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공묘소에서 해설을 하다보면 찾아오시는 사람들 중에는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구에도 신숭겸 무덤이 있던데?”, “곡성에도 무덤이 있던데?”, 이 정도는 양반이고 “천안에 갔을 때 거기서 신숭겸 무덤을 봤는데 무슨 소리야”하는 분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 인터넷으로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검토를 해보고 3월 16,17일에 대구와 곡성을 다녀왔습니다.
간 김에 대구에서는 그곳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곡성에서는 용산재에 기거하시는 관리자(?)에게 궁금한 것도 물어 보았습니다.
신숭겸 申崇謙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 말년에 홍유·배현경·복지겸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 동수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이 되어 원보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능길과 아들 보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에는 1120년 예종이 그와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구 신숭겸 장군 유적지
가는 길
동대구역, 동대구 터미널 하차: 동대구역 북쪽 동대구역지하도2 정류장 - 101-1번 시내버스 - 지묘초등학교 하차 동대구역에서 지묘초등학교까지 8.3㎞

A자가 표기된 곳은 파군재


개울 건너서 촬영한 사진


입구






표충단이라고도 불리는 순절단 입구

순절단 - 한변의 길이가 어림짐작으로 7미터 정도, 높이 1.8미터 정도

순절단 열 연화대(?) -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듯함

표충비각안에 있는 비석

활을 쏘는 신숭겸 장군 동상

충렬문 - 매해 한식때에만 문이 열리고 후손들이 제향을 올린다고 함

이곳은 전통문화체험을 하기에 이곳도 함부로 들어 갈수가 없다고 함

아이들도 신숭겸장군에 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든 테마공원(?)






관리사무소(?)와 주차장


파군재 삼거리에 서있는 신숭겸 장군 동상 -춘천과 곡성에도 위치만 다를뿐 똑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어 있음






파군재

파군재 정상부근
도이장가 悼二將歌
1120년(예종 15) 예종이 지은 향찰표기(鄕札表記)의 가요. 신숭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평산신씨장절공유사에 그 제작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경위에 관해서는 그밖에도 고려사 권14, 명신행적, 대동운부군옥 등에 간략하게나마 보인다.
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예종이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主乙完乎白乎 주을완호백호
心聞際天乙及昆 심문제천을급곤
魂是去賜矣 혼시거사의
中三烏賜敎 중삼오사교
職麻又欲望彌阿里刺乃彼 직마우욕망미아리자내피
可二功臣良 가이공신량
久乃直隱 구내직은
跡烏隱現乎賜丁 적오은현호사정
이 작품의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이 작품에 표출된 미의식은 숭고(崇高)이다. 오로지 임(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겠다는 충성심이 하늘 끝까지 미쳤기에 두 공신의 장렬한 죽음은 값진 것이며, 죽음의 비극을 초월하여 숭고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순간적인 것이나, 곧은 자취, 곧 충절은 영원한 것으로 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제작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팔관회와의 관련이나 주술제의적 측면, 제5행에 드러난 가상(假像)의 주술적 발언 등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특히 주술적 숭고미를 구현하고 있다. 아울러 영웅적 인물이 현실과 죽음을 초극하는 장엄한 행위는 인격적 숭고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에는 인격적 숭고미도 동시에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것 가운데서 임금이 지은 가장 오래된 향가로, 제작연대와 제작경위가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민족문화대백과
http://cafe.daum.net/thishistory/Cq5D/405?q=%B5%B5%C0%CC%C0%E5%B0%A1&re=1
이제는 신숭겸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살펴봅니다(못갔다 왔음)

평산신씨 7위사당 율리사
율리사는 충남 서천군 비인면 율리35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율리사는 신숭겸을 주벽으로 하여 신현, 신흔, 신연, 신기, 신철, 신오 등 평산 신씨 7위를 배향한 사당이다.
원래는 문중사당으로서 1851년에 세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당시는 신숭겸, 신철, 신오 등 3위를 제향하였다.
평산 신씨가 비인지역과 연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혼란기에 신용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비롯되었다. 신웅은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갔던 신기의 아들이다. 그후 신철과 신오의 후손들이 함께 옮겨와 살게 되면서 그 문족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1900년 3위 외에 신혼 신연 온수감을 지낸 신기 등을 추배하는 율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8년에는 사당을 중건하고 1920년에는 고려시대의 학자였던 신현을 마저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글을 올리고 다음날 다시 자료를 찾아보니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추가를 합니다
첫번째 순절단(표충단)을 소개 하는 안내문

두번째 문이 잠겨 사진을 못찍은 표충사 사진

세번째 - 마치 무덤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매판단. 표충사 뒤쪽 담장 밖에 있다고 함

매판단 사진출처 http://blog.daum.net/shgh1225/8761192

대구시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 있는 매판단(埋板壇).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표충사가 1871년 훼철될 때 표충사의 현판을 묻은 곳이다. 이지용기자 영남일보
첫댓글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발로 뛴 자료라 더욱 믿음이 가네요. ㅎ
와우!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을 몸소실천 하시는 홍선생님!!존경스럽습니다!!
자료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자료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