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시월이 시작되고 오늘 우연히 정호승의 ‘가을’을 접하게 된다.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 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지인에게 이 시의 마지막 ‘지리산이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니 지리산이 된 사람이 있다는 거다. 이름하여 ‘우천 허만수’... 흥미를 가지고 그를 이야기 한 글을 읽었고 여기 옮겨 적어본다.
'지리산 산신령'으로까지 불리는 우천 허만수님! 그이의 남다른 발자취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를 지극히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의 자취를 찾아 유해를 찾기 위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을 정도이란다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일본에 유학을 갔을 만큼 좋은 가문에서 성장고 일본 입명관(立命館) 중학 시절에 산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그 학교에는 '동정(童貞)클럽'이라는 등산반이 있었는데, 회원 전체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색다른 규칙이 있었다네..
허만수님은 이 '동정클럽'에 가입하고부터 본격적인 등산을 사작하게 되었고 산에 미쳐 대학 진학도 안중에 없었나보자. 더 중요한 사실은 '동정클럽'의 그 규칙 때문에 여자도 가족도 내팽개친 채 지리산으로 들어가 야생의 생활로 일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우천의 부모는 산에 미친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비상수단을 강구했는데 바로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22세가 된 허만수를 일시적으로 강제 귀국시켜 강제 결혼을 시켰고 그이는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또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29세 때 해방을 맞게 돼 일가족 부인과 딸 셋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그이는 진주시에서 '대동'이란 서점을 냈지만 산에 이미 정신이 팔린 그이가 서점을 제대로 꾸려갈 수가 없었지고 2년만에 서점 문을 닫은 그이는 차라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산을 찾기 시작했단다.
허만수님은 31세 때 산을 잊어달라는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영영 집을 떠난다 집을 나선 그이가 처음 찾은 곳은 의령 자굴산이었고 자굴산 정상 부근에 땅굴을 파고 그는 원시인과 다름없는 산생활을 시작, 2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 다음으로 옮긴 곳이 바로 지리산 세석고원이었다 고원 한편에 토막집을 짓고 본격적인 야생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집을 나선 지 4년째가 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부인이 이 세석고원의 토막집을 찾아와 사흘 동안 남편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단다.
하지만 우천 허만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는데 "나는 이미 산에 미친 사람이니 단념하라"는 것이었단다 결국 부인은 하산 설득을 포기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천 허만수님의 모습은 1961년 태풍 너로호 내습 때 부산의 언론인 김경렬님이 하천 도하 도움을 받으면서 촬영한 것이 있고 진주 경상대학교에 근무하는 홍성국님 1974년 2월 세석산장 앞에서 허만수님과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했는데, 우천이 모습을 감춘 것은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난 1976년 6월이란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뭐하세요 오늘은 ᆢ쬐끔 아주 쬐끔 보고싶네요ㅋ
[그런데 어찌 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하나의 신비에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고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님의 정신과 행적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중산리의 천왕봉 등산구 자연석에 세워진 추모비문
일반적으로 제 남편이 아니라서 감사하단 생각을 했구요.
산신령이 되었다면 좋은일을 많이하겠지요.혼령이라도 자식에대한 애틋함은 있을테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