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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만록觀水漫錄」
고민정(강원대학교 사학과 강사)
1. 체재와 구성
편에서 기술하였고, 화성이 축조된 이후의 상황을 두고 개혁 방안을 논한 것을 하편에서 무할 수 있도록 변통하는 논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논의,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논의, 리고 예의가 바른 마을이라고 한 반면, 건달산 남쪽에서 쌍부까지는 생리(生理)가 넉넉하 백성을 미리 모집한 뒤, 25냥을 지급하고 우마를 매득하여 운반하게 하고, 일이 끝나면 그 모으는 방법은 전곡(錢穀)을 조치하여 생리의 방법을 열어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하 한 본부의 산천은 좋은 품질의 종이를 생산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만약 종이 뜨는 방법을 나 지금은 본부를 이전하여 새로 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양쪽을 모두 지키는 것은 어렵고
제4권에는 「관수만록(觀水漫錄)」 상·하편이 수록되어 있다. 「관수만록」은 저자 우하영
(禹夏永)이 거주했던 수원 지역을 직접 관찰하고, 이곳이 번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
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다. 또한 이 부분은 저자가 직접 농사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농업 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개혁 방법으로서 집약적 소농 경영을
주장한 제8권의 「농가총람」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글이다.
「관수만록」이란 제목에서 수(水)는 수원을 가리키므로, 관수(觀水)는 ‘수원을 관찰하다’
정도의 의미로 풀이된다. 뒤의 두 글자 만록(漫錄)을 직역하면 ‘부질없이 기록하다’ 정도
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정한 주제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필자가 자유롭게
쓰는 문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다. 따라서 「관수만록」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저자 우
하영이 수원을 관찰한 뒤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을 보면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수원 지역이 당면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
여 보다 나은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의도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우하영은 18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실학자로서 수원 지역에 거주하였고, 퇴
계 이황 아래 수학했던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의 직계손으로 기호남인계열에 속한
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글을 배워 과거 준비에 매진하였으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
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한 개혁 방안에 몰두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개혁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천일록으로남겨지게되었던것이다.
「관수만록」은 천일록속에포함된편명외에,별도의책자로이루어진관수만록이존
재하는데 이들은 모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천일록안의「관수만록」
(想白古 951.053-C421-v.1-10)은 상편과 하편으로 이루어졌으나, 규장각 별책 관수
만록(奎5049)은하편으로만구성되어있다.이때상편과하편은화성(華城)의축조전·
후가 기준이 된다. 즉 우하영은 화성이 축조되기 전의 상황에서 개혁 방안을 논한 것을 상
기술하였다.
다시 말해 천일록 「관수만록」에서는 화성 축조 전후의 상황과 그 개혁 방안을 일별할
수 있는 반면에, 별책 관수만록은화성축조이후의상황과그에대한대비책에대해서
만 확인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조가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릉(隆陵))이라 명명한 후 화성을 축조하여 이를 완성
한 시기가 1796년이므로, 이 시점을 기준으로 상 · 하편의 내용을 구별하는 것도 역시 가
능하다.
별책 관수만록과 천일록 「관수만록」은 모두 목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책
관수만록은19개의항목으로나누어져있고,그목록과내용이일치하여밀도있는완성
된 체제를 보여준다. 19개의 항목 중 앞의 17개 항목은 주로 신축된 화성이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군사제도의 보완과 민생의 안정을 목적으로 농업․상업
진흥 계책을 논의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주요 내용을 일별하면, 백성을 유입시키는 계책, 군량미를 비축시키는 계책, 환곡을 균형
있게 운영하는 계책, 화성의 군량미를 변통하는 계책, 용주사 승려의 환곡을 옮겨두는 계
책, 독성을 철수하여 옮기는 계책, 목장을 없애고 진을 설치하는 계책, 세금을 가볍게 하
고 농사를 권하는 계책, 둔전을 넓히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 널리 전화(錢貨)를 운영
하는 계책, 영(營)에 속한 이들을 대우하는 계책, 백성을 모아 상업을 진흥시키는 계책, 화
약과 탄환을 공납하는 계책, 빈정포(濱汀浦)를 활성화시키는 계책, 무예를 진흥시키는 계
책, 곡물의 저장고를 견실하게 하는 계책, 야간통금을 정하는 계책 등이 있다.
나머지 2개 항목은 관방의 제도를 개혁하는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관방의 문제에
대해서는, 첫째 토지를 넓히고 민호(民戶)를 증가시키는 계책, 둘째 초액(抄額)과 입방
(入防)을 증가시키는 계책, 셋째 외성을 축조하고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 계책 등 세 가지
를 내놓았다. 그리고 화성이 군사상의 요충지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실
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별책 관수만록은화성의축조가끝난이후에,화성이군사상의요충지로서실질
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집약적으로 서술하여 그 목적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천일록「관수만록」도목록과내용으로구성되었다.목록은상편과하편의구분이없고,
전체를 15개의 항목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구성을 보면 상편과 하편으로 구분
되었고, 하편의 중간 부분부터 다시 몇몇 항목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그 목록과 내용이
긴밀하게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목록에서 설정된 항목으로는 수원의 형편, 성을 축조하
는 방략, 지역 경계를 변통하는 논의, 전세(田稅)를 변통하는 논의, 군교(軍校)가 오래 근
금전을 빌려주는 논의, 백성을 모으는 논의, 백성의 생리를 변통시키는 논의, 병사를 조련
하는 논의, 진법(陳法)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 독성을 옮기는 것에 관한 논
의, 유생의 과시에 대한 논의 등이다. 이들은 내용 부분에서 모두 기술되었으나, 차례가
혼입되었거나 분량이 일정하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목록에 따른 구분
이나 서술 방식의 정형성을 기준으로 별책 관수만록과비교하면구성상의긴밀도가다
소 약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두 기록에서 중복되는 화성 축조 이후의 논의만 별도로 비교할 경우, 천일록「관
수만록」이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구성상의 치밀도나 수
록된 내용의 다양성을 기준으로 양자의 관계를 살펴볼 때, 천일록 「관수만록」이 먼저
집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화성 축조 이후 화성의 군사적 기능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에
서 관련 부분만 추출하여 별책 관수만록을다시집필했을가능성이높다하겠다.
2. 「관수만록」 상편의 주요 내용과 서술상의 특징
앞서 언급한 대로 상편은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된 후, 화성(華城) 축조가 이루어지기 전
의 상황에서 화성을 축조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수원의 번영을 도모하는 내용이 주를 이
룬다. 상편의 내용은 수원 지역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 개괄, 화성을 축조할 때 필요한
재력을 확보하는 방안, 성을 축조하는 구체적인 방식, 승군(僧軍)을 차출하여 부역에 동
원하는 방식, 성역에 소요되는 물자를 운반하는 방식, 지계(地界)를 획부하는 방식 등으
로 이루어져 있다.
글의 첫 부분은 수원 지역의 역사적인 연원, 읍격(邑格)의 승강, 지형 및 지세의 구체적인
묘사 및 명승지에 대한 언급, 행정 구역의 변화, 풍속 및 인심 등에 대한 내용을 상술하여
전반적인 사항을 개괄하고 있다. 즉 수원 지역이 여타 지역과 다른 구체적인 사실들을 나
열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은 국가가 지방 각 지역의 현황 파악 및 행정 자료를 수집하기 위
한 목적에서 작성한 읍지와 유사하다.
수원의 행정상 변화로, 현(縣)에서 부(府)로, 부에서 현으로 승격과 강등이 반복되었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수원부의 산천이 시작되는 속리산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지형 및 지명에 대해 소개하였다. 행정구역은 면(面), 창소(倉所), 역촌(驛村), 장시(場
市), 진로(津路) 등으로 나누었고, 풍속은 광교산 남쪽에서 건달산 이북까지는 문물이 열
지만 문화는 광교산에서 건달산에 이르는 지역보다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명산대천이 없어 산천이 유순하고 살기를 띠는 기운이 없는 까닭에, 백성들이 도리에 어
긋나거나 인륜을 저버리는 기풍이 없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리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 다음은 화성을 축조할 때 필요한 재력의 확보와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이
다. 축성의 찬반에 대해서는 예상되는 반론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첫째, 재력
이 밑받침되지 않은데 성곽을 축조하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평야에 축
성할 경우 방어가 어렵다는 점, 셋째, 석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며 축성에 반대
하는 반론에 대해 조목조목 근거를 나열하여 축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첫째 내용에
대해서는 부세를 경영하는 방식의 변화를 꾀하면 충분히 재용을 마련할 수 있는데, 천승
(千乘)의 국가에서 재력이 부족하여 성 하나를 축조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고 일축하였다. 둘째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유독 산성을 많이 축조했기 때문에 평
야에 성을 쌓는 것에 대해 생소할 뿐이며, 중국의 성곽은 모두 평지에 축성되었다는 사
실을 근거로 이를 반박하였다. 더구나 호서·호남 지방에서 서울로 곧장 통하는 천여 리
의 길목에 요충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오히려 국토방위의 심각한 경솔함이라는 지적
을 하였다.
셋째 내용에 대해서는 성을 축조하는 재료로서 석재나 벽돌보다 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
다.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석재도 무방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흙으로 축조
하는 방식을 권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성(城)이라는 글자는 토(土)와 성(成)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하면서, 옛 사람들이 성을 축조하는 재료로 석재보다 벽돌이 좋고 벽돌보다
흙이 좋다고 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흙을 쪄서 쌓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토성을
축조한 뒤 참호를 두고 탱자나무를 심었을 때에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설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성을 축조할 때 필요한 역부(役夫)의 모집은 일에 비해 품삯이 적기 때문에 한잡(閑雜)한
자들을 모집하는 것보다 승군(僧軍)을 활용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 보았다. 승군 중에
뛰어난 자 두 명을 선발한 뒤, 각도에서 차출한 오천 명의 승도를 각각 거느리게 하여 감
독하게 하고, 성과에 따른 상벌을 내린다면 두 배 이상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
상하였다.
성역에 소요되는 제반 물종의 운반 방식도 기존과 다른 방식을 제안하였다. 회탄(灰炭)을
비롯한 물자는 구포에서 수원부로 들여오는데 그 거리가 30리에 이른다. 때문에 이를 운
반할 때 촌민의 우마(牛馬)를 빌려 실어 나르고, 관인(官人) 4명이 감독하도록 했는데, 이
방법은 폐단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고 보았다. 그 해결책으로 구포 부근에서 성실한
사용한 우마로서 보상하는 것이 폐단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벽돌의 제조 방식은 우하영 외에 여러 실학자들도 그 적합한 방식에 대해 고민했었다. 저
자는 중국의 벽돌이 요(凹)자, 철(凸)자, 아(亞)자의 모양으로 제조되기 때문에, 이를 쌓
아 축조하면 서로 맞물려 하나의 벽돌 형태를 이루어 내어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제조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벽돌을 쌓는 중간에 석회를
발라 축조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저자는 기존에 사용되는 벽돌을 제조하는 방식과 이를
쌓는 형태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였다.
또한 수원이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어 많은 군부(軍賦)와 연역(煙役)을 책임졌음에도,
수원부의 백성이 가난하여 그 수요를 채우기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수원
을 포함한 인근 지역의 경계를 구분하는 방식을 바꾸어 2읍 6면을 수원에 이속시킨다면,
부세를 충당하기에 알맞을 것이라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외에 화성의 역사(役事)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이를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 필
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방법으로는 목장을 혁파하여 이를 둔전으로 삼아 부교에게
맡기는 방안과 화량 및 평신을 본부에 이속시키는 방안을 주요한 것으로 들고 있다.
이처럼 상편은 화성 축조를 위해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고, 효율적인 성역을 달성하기 위
한 세부 사안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열거하고 있다.
3. 「관수만록」 하편의 주요 내용과 서술상의 특징
하편은 화성의 축조가 완료된 후, 수원부에 백성들이 모여들게 하여 번성하게 하는 방안
에 대한 논의가 중심축을 이룬다. 백성을 모여들게 할 방안으로, 전곡을 획급하는 방식,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안, 금전을 융통시켜주는 방안, 탄환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하는 방안, 종이를 생산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는 방안, 병사를 양성하는 방안, 독성
을 철폐하고 이속시켜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는 방안, 과거시험에서 나타나는 폐단을 바
로잡기 위한 방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화성이 완전히 축조된 후 성내에 백성을 모집하여 번성하게 하는 일에 대한 논
의로 시작된다. 성역이 완료되어 각처에서 모집한 군인들이 해산하여 돌아가게 되면, 술
집과 음식점을 차려 살아가던 자들도 반드시 철수해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성내의 빈터
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번성시키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로 보았다. 그러나 백성을
기 때문에 우선 전곡을 획급하는 방식을 논의하였다.
그 방법은 본부에서 일정한 분량의 쌀을 마련한 뒤, 성내 세 개의 창고에 분산하고, 해마
다 돌아가면서 한 개의 창고씩만 개방하여 쌀을 분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 창고마다
두 번 묵히고 한 번 흩는 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면, 백성들은 많이 받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고 곡식을 오래 묻혀도 병들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이때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정비
및 보관 방법도 강조하였다. 곡물이 상하거나 썩지 않도록 창고를 지을 때는 지대를 충분
히 다지고 사면의 벽을 튼튼하게 세워야 하며, 이음새 부분에 조금의 틈도 없도록 방비해
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년 장마 후에는 창고의 전체적인 상태를 자세히 살펴 수선해
야 하고,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를 교체할 때도 반드시 창고의 상태를 확인하여 문서로 남
기는 등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는 분조(分糶) 방식과 월두(越斗)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방안으
로 두곡(斗斛)의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이 발생하는 원인은 보
통 두분(斗分) 또는 석분(石分)에서 농간을 부려 두(斗)나 석(石)을 줄이는 것에 있었는
데, 본부의 경우 두분에 의한 농간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분조할 때 곡
식을 깎아내어 남겨먹고, 봉적(捧糴)할 때 곡식을 후하게 거두어 들여 이익을 취하는 것
이다. 그런데 이보다 백성에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월두였다. 월두는 두량(斗量)을 분급
하는 사이에 관리가 환곡을 받는 간악한 백성과 결탁하여 두수(斗數)를 넘는 양을 보태
어 주고 그들과 이익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환곡에 사용되
는 곡자(斛子)를 개정하여 그에 따라 분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부 백성의 생활은 오직 농업에 의존하기 때문에 금전을 융통할 필요가 있을 때는 곡식
을 매매한다. 이런 이유로 봄에 진 빚이 가을에는 몇 곱절이 되니 본부에서 이에 대한 대
책을 마련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백성이 농사 외에 생리를 취하는 방법으로는 염
리(鹽利)와 미상(米商)을 독려하는 것, 약환계(藥丸契)를 조직하게 하는 것, 종이를 생산
하는 것 등의 여러 방안을 제시하였다. 염리와 미상의 경우, 본부의 장시가 용인·광주·여
주·이천의 염로(鹽路)와 통하고 서울의 양도(糧道)와 인접해 있으나 각처 상인들이 집을
떠나 왕래하며 외부에서 숙박을 해결하다보니 비용이 많이 들게 되지만, 본부인들은 이
러한 비용이 낭비되지 않으니 그 이익이 보다 많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전국의 각 진에는 화약과 탄환을 일정한 수만큼 보유하도록 되어 있으나, 비축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구하려고 하면서 그 가격이 폭등한다고 보았다. 그 폭등한 가격을 백성들
이 감내하기 어렵다고 보면서, 본부에서 약환계(藥丸契)를 만들어 화약과 탄환을 조성한
뒤 해당 진으로 보내 그 나머지 이익을 얻고, 또 해마다 본부에서 화약과 탄환을 만들어
납부한다면 백성의 생리와 영문(營門)의 군기(軍器)에 모두 보탬이 될 것으로 보았다. 또
가르쳐 주고 백성들에게 닥나무를 심어 이익을 얻는 효과를 보게 하면 저절로 번성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군제(軍制)에 관해서는 병사를 효율적으로 편제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고, 병사를 평소
에 양성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우선 본부에 양직 6면, 남양 1면, 용인 1면을 이속시켜 호총
2만을 채우게 하고, 이를 다시 36초로 쪼개고 각각을 또 나누어 3초를 하나의 단위로 구분
하였다. 그 다음 3초 단위로 매년 20일간 입번하게 하여 훈련을 받게 하는 방법과 이에 소
용되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이러한 제도의 개
편은 당시 조선의 군사 훈련이 3년마다 1번씩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마저도 형식적이어
서 위험에 대비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서 비롯된 것으로, 대경장 · 대변통해야 함을 주
장하였다.
조선의 병제는 건국 초기에 위법(衛法)만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척법(戚法)을 사용하
였다. 위법은, 위(衛)는 부(部)를, 부는 기(旗)를, 기는 대(隊)를, 대는 오(伍)를 통솔하는
것을 말한다. 척법은, 대장(大將)·중군(中軍)·부(部)·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
를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수많은 조목(條目)이 대강(大綱)에 예속되어 있고 하나의 대강
이 수많은 조목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 연결되고 하나의 뿌리가 수
많은 가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비유하였다. 위법과 척법은 각기 장단점
이 있어 위법은 오랑캐[胡]를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나 왜구[倭]를 방어하는 데는 불리하
고, 척법은 왜구를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나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는 불리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부에서는 위법과 척법을 서로 비교하여 절충한 뒤, 장점만 취하여 새로운 제도
를 창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본부에 일영(一營)이 세워지면, 반족(班族)을 제외하고 평민
의 원수(元數)를 따라 위법(衛法)에 의지해 민호(民戶)를 뽑고 척제(戚制)를 본받아 장
정을 뽑는다. 군교(軍校)에 합당한 자는 궁마(弓馬)의 기예를 연습시키고, 졸오(卒伍)에
합당한 자는 포사(砲射)의 기예를 연습시켜, 평시에 5~6천의 정예병을 둔다. 그리고 평
상시 배포할 때면 위법에 의지해 부대를 이루고, 훈련이나 실전에서 통영할 때면 척제를
본받아 대오를 설치하는 것이 앞날을 준비하는 계책에 부합된다고 여겼다.
독성(禿城)은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된 이후, 화성의 축조를 놓고 여러 논의가 일었을
때부터 논의되었던 부분이다. 부사직 강유(姜游)는 수원의 신읍치에 성을 쌓아 기존의 구
읍치에 있는 독성과 서로 방어 체제를 구축하면 적들의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
고 주장하였으나, 저자 우하영은 이와는 정반대의 논의를 펼치고 있다. 우하영은 본부가
구읍(舊邑)에 자리하고 있을 때 수비에 의지했으나 독성에는 우물이 없어 성을 지키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다고 인식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권율이 독성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로 이곳이 남로의 관방으로 인식되었지만,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보았다. 더구
백성들에게 가중되는 고통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독성의 민호(募
民)와 창향(倉餉)을 본부 휘하로 옮기고, 즉시 민호(募民)의 복호(復戶)에 지급해 그들을
안착시킨 뒤 본부의 성을 채우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덧붙여 성을 수비하는
도구로서 활과 화살 및 돌에 대해 언급하고 유사시에 적극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유생의 과시(科試)는, 근래 들어 본부에 친속이 있는 자들이 호적을 가탁하여 시험에 응
시하거나 문장과 필법이 능한 자를 구해 이름을 바꾸고 답안지를 작성하는 폐단이 있음
을 지적하였다. 더구나 시취(試取) 과정에서도 색목(色目)에 따라 분배하여 서로를 배척
하는 풍토를 조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색목으로 분배하는 잘못된 규례를 통렬히
고쳐 색목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또한 실재(實才)가 작성한 답안의 좋고 나쁨에 따라
시취해야 문풍(文風)이 크게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시취의 규범도 초택(初擇)과
복시(覆試)의 옛 제도를 부활시켜 운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제시하였다.
마지막 총론은 전체 내용을 마무리하면서 앞서 언급되었던 내용 중 강조할 사항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근 지역을 통합하여 획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부의 계책으로, 양성(陽城)·직산(稷山)중 6면(面)과 남양(南陽)·용인(龍
仁) 중 2면(面)을 획부(劃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군
병을 뽑는 것과 전곡(錢穀)을 거두어 분배하는 것, 요역(徭役)을 가볍거나 쉬게 하는 것
과 인민(人民)을 안정시키고 모으는 일은 모두 획부가 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하편은 화성의 성역이 완료된 후, 화성이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과 수원부가 번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관수만록」 상편과 하편의 내용은 화성의 축조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화성의 축조는 정조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친위 체제를 만들기 위한 목적
에서 시행된 것이나, 우하영의 입장에서는 그가 거주했던 수원부에 혁신적인 변화를 예
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의 입장에서 또한 향촌민의 입장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할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저자 우하영은 그가 살았던 당시에 직면했던 문제
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로부터 파악된 문제점과 정면으로 맞서서 해결하려고 한 것
이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관수만록」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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