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序設
우리나라
오씨의 근원에 대해서는 문헌마다의 기록이 다르고 현존하는 오씨의
엇갈린 주장으로 상당한 물의가 있으며 확실한 사적 근거가 없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모든 오씨는 동조동근에서 분적된
계통이라는 주장에는 거의 일치된 의견이며 이것이 현재 오씨의 위치이다.
오씨의 근원에 대해서는 크게 <귀화설>과 <백제왕족설>이
있다.
2,한자吳의 유래
吳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吳나라로부터 유래한다. 희성(姬姓)의 나라인 吳는 周(주) 문왕(文王)의
伯父(백부)인 태백(泰伯)과 중옹(仲甕)이 세웠고 주무왕(周武王)때 仲雍(중옹)의
증손자 주장(周章)이 양자강(樣子江)하류 일대를 根據地(근거지)로하여
吳 나라의 君主(군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출처-춘추좌씨전,사기,동복오씨종친회)
春秋時代(춘추시대) 中葉(중엽)
오 나라는 진(晋)나라의 도움을 얻어 軍備(군비)를 增强(증강)하고 紀元前(기원전)585년
19대 수몽(壽夢)때부터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그의 아들
제범(諸范)이 지금의 江蘇(강소) 소주(蘇州)에 都邑(도읍)했다. 합려(閤閭)는
伍子胥(오자서)와 손무를 登用(등용)하여 在位(재위) 9년만에 초 나라를
크게 무찌르고 초의 도읍인 영에 진군했다.
이듬해 趙(조)나라가 오(吳)나라
國場(국장)을 侵入(침입)하고 진(秦)이 초(楚)를 돕고, 오나라 內部(내부)에서도
叛亂(반란)이 일어나는 등 問題(문제)가 발생하여 오(吳)는 後退(후퇴)하고
말았다. 閤閭(합려)는 재위 19년에 월나라를 정벌하다 전사하고
그 아들 부차가 뒤를 이어 臥薪嘗膽(와신상담)의 固辭(고사)가 생길
만큼 월 나라와는 國運(국운)을 걸고 生死(생사)를 가르는 戰爭(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夫差(부차)가 재위 2년만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나라 句賤(구천)으로 하여금 회계산에서의 恥辱(치욕)을
맛 보게 하였다.
그 후 재위14년에 晋(진)나라와
覇者(패자)를 다툴 만큼 强盛(강성)하여 황지(黃池)에서 제후들과 會盟(회맹하였는데
돌연 월 나라가 오나라를 기습하여 오나라는 부득히 回軍(회군)하였으며
후에 월나라 구천에게 멸망하였다.
吳氏성은 부차의 손자인 루양이
천자(天子)로부터 오나라 사람이므로 오씨성을 하사받았기에 그 때부터
연유한다.
중국 오씨의 대표적 인물로 吳起(오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때 손자병법의 손무와 더불어 최고의 병법가로서
노나라에서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제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가 제나라의 의심을 받는다고
아내를 죽여 충성을 나타낸 사람이다. 오기는
전쟁에 나설 때마다 승리를 거뒀는데, 그것은 각별하게 부하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오기는 부하들에게 종기가 생기면 직접 입으로 빨아서
이를 고쳐주었으며, 이를 본 부하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오기의 행동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함으로써 천하무적의 군사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3.우리나라 吳氏의 유래
(1)귀화설
오씨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와 귀화한 성씨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른 귀화성씨(덕수張씨,우록계
김해金씨등)와는 달리 현존하는 삼국사기와 다른 역사서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고, 단지 고려말에 정당문학을 지내신 나주오씨의 탁진공이
1397년에 남긴 오씨삼십세계도 서문에 "삼가 新羅國史의 총론을
살펴보건데 우리나라에는 처음에는 吳氏姓이 없었으나 지증왕 원년(500)
辛巳에 이르러 武惠公(오첨-중국 제나라출신)께서 東쪽으로 건너오신
이래로 오씨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또한 나의 5세조이신 錦城君 諱 淑珪선조께서
전해주신 統計錄을 살펴보면 무혜공으로부터 24세에 이르러 海州君 諱
賢輔, 同福君 諱 賢佐 寶城君 諱 賢弼에 이르러 비로소 분관되었다."라는
문구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오씨의 대종회에서는 귀화설을 지지하고
있다.
무혜공 오첨은
오나라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의 45세손이라고 한다.
(2)백제왕족설
오씨는
옛 백제의 22담로국 중에 중국의吳越지역의 담로에 파견된 부여씨왕족의
일족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무혜공 오첨을 중국인이 아닌 백제왕족인
부여씨의 후예로 보고 있다.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데,
오씨가 백제왕족계통이라는 기록은 각종 야사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출처-한국성씨의 기원, 한국인의 성씨 이야기 )
야사의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조선 명종때 도가대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운학
이사연 등이,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야사라던가 유사를 책으로 엮은
청학집의 삼한습유기가 있다. 이 글의 서문에는 우리나라 성씨들에 대한유래를
언급하고 있는데 김석박씨는 신라에서 출하고 오씨(보성,두원,고창 등)는
백제왕실에서 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씨가 백제왕족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는데,
첫째. 백제 의자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부여徐씨는
吳씨와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둘째, 백제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부여씨의
정착촌(백제촌)의 후손들은 부여서씨와 같이 오씨를 백제왕족으로 여기고
있으며,
셋째, 옛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당시
吳越이역에 백제촌이라는 곳에 비석비 중 백제제후吳公이라는 내용이
있는 추도비가 있었다는 문헌
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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