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조차 숨죽이는 겨울산.
아무 소리도 없다.
가만히 귀 기울인다.
그제사 세상이 들린다.
바람이었구나.
그리 실려온 눈이었구나.
설국에 들고 난 겨울의 하루,
내 마음도 그 처럼 하얗게 맑아졌기를.
<산에 들며>
은세계다. 아름답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워서는 안된다.
와중에 내 마음 한 켠,
오롯이 비워내거나 하얗게 덧칠하거나
잘 말려진 고추가 소복하니 눈 옷 입었다.
저 옷 입으면 따뜻할까. 추울까.
일출식당서 황태버섯찌게로 속을 데우고
채비를 단단히 하여 산에 든다.
된비알의 세걸동릉,
하얗게 그려진 고샅을 자분자분 걷는다.
세걸산을 목전에 두고 트레버스 하여 세동치로 곧장 걸음한다.
묵묵한 걸음에 호흡도 이젠 가지런하다.
눈이 내린다.
소설가 김훈 그랬다.
'숲'이라는 글자는 모양 조차 숲을 닮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숲에 든 것 같다고.
눈 내린 숲을 걷는다.
그 속, 나도 한그루 나무가 되는 듯.
아무렇게나 엉킨 숲도
하얗게 눈내린 날엔 건듯 마음 닿는다.
소설가 송기숙은 피아골의 최고 유물은 연곡사 부도가 아니라
층층이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계단식 논(다랭이논)이라 하였다.
그 마음이 절절하여 공감도 깊은데
그렇다면 서부능선의 보물은 때로 봉(峰)과 치(峙)가 아니라 무명의 숲.
3시간 30여분의 거친 능선 산행이었지만
눈이며 숲이며 다음에 담느라 하나 힘들지 않게 야영지에 닿았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차마 여유로운 은세계다.
밤 새워 눈 내리고 아침엔 맑아
능선 길 걷다 사방의 은빛 조망에 넋 놓았으면.
아니다. 그것은 욕심. 이토록 고적한 숲에서라면
오늘 하루 안분지족의 처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눈 내리면 내리는대로
구름 낮으면 낮은대로
은세계에 동화처럼 초막을 짓는다.
근사한 느낌.
내 삶의 하루도 저와 같이
흑백 세상의 노란 한 점 같았으면.
공감한다는 것.
소주 한잔의 행복을 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들의 동화(童話)
추워 못간다 눈 핑계를 대는 것과
취하면 혹 머무를까 술 한잔 더 권하는 것은
그러므로 김삿갓의 시심만은 아니다.
깊은 잠이었다.
밤 새워 눈이 내렸다.
토닥 토닥...
그 소리는 내 어메의 사랑.
유년의 어느 날,
열 오른 나를 어루어 밤을 새워 지켜내던 내 어메의 정성.
창 밖으로 눈이 하염없다.
따뜻하다.
겨울 바람이 차가웠던 것일까.
나무가 눈 옷 두텁게 껴입었다.
눈의 꽃
눈
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 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限界)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斷層).
봉긋 봉긋 눈아이스크림.
낼름 하나 집어 잎에 쏘옥 넣고 살살 녹여 먹을까보다.
아서라.
아까워 어이 먹을까. 아껴 똥된다 하여도 아서라.
이름도 희안한 약수는
추위도 잊은 채 졸졸졸 모진 목숨을 잇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아무도 가지 않았으니 길 아니라 할텐가.
서산대사 뭐라하실라.
정성을 다해 걸어야지.
눈길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저 길 가는 이 모두 즐겁게 걷길 기원하며
어귀, 눈사람을 두었다.
간혹 지나는 이 있어 눈길 두어주면
저도 외롭진 않겠지.
<산을 나며>
한치 앞도 못보는 주제가 섧다.
찬바람에 절로 고개 숙이고
흩날리는 눈발에 옷깃 여미어
산이 전하는 말을 보듬지 못한데서야.
고개는 약간 숙이고
배는 불쑥 내어 놓고 터벅 터벅 걷는다.
두렵거나 자만하지 않는 걸음.
그래서 기운차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러쎌하며 나아간다.
눈길과 인생은 그리 닮아 있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포근한 날이 있으면 고추바람의 날이 있다.
이리갈까 저리갈까 고심의 갈래가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가야한다는 것.
길이든 길이 아니든 내가 선택한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
그 길의 위, 얼음장 아래 샘솟듯
살아있는, 살아야하는 분명한 이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일상으로 가는 길,
눈이 여전하다.
조심조심 한발 한발 헤친다.
설국의 산이 내게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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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계의 하루를 추억한다.
산의 위와 산의 아래 다름이 무언가.
그곳에도 애환이 있다.
선택은 오직 나의 몫.
날이 추운 만큼 체온은 더 따뜻했고
길이 험한 만큼 배려의 지혜 더했다.
그것 뿐.
그것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