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興福寺 고후쿠지) - 유선철
오전에 일본 최초의 절인 비조사를 보고 이번 성지순례의 핵이자 골수인 법륭사를 보았다. 오후의 약사사와 흥복사는 다소 맥이 풀어질 수 밖에 없다. 약사사를 휙 둘러보고 나라공원에 있는 흥복사로 돌아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법우님들의 눈동자는 더욱 반짝인다.
흥복사는 나라(奈良)시대에서 헤이안(平安)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간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후지와라(藤原) 가문의 절이다.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국가 관사(官寺)와 동격으로 융성하였던 절이며 동대사와 함께 나라(奈良)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주요 사찰이다.
후지와라 가문을 이야기 하려면 서기 645년에 일어난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빼놓을 수 없다. 다이카개신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아스카 시대의 세도가인 소가(蘇我) 가문을 멸망시킨 정치쿠테타이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는 조메이 천황의 아들인 나카노 오에(中大兄)황자 - 후에 덴지 천황 - 와 함께 당시 최고 대신(豊浦大臣)이었던 소가(蘇我) 가문의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를 암살하고 새로운 왕실 지배자가 되었다. 소가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 에미시(蘇我蝦夷)도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이카개신 이후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제38대 덴지천황(天智, 661∼667년 재위)으로부터 ‘후지와라’ 라는 성씨를 내려받고 후지와라 가마타리(藤原鎌足)가 되었다. 그 후 국무총리 격인 관백(關白))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권세를 누렸다. 후지와라 가문과 소가 가문은 모두 백제인의 후손들이었다.
다이카 개신 이후에 일본은 모든 국토와 백성을 천황의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만들고 중앙집권의 행정 기구를 만들었다.
710년에 후지와라 가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가 중금당을 창건하였으나 그 후에 8번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후지와라 후히토의 딸 고묘지(光明子)가 제45대 쇼무천황(聖武, 724∼749년 재위)에게 시집가서 고묘(光明)황후가 되자, 쇼무천황은 동금당(東金堂, 726년)을 세웠고, 고묘황후는 오중탑(五重塔, 730년)과 서금당(西金堂, 734년)을 세웠다. 지금의 동금당은 1411년에 재건된 것이며 서금당은 소실되었다. 그 동안 많은 건물들이 전란과 화재로 거의 소실되었고, 현재는 그 가운데 10여 개만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도 동금당과 오중탑(五重塔 고주노토), 국보관(國寶館 고쿠호칸) 등이 유명하다. 오중탑는 1426년에 재건되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세계일보)] 참조
우리는 동금당과 오중탑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동금당에는 약사여래불을 주불로 모시고 우리쪽에서 보아 오른쪽에는 문수보살과 일광보살을 모셨으며, 왼쪽에는 유마거사와 월광보살을 모셨다.
하앙(下昻)구조
흥복사 동금당의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는 하앙구조는 특이하게도 코끼리코와 같이 길게 뻗어 나와 있었다. 법륭사의 하앙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앙은 백제계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기둥 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가리킨다. 이 하앙의 끝부분 위에 외목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말로 글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물은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다. 아래 사진으로 일본 흥복사와 법륭사, 그리고 우리나라 전북 완주군 화암사의 하앙구조를 비교해본다.
일본 흥복사 동금당 하앙
일본 법륭사 중문 하앙
전북 완주군 화암사 극락전 하앙
국보관(國寶館 고쿠호칸)
국보관에는 흥복사의 국보, 중요 문화재, 공예품 등을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입장료는 역시 500엔이다. 아수라상이 특히 유명한데 얼굴이 세 개이고 팔은 여섯 개인 목조 조각품이다. 미남 청년의 얼굴 모습인데 애수에 젖은 눈빛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신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무언가 간절한 부탁을 할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빼어난 예술품은 이렇게 누가 보아도 다 좋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 다른 팔부중상과 십대제자상도 보았는데 팔부중상 중 건달바는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와 관계가 있다는 스님의 설명이 있었다. 2009년 3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흥복사 창건 1,300년을 기념하여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국보 아수라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오후 5시 마침 시간에 맞추어 국보관을 나왔다.
원택지(猿澤池 사루사와노이케)는 둘레 약 360미터인 연못으로, 오중탑이 수면에 비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한다. 미리 생각해두지 못하여 못보고 왔다. 나라 8경 중의 하나라니 더욱 아쉽다.
오늘은 절을 네 곳이나 보았고, 특히 각 시대의 대표 건물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법륭사를 보았다. 법륭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오늘은 조금 진정되어 훨씬 가깝고 정겹게 느껴진다. 뻐근하고 꽉 찬 하루였다. 숙소에 돌아와 메모를 긁적이다가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하루의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