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차를 마시는가? 차를 마시는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
몽창소석(夢窓疎石)선사의 『몽중문답(夢中問答)』에 「차는 몽매함을 물리치고 각성(覺醒)케 하며, 도행(道行)에 도움이 되고, 술은 도취(陶醉)를 불러 시인을 환각의 세계로 유인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차나 술은 모두 물의 정기(精氣)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두가지의 물의 문화야 말로 극단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액체라 할 수 있다. 술이나 차 모두 일상적인 정신에 어떤 자극을 주고 있으나, 그 특성과 효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한쪽은 잠을 깨우는 각성케 하며, 정신을 맑히고, 다른 한쪽은 취하여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잠들게 한다. 차는 마음을 맑히어 정신을 집중시키고, 술은 마음을 느긋 느슨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일본의 무주(無住)선사의 『사석집(沙石集)』에는 다도(茶道)의 三德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첫째는 좌선을 할 때 졸음을 오지 않게 하기 위하고 몸을 가볍게 하 기 우함. --- 각성(覺醒)효과
둘째는 소화제로서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밝게함. --- 소화작용
셋째는 음욕(淫慾), 사욕(邪慾)을 어제시키는 약의 효과가 있음.
어떤 소먹이가 차를 마시고 있는 스님에게 와서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같은 사람도 마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스님들이 차를 마시고 있으니 굉장히 고상해 보였고 귀중한 약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당시 상류 계급층이 아니면 사실 차를 마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소먹이도 꼭 한번 마셔보고 싶었기에 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스님은 「예! 마실 수 있지요.」하면서 다의 삼덕에 대해서 가르쳤다.
첫째는 좌선을 할 때에 졸음이 오기 때문에 졸음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면 온 몸이 가뿐하고 상쾌하며, 굉장히 두뇌의 활동이 맑고 좋아진다. 때문에 차를 마시면 절대로 졸음이 오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다의 덕이다.
둘째는 식사를 약간 과식하였을 때라도 소화가 잘 되어 몸이 가볍고 마음이 선명해 진다. 옛부터 음식은 8분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식욕이 있기에 과식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과식할 때도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 되고 위(胃)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개운하며, 또한 식욕이 생긴다. 소화제의 효과가 있는 것이 두 번째 다의 덕이다.
셋째 제일 중요한 것은 「불발(不發)이 되는 약이다.」 즉 성욕, 음욕을 억제시키는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성욕, 음욕을 억제시키는 효과의 약이 세 번째 茶의 덕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말을 듣던 소먹이가 굉장히 놀라면서 그런 약이라면 나한테는 필요없습니다. 나는 사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낮에 관청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지쳐 겨우 밤이 되어야 여유있게 잠을 푹 잘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또 내일 일을 할 수가 있지요. 내가 편안히 푹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 약을 먹으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가난하게 살면서 식량을 간신히 구해 가족들과 나누어 먹고 사는데 먹고 난 뒤에 빨리 소화가 되어 버리면 곧바로 배가 고파지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끼니도 겨우 간신히 이어가는 형편인데, 식량비용이 더 들 것 아닙니까? 그러면 경제생활에 곤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차를 마시면 안되겠습니다.
또 「불발(不發)이 되는 藥」이라면 저는 절대로 마시면 안되겠습니다. 매일매일 먹고 살기 위해 일에 쫓기다 모처럼 밤에 마누라를 기쁘게 해 주고 사랑 받고 싶은데, 성욕이 감퇴되고 불발이 되게 한다면 마누라한테도 쫓겨나게 될 것이 뻔한 사실 아닙니까? 그런 약이라면 나는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無住선사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똑같은 차라고 하더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이득이 되기도 하겠지만 손해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라고 교훈하고 있다. 득실의 판단은 각기 자신의 입장과 생활 환경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약이나 진리의 법문, 고차원의 생활문화라고 할지라도 각자의 입장과 생활 환경에서나 생각이 다를 때 각기 다르게 수용되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음다(飮茶)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차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을 마신다는 것이며 자연과의 교감, 동화이며, 우주의 생명을 들여 마시는 것이다. 우주 자연과의 생명적인 교감과 일체화를 만들며 자연수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의 생명을 정화하고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하는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끊임없는 정신의 세례를 실행하는 의례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禪에서는 이를 「일미동심(一味同心)」이라고 한다.
부처와 자기와의 자연 생명수인 차를 통한 진실에의 일미(一味)를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동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밀도 없고 색깔 없는 밍밍한 자연수가 녹차의 농도 짙은 색깔과 향기로운 물로 변모한 것은 자연과의 동화된 모습인 것이다.
차는 인간의 예지에 의해 압축된 문화의 물이며 자연의 수정(水晶)이며, 결정(結晶)하여 울켜 짜낸 정신적인 생명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