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퇴직을 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같은 시간에 나가고, 같은 시간에 돌아오던 그
기계적인 동작이 일순간에 정지되었다. 처음에는 그 지겨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며 이리저리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집안의 잡다한 일에 손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할 일 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대는가 하면,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열었다 닫는 버릇이 생겼다. 노동의 현장에서 수없이 덮쳐오는 노도를 잘도 견뎌내더니만 정년이라는 그 낱말에는 한없이 약해졌다.
남편의 한숨 소리를 멎게 할 방안을 고심하다 자전거 일주를 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MTB를 즐기는 나와 달리, 자전거 타는 요령이 미숙한 남편은 두려움을 내비치며 망설이는 눈치였다. 자전거를 타며 길을 오르내리다보면 새로운 활력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나의 감언이설에 결국 남편은 꾀여들고 말았다.
제주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자전거 두 대를 실었다. 남편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는 훼리호 갑판 위에서 거친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진 쪽빛바다는 눈이 부셨다. 다가오는 바닷바람에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잠시, 바람은 호락호락하게 앞길을 달리게 하지 않았다. 맞바람을 맞으며 숨이 꺾일 듯 힘들게 고갯길을 넘었다. 작은 포구에 도착하여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다. 때마침 바다에서는 해녀들이 물속으로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해녀들은 거친 파도에 몇 번이나 물 밖으로 밀려나면서 겨우 잠수를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물속에 잠수해 있던 해녀가 불쑥 물 밖으로 떠올라 테왁을 끌어안고 긴 소리를 토해냈다.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 같은 그 소리는 바로 해녀들의 숨비소리였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토해낸 고통스러운 탄식처럼 들려오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땀을 닦고 있는 남편의 옆모습을 보니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초석은 베이비부머들이 놓았다. 눈부신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베이비부머들이 이제 은퇴의 포말에 휩싸여 있다. 외환위기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가족과 직장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남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남편의 그런 쉼 없는 수고 덕분에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조금은 평탄한 삶을 살아올 수 있었다. 평균 수명으로 본다면 남편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퇴직을 한 것이다.
결혼초기에는 아내의 든든한 보호자였다가 점점 아내의 아들이 되어가는 남편.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다는 것과 마땅히 내놓을 명함이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은퇴를 한 베이비부머들이 까닭 없이 서러운 것은 무엇을 시작할 수도, 체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요즘 집에 남은 남편들을 빗댄 삼식(三食)이 스토리가 널리 퍼져 있다. 비록 웃으려고 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 느낌은 슬프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이끌어왔던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내 뒤를 따른다. 땀에 범벅이 되어 헉헉대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 남편의 저 들숨날숨이야말로 바로 가정을 지켜온 숨비소리다. 수많은 숨비소리가 있어야만 해녀들의 망사리가 가득 차는 것처럼, 오늘이 있기까지 세월의 거친 바다에서 수없이 내쉬었을 가장들의 숨비소리를 다시 한 번 기억했으면 좋겠다. 가정의 달 오월에.
이숙희 수필가·계간 수필세계 발행인
첫댓글 자전거 일주를 하는 두 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동행을 하려면 배려와 사랑이 따라야 함도 느껴집니다.
이 글을 보며 세월의 거친 바다에서 수없이 내쉬는 가장들의 숨비소리를 읽습니다.
가징의 숨비소리가 퇴직 후 더 거칠어져야하는 현실이 안타갑습니다.
가장의 숨비소리를 기억하자는 발행인님 말씀에 나를 돌아봅니다.
오월에 딱 맞는 좋은 글을 쓰신 숙희샘, 진짜 훌륭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이끌어왔던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내 뒤를 따른다.
이 부분에서 눈물이 핑... 수 년 후면 저도 이런 마음일 것 같습니다.
저의집 남편도 지난연말 삼식이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해 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삼식도 모자라 간식 까지 챙겨주고 있습니다. 정갈한 글에서 작가의 속깊은 배려가 그대로 비칩니다~
선생님은 여장부! 문학회를 이끌어 온 것 처럼 가정도 그렇게 이끌면 되겠지요. 걱정 마세요. 힘들면 저도 떠밀어드릴게요.
울산나들이 때 차안에서 들려 주셨던 이야기를 멋지게 풀어내셨습니다.
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어요. 감동적인 달필에 박수~~!
베이비부머 그들의 숨비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에서 그들의 땀방울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에 박수를 보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토해낸 고통스러운 탄식'
이부분을 읽으며 주책스럽게도 눈물이 찔끔 나오는데
㉮ 내가 주책바가지다. ㉯ 눈물 짜게 하는 글이다. ㉰ 필자(이숙희)가 나를 꼬집어 뜯었다.
답이 뭐겠수?
ㅋㅋ 삼 번요~ 헉, 실수... '다' 이어요.
좋은 글 선물 감사합니다. 두 분 나날이 더욱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