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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문학의 집에서 음악이 있는 금요 문학마당 2011년 5월의 정기행사에, 주인공 조흔파 소설가의 가족은 조흔파 문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본관 전시실에 고인의 유품전을 열어 그 업적을 추모하고 기렸다. 유품전 오픈식이 끝나고 간단히 준비한 다과를 나눈 후, 산림 문학관으로 장소를 옮겨 조흔파 소설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강연과 회고담을 듣고, 조흔파 선생의 대표작품 낭독과 음악공연으로 추억에 젖는 시간을 가졌다.
소설가이며 법학박사인 장안대 정승재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제일 먼저 박경태 베이스 바리톤의 <오월의 어느날>과 <청산에 살으리랐다>를 조용히 들었다.
문학평론가 조병무 시인이 조흔파 소설가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특강을 하였다.
자신은 고교시절 조흔파의 얄개전을 읽고 그 내용이 게재 된『학원』을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면서 부터 문학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6.25의 폐허 속 대구에서 1954년 출판한 청소년잡지 『학원』에 연재된 『얄개전』은 천막수업 등으로 고난을 겪던 시절 청소년들의 즐거움이고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조흔파 선생은 청소년소설 역사소설 수필 사회칼럼 등 안 쓴 장르가 없습니다.
얄개의 본명은 나두수인데 KK 중학교 2학년이라고 서문에 나오는데 그 시절은 가짜학생이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얄개전을 아느냐? 모르느냐? 물어서 알면 진짜학생이고 모르면 가짜 학생이라 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에 인기가 대단한 명랑소설이었습니다.
KK 중학교는 기독교계통의 학교였는데 어느 날 여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영어 잘 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였을 때 얄개가 손을 번쩍 들고 “I LOVE YOU." 하였습니다.
이렇듯 조흔파 선생은 익살소설, 골계 소설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자전적인 실화를 쓴 것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자서전은 아니고 어머니가 부를 때 앨개라 부르고 얄개 짓을 하고 자란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의 본명은 원래 흔파가 아니고 봉순이었습니다.
오상순 선생과 구상 시인은 조흔파는 아마추어를 능가하는 노래솜씨를 갖고 있어 고향사람을 만나면 개그맨처럼 웃기고 울리는 명연기자라고 말했습니다.
조흔파는 익살, 해학으로 『얄개전』을 비롯해 소설 역사소설 수필 칼럼 등 재치와 깊은 사고와 통찰력이 있는 글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권사인 어머니와 장로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흔파는 당시 기독교 방송국에서 「 성경 이야기」를 직접 하는 등 역사와 종교의 영역에까지 작품 활동을 넓혔었습니다.
역사소설에서 새로운 역사문제를 장엄한 문체로 스펙터클한 기법을 보여준 『만주국』 그리고, 소설 『대한백년』 『소설국사』에서 우리민족이 흘러온 거대한 파노라마를 역사와 함께 소설이라는 스토리로 전개, 많은 인물과 사건을 재조명하였습니다.
수필문학 역시 해박한 지식, 사회적 현상 비판, 과거 역사적 관점의 재해석 등 작가의 사고영역이 잘 표현된 『미운 맛에 산다』『순설록』이외에 많은 수필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수필 작품을 1999년 아내 정명숙 여사에 의해 간행된 『조흔파 문학선집』전 5권이 있습니다.
수필집 『미운 맛에 산다』의 자필 서문에서
“내게는 운 좋게도 붓대가 있으니까 삿대질 대신 붓대질을 해가면서 유음(溜飮)을 달래려 했다.”라고 했습니다.
수필집 『순설록』에서는 언론인 오종식의 서문에서
“흔파의 순설의 기식(氣息)을 체감할 수 있어서 유쾌하고 통쾌하다. 읽어가면서 허허치고 웃다가도 읽고 나서는 되씹히는 자위가 있어, 또한 쓴맛도 남아나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문장이다.” 라고 했습니다.
위의 글에서 보듯이 수필의 위트와 재치의 문장으로 새로운 감동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흔파의 문학은 작가의 집필능력이 다양하고 한국역사에 대한 방대한 조명으로 역사에 상상의 세계를 접목시켜 또 다른 역사의 면모를 그려냈지요.
수필의 세계 역시 작가 자신의 세계를 넓은 안목과 관조로 그려냈습니다. 익살스러운 대화체를 사용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재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해학과 기지의 문장으로 허허 웃다가도 읽고 되씹는 자위가 가득 찬 또 다른 수필영역을 제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장르를 초월하여 다양한 부문에서 문학적 사관을 제시하고 있지만 「명랑소설」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얄개전』이 보여준 성과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삶의 교훈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웃음과 재치를 심어주었다는 점이 조흔파의 큰 수확이지요.
현대 대중 문학 분야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 김내성 정비석 박계주 방인근 조흔파 등을 우리 문학사에서 거론해야 합니다. 그들은 대개가 이북 출신 작가들 입니다. 그 공헌을 높이 기리기 위해 문학관건립위원회가 발족되어 한국문학관을 세워야겠습니다. 미술관이나 체육관 음악당 등 다른 장르는 다 있는데 문학은 한국 현대문학 100년이라면서 왜 문학관이 없습니까?”
조병무 시인은 말끝을 여미며 이렇게 우리에게 한 가지 제언을 남겼다.
조흔파의 소설 <배짱시험>의 일부를 전영란과 임항수 낭송가의 목소리로 들었다.
다음은 한양대 국어국문과 최내옥 교수의 회고담이다.
자신의 고향은 남원 운봉인데 당시 문인을 아는 것은 조흔파와 김내성뿐이었고 고교 재학시절 학원잡지에 연재되어 나오는 『얄개전』을 기다리면서 조흔파 선생을 만나고 ‘나도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내가 ‘웃기고 살자’ 이렇게 생각하고 살다보니 국문학과에서 ‘뱀장사 최내옥’이라면 알아줍니다. 조흔파 선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도 수박이 열립니다.
‘趙欣坡’의 흔(欣)은 기쁠 흔 자로 기쁨이 물결치는 언덕, 기독교 냄새가 물씬 납니다. 저의 고교시절 담임선생이 신석정 시인이었는데 국어시간에 조흔파 선생 이름을 써놓고 읽을 줄 아는 사람 손들어보라 했는데 ‘흔쾌 흔’자라고 저만 알아 맞혔지요.
조흔파 선생의 어마어마한 필력은 천재적이었는데 저는 정명숙 여사의 지극한 내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집을 보면 선생은 어떤 때는 폭군이었는데 정명숙 여사는 순종하고 가정을 지켰습니다. 사후 30년, 오늘 조흔파의 밤을 만든 아내, 동지, 동업자인 정 여사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조흔파 선생님의 아내인 정명숙 수필가의 인사말과 가족소개가 있었다. 딸과 사위가 이 행사에 참석하고 외손자 둘은 불참했다. 의사인 사위 강원준의 인사말에 이어 조카 내외와 손자, 그리고 양아들의 소개가 있었고 나머지 가족, 아들과 친손녀들은 미국에 있다고 했다.
정명숙 수필가는 남편 조흔파와의 25년 결혼생활 이야기를 하였다.
“조흔파란 이름은 『백민』에 「종소래」를 발표할 때 봉순이라는 계집애 이름을 어찌 쓰겠느냐고 안서 김억 선생과 정비석 선생이 흔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때부터 쓰게 된 이름입니다.
『얄개전』은 제목을 어떻게 할까, 고심하는 흔파에게 함경산맥 쪽에서는 기질이 드센 개구쟁이는 ‘얄개’로 불리니 ‘얄개’가 어떠냐고 하여 제목으로 쓰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흔파가 글을 쓸 때에는 집중하느라 두 아들에게도 신경질을 부리고 동네아이들도 가까이서 놀지 못하게 멀리 쫓아버리곤 했습니다.
흔파는 천재였지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하루 4시간 수면에 글 쓰고 술 마시는 시간이 아니면 라이카 카메라 메고 다니며 연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뭐라하면 작품구상이라고 했지요.
그 시절은 보통 말쌀을 사 먹던 시절인데 백색전화를 놓고 쌀 1가마를 들일정도로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 쌀 손님 대접해야했고 오는 사람 모두 퍼주어야 했으므로 실제 2말 정도만 우리가 먹었습니다.
가난뱅이 문인친구들이 어떻게 너만 원고청탁이 많으냐고 시샘하면서 쌀 내라, 돈 내라 하여 마침내는 교통비까지 주어 보내며 내 결혼반지까지 빼 주어야했습니다.
조흔파는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들어와 앉아 ‘땅!’ 소리가 나면 원고지에 남버링을 하느라 탕탕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후에는 고무인과 나무도장으로 간편하게 인지로 사용했지요. 55년도에 제가 인지 팡팡 찍으면 우리 딸이 ‘엄마! 돈 생겨?, 엄마 뭐 사 줄래’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흔파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생산담당, 당신은 수금담당, 쓰는 담당이야!’
그러던 사람이 1980년 12월 24일 가고나니 친구인 정비석 구상 선생이 흔파 아내 잘 못 될까봐 많이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사나이들의 그 우정을 딛고 일어 날수 있었습니다.
오늘 흔파를 정리하는 담당으로서 흔파 사후 나를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장미화의 피아노 연주에 신동철 작사 작곡의 <산아> 와 송창식의 <우리는> 의 노래를 박경태 베이스바리톤으로 듣고 조흔파 선생 문학의 밤은 막을 내렸다.
조흔파 소설가(1918-1980)는 1918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41년 일본 센슈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51년 『고시계考試界』에 <계절풍>을 발표하고 1953년 작품집 『청춘유죄』와 『얄개전』을 간행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인간의 애환을 긍정적으로 그려 인간미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머소설, 명랑소설이라는 장르정착에 기여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주유천하』, 『소설국사』, 『얄개전』, 『대한백년』, 『만주국』등이 있다.
민문자 실버넷문화예술관장 mjmin7@silvernetnews.com