까지의 28㎞의 무주구천동계곡은 폭포, 담, 소, 기암절벽, 여울 등이 곳곳에 숨어 구천동 33경을 이룬다고 한다.
그 중 몇 곳이 하산로 곳곳에 있다.
최종 날머리 삼공탐방안내소 앞.
삼공리주차장 앞 붉게 물든 가을을 배경삼아.
"참으로 대단한 산행이었습니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크거나 작거나, 혹은 그런 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산은 결코 상대를 견주는 표현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높고 큰 산이 낮고 작은 산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무경우가 결코 있지 않으므로
비록 아무것도 눈에 담을 수 없는 산행이었지만 우린 오늘 대자연이 주는 교훈을 몸소 체득했다.
남녀와 노소, 능력의 우열과 직급의 서열이 분명하게 가름된 세상의 위계질서를 자청하여 벗어났기에
우린 그 산에서 스스로 경전을 읽고 은덕을 담는 값진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